조선 후기의 원예: 교유(交遊)와 화훼를 매개로 한 지식 실천
Horticulture in Late Chosŏn Korea: Knowledge Practices Mediated by Literati Sociability and Flowers
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Seoul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221
Abstract
Although often dismissed as a refined pastime of the literati, horticulture in eighteenth- and nineteenth-century Chosŏn functioned as a meaningful site of network-based knowledge practices mediated by literati sociability and the materiality of flowers. Rather than developing into a formalized discipline, late Chosŏn horticulture took shape as a relational and collaborative practice grounded in dense networks of scholar-officials, the circulation of plant materials and relative information, and embodied engagements with ornamental species. Stable social ties facilitated organized garden excursions and poetic gatherings that served as key venues for observing, exchanging, and validating plant knowledge. The gifting of rare species from China and Japan stimulated new cycles of cultivation and investigation, while diplomatic missions to Beijing—including routinized visits to urban flower markets—fostered distinctive ways of perceiving, handling, and studying plants. Unlike the pan-European scholarly communities of early modern Europe, which relied on universalist identities and institutional frameworks, this Chosŏn network operated through intimate personal ties and everyday literary activities, with credibility secured through mutual recognition, shared affective experience, and iterative verification among peers. In this way, horticulture developed as a modest yet dynamic mode of knowledge-making that bridged elite inquiry and everyday life.
1. 머리말
조선 후기 지식인이 정원을 조성하고 다양한 화훼를 재배, 감상하는 원예 활동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원예의 성행은 사물에 대한 관심의 확대와 여항문학을 비롯한 문예적 취향의 발달과 맞물려, 지식인의 정신적ㆍ문화적 활동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존 연구는 주로 국어국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이러한 원예 활동을 사회적으로 확산된 문화 현상으로 묘사하고 서술하거나, 원예 활동 속에서 창출된 문학 작품의 특징과 의미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1 한편 원예 활동과 관련된 화훼 지식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다룬 지식사학적 연구도 일부 존재하지만, 이들 연구 역시 대체로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유박(柳璞, 1730∼1787)의 『화암수록(花菴隨錄)』,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예원지(藝畹志)』 등 문헌에 수록된 품종 정보와 재배법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개별 지식인이 재배 경험과 문헌 참고를 결합하여 화훼 지식을 재구성, 체계화하고 이를 저술로 남긴 것으로 파악하는 데 머물러 왔다.2
물론 『화암수록』이나 『예원지』와 같은 원예 전문 저술에 정리된 화훼 지식이 저자의 재배 실천과 문헌적 탐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컨대 김상휴(金相休, 1757∼1827)는 지인 심윤지(沈允之, 1748∼?)의 『초목화훼보(草木花卉譜)』에 서문을 쓰면서, 이 책이 “기이한 화훼를 구해 정원에 나란히 심고 각각의 명칭, 색채, 형상, 성질 및 재배법을 기록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나아가 “위로는 『시경』과 「이소」를 본받고, 아래로는 세속의 방법을 채록하며, 그 중간에서는 백가의 논의를 두루 참고하여 종합, 정리했으므로 넓으면서도 정밀하다”고 평가하였다.3 또한 꽃을 그린 사생첩인 김덕형(金德亨, 1750∼?)의 『백화보(百花譜)』에 대해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김군이 화원으로 달려가 눈으로 꽃을 주시하며 하루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그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꼼짝하지 않으며, 손님이 와도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다”고 하며, 그의 몰입적인 화훼 연구 실천을 묘사하였다.4 이처럼 개인적 경험과 문헌 지식을 결합하여 화훼 지식을 통합, 재구성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 원예 연구의 보편적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원예 활동에 몰두한 다수의 지식인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관련 저술에 드러난 화훼 지식의 축적과 정리는 상당 부분 지식인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원예 문화의 발전과 화훼 지식의 생산은 개인의 고립된 지적 활동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단지 저술이라는 결과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이정은 조선 후기의 두루미 키우기 사례를 통해, 관상 식물이나 애완 동물과 같은 구체적 사물에 대한 완물적 애착과 학문적 관심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러한 사물에 밀착된 재배ㆍ사육 활동에서 촉발된 실천적 탐구가 지식 생산의 중요한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지적하였다.5 이 연구는 일상적 삶 속에서 사물의 역할과 실천의 중요성을 부각함으로써, 두루미 키우기가 단순한 유희나 오락을 넘어 새로운 지식 창출로 이어졌음을 밝혔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원예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6 이에 본고는 지식인의 지적 탐구를 촉발하는 화훼라는 구체적 사물의 역할과, 텍스트 차원을 넘어서는 일상적 지식 실천으로서의 학문 활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 후기의 화훼 지식의 생산이 고립된 개별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예 취미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배경 속에서 지식인 관계망의 작동과 상호작용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과학 지식의 형성과 관련하여,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이 시사하듯, 지식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얽힌 다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점진적으로 구성되고 안정화되는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식은 고정된 체계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식 생산을 둘러싼 네트워크의 구조와 상호작용의 맥락을 함께 조명할 필요가 있다.7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원예에서 나타나는 관계적 지식 실천의 양상을 “교유(交遊)”라는 행위적 요소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교유는 조선 후기 정치적ㆍ학문적ㆍ신분적ㆍ혈연적 연대가 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된 지식인 관계망과 그 결속 및 교류 방식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나아가 교유는 단순한 개인 간 혹은 집단적 교류를 넘어, 지식인 사회에서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핵심 기제로 기능하며, 화훼 지식의 사회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토대와 물질적 자원의 형성과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근대 유럽의 과학 지식 네트워크에 대한 선행 연구와의 비교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16-18세기 유럽에서는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을 중심으로 서신 교환과 텍스트 검토를 매개로 한 범유럽적 지식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학문적 진리성과 윤리성에 대한 공동의 규범 위에서 작동하였다.8 또한 17세기 영국에서는 성실함과 정직함을 핵심으로 하는 “의례(civility)”가 “신사(gentleman)” 정체성과 결합하여 과학 활동의 신뢰성(credibility)을 보증하는 기준으로 기능하였고, 한편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상인·의사·박물학자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동식물 상품, 임상 사례, 여행 보고 등을 통해 유통된 정보를 경험에 대한 “신임(trust)”에 기반하여 수용함으로써, 지식의 순환과 재생산이 이루어졌다.9 이와 같은 논의는 지식이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규범 속에서 형성되고 유통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유교 사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교유 네트워크에서 지식의 유통과 생산을 추동하는 기제가 이와는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원예 영역에서 나타나는 화훼 지식 생산은 이러한 네트워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조선 후기 지식인 네트워크에 기반한 원예 활동과 화훼 연구의 전개 양상을 검토하고, 화훼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어떠한 기제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교유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조선 후기 지식인 네트워크의 구조와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접근 방법에 입각하여, 본고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단체 정원 유람, 화훼의 증여와 교환, 그리고 북경 화초포 탐방이라는 세 가지 원예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 다음의 세 가지 층위에서 교유와 화훼를 매개로 한 지식 실천의 전개 양상과 그 맥락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사회적 관계의 층위에서 18–19세기 조선 지식인은 다양한 사회적 연대와 공동의 문예적 취미를 매개로 원예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화훼 지식은 교유의 기제를 통해 유통과 재생산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축적, 확대되었다. 둘째, 물질적 층위에서 화훼 분재나 종자와 같은 실물과 그에 수반된 지식은 교유, 특히 문예 모임이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동하였다. 아울러 지식인들이 서로 주고받은 원예 관련 시문과 여행기 등 교유의 텍스트 산물 역시 화훼 지식을 담지하는 매체이자 지식인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매개물로 기능하였다. 셋째, 공간적 차원에서 정원, 모임의 장소, 연행 노정 등 구체적 공간은 지식 실천이 이루어지는 상이한 작동 맥락을 제공하며, 화훼 지식의 생산과 유통 경로를 규정하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이 본고는 교유라는 네트워크의 작동 기제와 화훼라는 구체적 사물의 역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조선 후기 원예를 단순한 문화 현상이나 개별적 지적 활동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고, 지식인 집단이 일상적으로 교차하고 상호작용한 교유망 속에서 물질적 실천을 매개로 화훼 지식을 심화, 확장해 나간 역사적 과정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한국 근세 과학사, 지성사의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유의미한 해석 경로를 제시할 것이다.
2. 단체 정원 유람과 문예 모임을 통한 화훼 지식의 확산
조선 후기 원예 문화의 성행은 다양한 화훼를 재배하고 감상하는 정원, 혹은 화원이라는 공간의 활발한 조성과 유람을 통해 구체화된다. 기존 연구는 주로 어문학이나 조경학의 관점에서 정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식인의 취미 활동과 문예 창작, 정원의 구조와 구성 요소, 그리고 그에 반영된 문예적 성향 등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10 그러나 조선 후기의 정원은 단순히 완물적 경향에 기반한 개인적 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정원은 다양한 화훼가 집적되고, 그 형태ㆍ품종ㆍ재배법에 관한 정보가 응축된 체험의 장으로서, 유람을 통해 지식인이 화훼 지식을 직접 체득하는 실천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정원은 지식인 교유의 핵심 무대로도 기능하였다. 즉 정원은 단체 유흥의 장소이자 집단적 학습의 현장이 결합된 공간으로서, 화훼에 관한 지식 실천이 밀도 높은 교유 네트워크의 작동 속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는 중심 거점이었다.
조선 후기 정원은 대체로 개인 소유의 공간이었으나, 유람객에게 개방되는 경우가 많아 비교적 높은 접근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접근성은 무엇보다 정원 소유자와의 인적 관계를 매개로 형성되었다. 예컨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783년에 처남인 오대익(吳大益, 1729∼?)의 소개를 통해, 그의 조카 오숙(吳璹, ?∼?)이 백문(白門)에서 조성한 정원을 방문하여 유람하였다.11 또한 이익의 아들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그와 종형제 관계인 이함휴(李咸休, 1698∼1770)가 소유한 경기도 포천의 율원(栗園)을 유람하였는데, 이 정원은 이함휴가 백부 이서(李漵, 1662∼1723)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12 이와 같이 정원 유람은 친족 관계를 포함한 복합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인적 관계에 기반한 정원 접근성과 교유의 작동 방식은 유박의 사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8세기 후반 유박은 황해도 배천 금곡에 백화암(百花菴)이라는 정원을 조성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용휴13, 채제공, 이헌경(李獻慶, 1719∼1791), 목만중(睦萬中, 1727∼1810),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우경모(禹敬謨, 1744∼?), 유금(柳琴, 1741∼1788),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등에게 시문을 청하였다.14 이들은 모두 당대 정치적ㆍ학문적으로 서로 긴밀한 연계를 형성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백화암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거나, 유박과 개인적인 면식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박은 자신의 관계망을 매개로 이들에게 백화암을 위한 시문 창작을 요청함으로써 정원의 이미지와 명성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15
유박은 관직에 나아간 적은 없었으나, 소북계 집안 출신으로 당시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와 정치적 합류 및 혼인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같은 문화 유씨 출신의 유득공과 유금 등을 포함한 노론계와도 혈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16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백화암 관련 시문을 매개로 지식인들과의 인적 관계를 구체화하고, 이들과 지속적인 교유와 소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박의 백화암은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교유망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지식인들이 인식하고 접근하기 쉬운 공간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접근성의 증대는 단순히 정원 유람의 기회를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훼 지식의 습득 기회를 동시에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목만중은 유박을 직접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꽃을 많이 보아 그 품격을 구별할 수 있고, 꽃을 깊이 사랑하여 반드시 그 성정을 잘 알고 있을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만일 백화암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다고 언급하였다.17
나아가 교유 관계를 통해 확대된 정원 유람의 기회는 화훼 연구와 지식 창출의 중요한 조건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교유 관계를 맺고 있던 신위(申緯, 1769∼1845)의 정원에서 “홍두(紅荳)”라는 관상식물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18 신위는 연행 중 청나라 문인 옹수곤(翁樹崐, 1786∼1815)에게서 홍두를 얻어 자신의 정원에 심었고, 이유원은 이를 자세히 관찰한 뒤 왕유(王維)의 시에 등장하는, 남방에서 자라 그리움을 상징하는 “홍두”로 파악하였다. 그는 나아가 『군방보(羣芳譜)』에 기록된 “홍두”가 “장마철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가지 끝이 산호와 같고 콩이 붉고 아름다워 사랑스럽다”고 서술된 점을 근거로, 문헌 속 “홍두”와 왕유 시 및 신위 정원의 식물이 서로 동일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19 이와 같이 이유원은 교유 관계를 계기로 이루어진 정원 유람을 통해 해당 식물을 직접 관찰하고, 그 생물학적 특징과 문헌적 의미를 교차 검토함으로써 보다 정밀한 인식을 도출하였다. 이러한 지식 실천은 “옹수곤-신위-이유원”으로 이어지는 교유망의 작동과, 이에 기반한 정원 유람이라는 경험적 체득의 기제를 통해 가능하였다.
한편 주목할 점은, 이러한 정원 유람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행위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높은 접근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원 방문은 상당수 경우 교유 관계에 기반한 집단적 활동의 형태를 띠었다. 실제로 채제공이 서울 일대의 여러 정원을 유람할 때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동행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 동행자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시기 | 장소 | 동행자, |
|---|---|---|
| 1783년 3월 10일 | 필운대 근처의 “조원” | 목만중(睦萬中), 이정운(李鼎運), 심규(沈逵), 유항주(兪恆柱), 윤상동(尹尙東) |
| 1784년 윤3월 13일 | “조원” | 오대익, 이유경(李儒慶), 이혁주(李赫胄), 목만중, 채홍리(蔡弘履) |
| 1784년 | 백문 안의 “오원” | 오대익, 오숙, 목만중, 채홍리 |
| 1784년 | 용산 근처의 “이원” | 목만중, 오대익, 채홍리, 권사언(權師彥) |
| 1784년 | 성북 북저동 | 목만중, 이정운, 이익운(李益運), 채서공(蔡敍恭), 채홍선(蔡弘選), 채홍원(蔡弘遠) |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채제공의 정원 유람은 일정한 인적 구성이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의 문인인 이정운ㆍ이익운ㆍ유항주를 비롯하여, 채제공과 친족 관계에 있던 오대익ㆍ채서공ㆍ채홍선ㆍ채홍원 등이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나아가 당시 채제공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목만중ㆍ권사언ㆍ채홍리 역시 정원 유람에 반복적으로 동행하며 상호 교유를 이어갔다. 이처럼 채제공을 매개로 조직된 정원 유람은 당시 내부 분열과 갈등이 심했던 남인계를 일정 부분 결속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20, 다양한 인적 관계에 기반한 교유를 통해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화훼를 둘러싼 유흥 활동과 지식 생산이 이루어지는 장으로 작동하였다. 다시 말해, 복합적인 인적 연대 위에 구축된 교유망은 원예라는 공동의 문예적 취향과 정원 유람이라는 집단적 활동을 통해 집단 결속과 학문적 교류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화훼 지식 실천의 확대 가능성과 그 기반을 함께 마련하였다.
이러한 단체 정원 유람은 지식인과 화훼, 지식인과 지식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현장 견습의 기제로 기능하면서, 화훼 지식의 유통과 재생산을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촉발하였다. 첫째, 정원 유람은 단순한 시각적 관찰을 통한 지식 습득을 넘어, 현장에서 이루어진 일상적 대화를 매개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유득공은 연암 그룹으로 묶이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등과 함께 1770년 봄 서울 북쪽에 위치한 삼청전(三清殿) 옛터를 방문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수십 종의 야채와 풀을 채취해 와 박식함으로 이름난 이덕무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그 명칭과 종류를 상세히 기록하였다.21 또한 조면호(趙冕鎬, 1803∼1887)는 1883년 봄 삼청동 일대를 유람하던 중 십여 종의 분재가 가꾸어진 정원을 방문하여, 구면인 정원 주인 김학진(金學鎮, ?∼?)과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화훼의 명칭과 특징을 확인하였다.22 이와 같이 정원 유람 과정에서 동행자나 정원 관계자 등 인물과의 친분, 혹은 사회적 연대는 한정된 공간에서 정보가 원활하게 교환되는 중요한 매개로 기능하였다. 결국 화훼에 관한 지식 실천은 교유 관계에 기반한 집단적 유흥과 상호 소통의 과정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는 단체 정원 유람이 지식 생산의 중요한 장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조선 후기 성행한 시사(詩社)와 아회(雅會)와 같은 지식인 모임은 화훼 감상으로 대표되는 취미 생활을 문예 창작과 향유의 중요한 내용으로 포섭하는 자리였으며23, 동시에 지식인 간 결속과 교유 관계를 강화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이러한 문예 모임을 통해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단체 정원 유람이나 집단적 화훼 감상과 같은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앞서 살펴본 채제공의 경우, 그가 정원 유람을 빈번히 전개하던 1770-1780년대에 종남사(終南社)와 번계시사(樊溪詩社)를 주도하였는데, 그의 정원 유람에 참여한 인물들 역시 대부분 이 시사에 속한 구성원들이었다.24 한편 꽃구경은 시사나 아회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였으며, 정원 역시 이러한 모임의 핵심 장소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정원의 화훼는 지식인 문예 창작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죽란시사(竹欄詩社)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죽란시사는 1790년대 서울 명례방의 한 정원에서 결성된 모임으로, 「죽란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에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해지면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세말에 매화가 꽃방울을 터트리면 한 번 모인다”고 약조되어 있듯이, 정원 내 화훼 감상은 모임의 주요 목적이자 핵심 계기로 기능하였다.25 특히 죽란시사에서는 국화를 중심으로 한 감상과 문예 창작이 두드러지게 이루어졌는데26, 정약용은 국화의 재배와 관찰에 깊이 몰두하였을 뿐 아니라27 시사 구성원들과 함께 정원의 서재에 촛불을 설치하여 국화의 그림자를 비추고 이를 소재로 시를 짓는 등, 감상과 창작을 결합한 실천을 전개하였다.28
이와 같은 원예를 매개로 한 문예 모임은 기존 교유망에 속한 지식인들이 유흥의 실현을 계기로 문예 창작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화훼 지식의 축적과 확산, 그리고 재생산에 관여하게 하는 학문적ㆍ실천적 장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장에서 화훼와 관련된 지식은 사적 친목의 강화와 문화 향유라는 공동의 실천 속에서, 감수성의 공유에 기초한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순환하였다. 예컨대 심능숙(沈能淑, 1782∼1840)은 1834년 일본에서 들여온 희귀한 국화 품종 “백운타(白雲朶)”를 구입한 뒤, 1836년 “동우(洞友)”들과 함께 이를 감상하기 위한 “백운제일회(白雲第一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도성에서 해당 품종을 접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그 존재와 특징을 널리 알리고 지속적인 감상 모임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서 기획된 것이다.29 주목할 점은 심능숙에게 백운타 감상이 단순한 심미적 향유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백운타를 처음 들여왔을 때 「백운타기(白雲朶記)」라는 감상문을 작성하여, 이 국화의 줄기ㆍ잎ㆍ꽃ㆍ꽃자루 등 각 부위의 형태를 세밀하게 서술하고, 물 주기와 꺾꽂이 등 재배 방법까지 시험하여 기록하였다.30 감상문의 형식을 띤 이 글은 서정적 표현보다는 화훼의 생물학적 특징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의 회람만으로는 해당 화훼에 대한 인식 확산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심능숙은 “백운제일회”라는 문예 모임을 조직하여 백운타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단체 유흥과 대면 경험을 매개로 한 화훼 지식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또 다른 사례로는 19세기 들어 확산된 수선화 감상 풍조를 들 수 있다. 조면호에 따르면, 19세기 초반 수선화를 재배하던 인물들 가운데 이용수(李龍秀, 1776∼?)와 박종훈(朴宗薰, 1773∼1841)이 특히 재배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수선화를 주제로 빈번히 아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이다.31 이와 같은 모임의 전개와 그 과정에서 창작된 시문의 회람은 수선화 재배와 감상 풍조의 확산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수선화 관련 지식이 지식인 교유망 속에서 유통, 순환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특히 수선화 재배법이 아직 충분히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문예적ㆍ유흥적 취향을 매개로 이루어진 정보 교환은 화훼 지식의 축적과 체계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실천적 조건이었다. 조면호 역시 이러한 모임을 통해 다양한 재배법을 습득하고 이를 실제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자기 그릇에 물을 담아 수선화를 씻는 방법, 아침에 분재를 처마 밑에 두어 햇볕을 쐬는 방법, 흙을 사용하지 않고 호남 부안현(扶安縣)에서 나는 채색 자갈을 뿌리 위에 깔아펼쳐 뿌리를 안정시키는 방법 등을 익혔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정보를 다시 시구로 엮어 회람함으로써 자신이 획득한 지식을 교유망 속에서 재확산하고자 하였다.32 이처럼 지식인의 문예 모임을 주요 통로로 확산된 수선화 재배법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편찬한 방대한 잡기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반영되어 보다 체계적이고 정제된 형태로 정리되었다.33
이와 같이 일정한 교유 관계에 기반하여 꽃구경이나 정원 유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지식인의 문예 모임은 단순한 화훼 감상이나 작시의 장을 넘어, 화훼 지식 생산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크의 작동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공간은 화훼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관련 정보의 획득을 위한 실천적 기회와 물질적 기반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신분적 연대와 문화적·경험적 지향을 공유한 지식인들이 단체 유흥과 문예 창작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그 결과물인 시문 등 텍스트의 회람을 통해 화훼 지식의 순환과 재생산을 지속적으로 촉진하였다.
3. 교분 속 화훼와 그 지식의 이동과 교환, 그리고 재구성
정원 유람 외에도 조선 후기 화훼 지식은 보다 넓은 사회적 공간 속에서, 지식인의 화훼 실물 및 관련 정보 수집 활동을 매개로 유통되고 재생산되었다. 다만 특정 공간에 집약된 교유망의 작동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예적 교류 및 체험과는 달리, 이러한 수집 활동은 보다 확장된 관계망과 일상적 상호작용의 장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화훼와 그에 관한 지식의 장거리 이동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화훼와 지식의 이동과 유통, 그리고 지식 실천의 전개를 촉진한 기제는 지식인 간의 친분을 바탕으로 한 일상적 왕래와 정서적 교환에 있었다. 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비교 가능한 또 다른 경로로서 화훼 매매가 지식 생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식인의 화훼 수집에서 매매는 가장 직접적인 획득 방식으로 기능하였다. 관련 기록이 풍부하게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 원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화훼의 공급과 매매는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34 화훼 매매는 상거래라는 인적ㆍ물적 유통 방식을 통해 화훼 실물과 관련 정보의 실질적 이동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 측면을 넘어, 매매에 관여한 주체와 그 운영 방식에 주목할 때, 그것이 화훼 지식 생산과 맺는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옥(李鈺, 1760∼1813)은 조선 후기 한양의 화훼 점포의 존재와 운영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관련 사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는 화훼 매매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화훼 매매 과정에서 작동한 지식 생산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조선 후기의 화훼 매매는 특정 시장에 집중된 대규모 거래라기보다, 꽃장수의 개인적 재배와 판매 활동에 기반한 산재적ㆍ개별적 양상이 강하였다. 이옥이 조선에는 꽃 시장[花市]이 없다고 지적한 것은, 화훼 거래가 국가가 관리하는 시전이나 중국과 같은 대규모 전문 시장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신 한성의 가장자리나 구석진 곳에서 퇴임한 노년의 아전들이 화훼를 재배하고 이를 생업으로 삼아 판매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35 강이천(姜彝天, 1769∼1801)의 「한경사(漢京詞)」에서 “성북과 성동에 꽃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 일 년 내내 꽃을 피우고 공급이 끊이지 않는다”36고 묘사한 기록은, 당시 한성 외곽에 산재한 꽃장수들의 활동과 화훼 매매의 지속성을 잘 보여준다.
둘째, 화훼의 희귀성과 접근 난이도에 따라 가격과 유통 방식이 크게 달랐다.37 이옥의 기록에 따르면,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ㆍ복사꽃ㆍ국화와 같이 비교적 흔한 식물은 성곽 주변의 꽃장수를 통해 낮은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반면 동백ㆍ치자ㆍ영산홍ㆍ왜척촉ㆍ종려나무 등과 같이 기후나 토양 조건상 한양이나 조선에서 쉽게 재배되지 않는 희귀 품종은, 전문 인력을 통해 남방이나 국외에서 들여오는 보다 사적이고 비용이 큰 경로를 통해 공급되었다.38 이러한 품종들은 일반 가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가였으며, 수선화ㆍ소철ㆍ종려나무 등은 조선 후기 사치품으로 간주되었다.39 이와 같이 한성 내 꽃장수와의 직접 거래를 통해서는 제한된 종류의 화훼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화훼 매매가 일정 범위에서 화훼 실물과 정보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그 자체만으로는 다양한 품종의 확보와 지식의 축적을 담보하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셋째, 꽃장수의 화훼 판매는 상업 활동으로서 안정적인 공급을 유지하는 동시에 소비자의 수요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며, 그 핵심 수단은 화훼 재배 기술의 독점에 있었다. 이옥이 전한 일화에 따르면, 한 무인이 재상에게 바칠 희귀한 매화를 구하고자 한성 일대를 두루 수소문한 끝에, 매화를 잘 기르는 한 노인의 집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40 이 일화는 당시 화훼의 유통 경로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재배에 필요한 기술과 역량을 보유한 이들 또한 극히 소수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실은 곧 꽃장수가 일반적인 화훼 소비자나 호사가와는 구별되는, 고도의 재배 기술을 갖춘 전문 생산자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임전(任錪, 1560∼1611)의 시에서도 한성 동쪽의 꽃장수 노인이 “본래 흰 것은 희게, 붉은 것은 붉게 피게 하고 … 그의 처는 접붙이기에 능하며, 그의 첩 또한 재배에 능하여 사시사철 꽃을 피운다”고 묘사되어 있다.41 이는 화훼 재배와 판매가 일종의 가족 단위 산업으로 이루어졌으며, 가구 구성원 전체가 화훼의 품종 관리, 심기, 접붙이기, 이식 등 다양한 재배 기술을 체계적으로 장악하고 실행하는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상업적 이익을 보장하는 핵심 자산으로서, 쉽게 공개되거나 널리 유통되지 않았다. 강이천은 여항에서 국화를 재배, 판매하던 한 노인의 사례를 전하면서, 그가 국화의 개화 시기와 꽃의 크기ㆍ색채를 임의로 조절하고, 한 줄기에서 서로 다른 색의 꽃이 동시에 피도록 만드는 등 뛰어난 재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부유한 가문에 기이한 국화를 공급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그 비법은 후대에 전수되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한다.42 이러한 사례는 화훼 재배 기술이 상업적 비밀로서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매매 과정에서 실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통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상거래를 통한 화훼 실물과 정보의 획득은 품종의 다양성 확보와 재배 기술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한성 외 지방에서는 원예 문화 자체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꽃장수의 존재나 화훼 매매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상업적 경로를 통한 화훼 수집은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43 이러한 조건 속에서 조선 후기 다수의 지식인은 상거래보다 다른 지식인과의 교분에 기반하여 화훼 실물과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다. 이는 금전 교환이 특징인 상업적 거래와 달리, 밀접한 교유 관계 위에서 이루어진 감정적·문화적 교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교분에 기반한 화훼의 이동과 교환은, 조선 후기 일상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식인이 화훼를 대상으로 전개한 지식 실천의 핵심적 인적·물적 네트워크로 기능하였다.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서는 직접 방문이나 서신 왕래 등 일상적 교유를 통해 희귀한 화훼 품종을 선물로 주고받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예컨대 유희(柳僖, 1773∼1837)는 지인 조운성(趙雲成, 1761∼?)의 부탁을 받고 서신을 보낼 때 모란, 왜홍(倭紅) 즉 왜척촉, 수국 등 세 가지 화훼를 구해 함께 전달하였다.44 또한 이유원은 평소 교유하던 이여해(李汝諧, ?∼?)와 송정옥(宋鼎玉, 1801∼?)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희귀한 흰 모란[白牡丹]을 증여받아 이를 세심히 재배하였다.45 이러한 화훼 실물의 전달은 지식 실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교분에 기반한 화훼의 증여와 교환은 지식인 간 교유 관계의 직접적 산물로서, 매우 사적이고 정서적인 성격을 지닌 행위였다. 동시에 이는 상대방에게 화훼 실물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에 기반한 관찰과 재배 실천, 나아가 화훼 연구에 필요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쉽게 접하기 어려운 희귀 품종의 경우, 이러한 교분에 기반한 유통이 사실상 핵심적인 획득 경로로 기능하였다. 둘째, 지식인 간의 화훼 교환은 단순한 물질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재배 실천과 관련 지식의 공유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사례에서 이유원은 흰 모란을 두 차례 얻어 재배를 시도하였는데, 첫 번째 재배에 실패한 이후 두 번째 시도에서는 재배 기술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유희는 화훼를 선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당 식물의 성질과 적합한 토양 등 재배 정보를 함께 전달하였다.
이처럼 지식인 간에 이루어진 화훼와 그에 관한 지식의 교환은 교분이라는 감정적 소통의 행위를 매개로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유통 과정에서 지적·물질적 자원으로서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검증되었다. 그 결과 화훼 지식은 단순한 전달에 머무지 않고, 지속적인 순환, 반복적인 실천과 상호작용을 통해 축적되고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교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화훼와 지식의 이동 양상이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지, 두 가지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선 후기 수선화의 확산 경로를 통해, 교분에 기반한 화훼 유통의 특징과 그 지식 실천에서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 말 18세기 초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처음으로 중국에서 수선화를 구입하여 재배했으나, 이후 18세기 동안에는 수선화가 조선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전후에 이르러 비로소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진다.46 이 시기 조선 지식인의 수선화 입수 경로는 대체로 중국으로부터의 구입에 의존하였다. 1840년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에 자생하는 수선화의 존재를 언급한 이후에도47 실제로는 여전히 중국을 통한 수입이 주요 경로로 기능하였다.48
그러나 이러한 외래 유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내부에서 이루어진 이차적 확산, 즉 교유 관계에 기반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유통이었다. 19세기 초 한양에서의 수선화 확산은 1800년 북경에서 수선화를 들여온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이 그 구근을 주변 지식인들에게 분양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49 정약용은 교유 관계에 있던 이기양으로부터 수선화 구근 하나를 얻어 재배하였고50, 이가환(李家煥, 1742∼1801) 등 경화사족 가문에서도 이를 계기로 수선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51 또한 1828년 김정희는 평안감사로 있던 부친을 방문하던 중 과거 한양에서 얻은 수선화를 고려 자기 화분에 옮겨 심은 뒤, 이를 다시 남양주에 있던 정약용에게 선물하였다.52 이와 같이 중국에서 유입된 수선화는 한양을 중심으로 교유 관계망을 따라 이동하며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분 기반의 화훼 유통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초 김창업의 수선화 입수와 재배 시도, 그리고 1800년 전후 이기양의 수선화 전래 및 전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이유원은 신위를 1812년 중국에서 수선화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인식하였다.53 이는 이기양을 통해 유통된 수선화가 널리 확산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 원인으로는 재배 기술의 부족, 제한된 유통 경로와 높은 가격, 그리고 이기양 개인의 영향력 한계 등을 들 수 있다.54 다만 이러한 요인들은 수선화 유통 자체를 저지했다기보다, 그것이 제한된 관계망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수선화의 확산은 하나의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 것이 아니라, 복수의 교유 네트워크를 통해 소규모로 병렬적·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교유 관계의 긴밀성과 범위는 각 네트워크의 형성과 작동을 좌우하는 핵심 조건으로 작용하였으며, 지식인이 속한 교유망의 밀도에 따라 화훼의 수집과 교환의 효율 역시 달라질 수 있었다. 예컨대 이기양을 중심으로 한 유통망과는 별도로, 신위 역시 중국에서 직접 수선화를 들여와 이유원 등 주변 인물들에게 분양하였으며, 동시에 자신도 김유근(金逌根, 1785∼1840), 서기수(徐淇修, 1771∼1834) 등 지식인으로부터 몇 차례 수선화를 얻어 재배하였다.55 이와 같이 19세기 이후 수선화의 확산은 소수의 긴밀한 관계로 연결된 지식인 집단 내부에서 선물과 분양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복수의 네트워크를 통해 병행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교유 기반의 유통은 규모나 수량 면에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나,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교환을 통해 화훼 연구에 필요한 실물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수선화와 같은 희귀하고 고가의 외래 품종은 그 특성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지식인에게 우선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는 교유 관계가 화훼 유통의 핵심 조건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화훼의 이동과 교환은 단순한 실물 전달에 그치지 않고, 원예가 일상화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교유 활동의 일부로 이루어졌다. 특히 외래 화훼의 재배법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19세기 후반까지도 수선화 재배는 실패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56 이 과정에서 재배의 재시도와 기술 검증을 위해 주변 지식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수선화 실물을 교환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교유 관계에 기반한 네트워크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교분의 작동에 따른 화훼 실물의 이동과 교환은 단순한 물질적 유통에 그치지 않고 화훼 관련 지식의 유통과 축적으로 이어지며, 이는 지식 순환을 지속적으로 심화시키는 지식 실천의 중요한 일환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수선화의 경우, 1800년 전후 중국산 수선화가 조선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으나, 조선 지식인의 재배는 중국과의 환경 차이, 재배 기술이나 식물 생리학적 정보의 부족 등으로 인해 실패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지적된다.57 서유구와 이규경이 수선화 관련 지식을 저술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텍스트의 제한된 유통, 혹은 기록된 지식과 재배 실행 사이의 괴리로 인해, 실제 재배 현장에서는 기존 축적된 지식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측면도 존재하였다. 물론 재배의 성공 여부는 화훼 지식과 기술의 축적 정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만으로는 해당 시기 화훼 지식의 형성과 변동 과정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식을 텍스트로 정리하는 저술 활동이나 개별 지식인의 성공 경험뿐 아니라, 화훼 지식이 지속적으로 순환, 축적, 확장될 수 있었던 조건으로서, 교분에 기반한 일상적 상호작용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지식 실천의 과정을 함께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수선화의 유통 사례에서 보듯이, 지식인 간의 긴밀한 교류와 소통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화훼 지식의 축적과 실천을 효과적으로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면호의 기술에 따르면, 그의 스승 김정희와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은 모두 수선화를 잘 재배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58 절친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재배 기술을 익혔을 뿐 아니라, 상호 교류를 통해 관련 지식을 교환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김정희는 1840년 제주도에서 자생 수선화를 발견한 직후 권돈인에게 서신을 보내, 해당 식물의 존재와 생물학적 특징을 상세히 전달하였다.59 두 사람 사이의 일상적 소통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재배 실천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김조순(金祖淳, 1765∼1832)으로부터 수선화 구근 다섯 개를 얻은 동시에, “12월에 심어도 늦지 않다”거나 “자기 대접에 물을 담아 심는다”는 등 구체적인 재배법까지 전수받았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실제로 적용하여 구근의 발아에 성공하였다.60 이때 김조순이 제시한 재배법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심상규의 재배 실천을 통해 다시 검증되었다. 나아가 심상규는 김조순에게 지은 시를 통해 해당 방법의 유용성을 재확인함으로써, 이 지식은 교유 관계 속에서 다시 한 번 공유,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수선화에 관한 지식은 반드시 체계적인 텍스트로 정리되거나 널리 유통된 형태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교분에 기반한 네트워크 속에서 일상적 교류를 통해 전달되고, 각자의 재배 실천을 거치며 검증, 보완, 심화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화훼 지식은 고정된 체계로 축적되기보다, 교유망 속에서 순환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실천적 지식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훼 지식의 유통과 축적은 이학규(李學逵, 1776∼1835)의 사례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확인된다. 이학규는 유배 기간 동안 화훼를 직접 재배하여 관련 지식을 풍부하게 탐구하였는데61 그의 재배 실천에는 교유 관계에 기반한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통한 화훼 지식의 이동과 교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교유하던 유생 박씨[朴生]로부터 매화 가지 두 개를 얻어 화병에 꽂아 기른 바 있다. 이에 대해 지은 시의 제목에는 “유황을 끓인 물과 섞어 병에 담아 매화를 기르니 며칠 후 꽃이 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매(早梅)”라고 불리는 만큼 매화를 인위적으로 조기 개화시키는 재배법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시문에는 “이제 화노들이 갈고(羯鼓)를 치는 것을 멈추어도 되니, 그 신령한 효력은 석정지(石亭脂)만 못하네”라는 구절이 등장하며, 이에 대해 이학규는 “본초서에 따르면 유황 가운데 가품으로 석정지라는 것이 있다”고 주석을 달았다. 이는 고전에서 꽃의 개화를 재촉하는 상징으로 사용된 “갈고”라는 북보다, 실제 재배에 사용된 유황이 더 효과적이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62
그렇다면 이러한 유황의 효능과 사용법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획득된 것인가? 물론 문헌 참고나 개인적 실험을 통해 습득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이학규가 교유하던 지식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관련 정보를 획득했음은 확인된다. 그의 언급에 따르면 유황을 섞은 끓인 물을 사용하고 밀랍으로 병 아가리를 밀봉하여 겨울에 매화를 조기 개화시키는 방법은 영남 지역 외의 한 수령이 검증한 문헌 속의 재배법에서 비롯되었다. 이 방법은 영남 달성에 거주하던 유생 추봉래(秋鳳來, ?∼?)가 이를 전해 들은 뒤, 다시 김해에 유배 중이던 이학규에게 전달한 것으로 나타난다.63 이와 같은 재배법의 지역적 이동은 지식인 간 교분에 기반한 일상적·감정적 교류와 견문의 공유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학규는 이를 자신의 재배 실천에 적용하고 검증함으로써, 외부로부터 획득한 정보를 자신의 지식으로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지식의 전달이 다시 교유 관계에 기반한 문학적 교류를 매개로 재구성되며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학규가 추봉래에게 보낸 칠언절구 가운데 “자기 화병의 아가리에 놓인 한 조각의 밀랍이 향기롭거늘 어찌 굳이 늙은 꽃장수에게 재배를 맡기리오”, “유황이 섞인 물 한술을 가져와 평상 앞에서 스스로 여린 싹을 길러보는 것은 어떠한가”와 같은 구절은, 추봉래가 전한 영외 수령의 재배법을 이학규가 재해석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절인 고기와 맑은 소금은 운치가 부족하니 봄소식은 오로지 동백꽃에 맡겨 두었네”라는 구절의 주석에서는, 명나라 진계유(陳繼儒, 1558∼1639) 『미공비급(眉公秘笈)』을 인용하여 소금이 섞인 국수를 사용하면 매화를 번성하게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재배법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64 결국 이학규가 교유의 일환으로 주고받은 시문은 검증된 화훼 재배법을 담아낸 일종의 실용적 지식 자료로 기능했을 뿐 아니라, 교분에 기반한 일상적 교류 속에서 화훼 지식을 매개, 순환, 확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지식인 간 교분에 기반한 일상적·감정적 교류와 소통 속에서 화훼의 실물과 그 지식은 주체 간, 그리고 지역 간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교환되었다. 이러한 이동은 지식인들의 화훼 연구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과 지적 자원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한정된 교유망 속에서 순환한 화훼 지식은 여러 주체에 의해 반복적으로 활용, 검증,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축적되고 심화되었다. 특히 이러한 네트워크의 작동은 단순한 정보 교환을 넘어, 공동의 원예 취미를 매개로 형성된 교류와 사적 친분, 감정적 유대가 결합됨으로써 더욱 긴밀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화훼 실물과 지식의 교환은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일상성과 지속성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반복되며, 결과적으로 지식 생산과 축적의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4. 연행길의 화초포 탐방과 관행화된 견습의 노정
조선 후기에는 정원 유람을 통한 현장 견습과 화훼 수집을 매개로 한 정보의 이동ㆍ교환, 이 두 가지 방식을 결합한 또 다른 형태의 화훼 지식 실천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해외 여행, 특히 연행(燕行) 과정에서 원예 관련 장소를 거듭 방문하는 관행이다. 조선 후기의 정기적 연행은 지식인들에게 국내 식물 지식 네트워크를 외연적으로 확장시켜 주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연행을 통해 중국의 화훼 실물과 관련 정보를 조선에 도입, 유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행이라는 경험 자체가 중국의 원예 문화와 재배 기술을 직접 접하는 현장 학습의 기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원예 취미가 확산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북경 체류 중 원예 관련 장소를 방문하고 그 견문을 기록하는 일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적 실천으로 인식하였다. 이들의 연행 경로와 기록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표적 장소가 바로 북경의 “화초포(花草鋪)”이다. 다시 말해, 북경에 도착한 조선 지식인들은 화훼 시장인 화초포를 관행처럼 방문하고 관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정 공간에서의 현장 견습과 장소 및 화훼 관련 정보의 장거리 이동이 결합되며, 일종의 “관행화된 지식 실천”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화초포는 화훼를 판매하는 상점으로, 그 출현과 운영은 18-19세기 북경에서 두드러진 문화 현상이자 상업 활동이었다. 당시 북경 성내에서는 동쪽의 융복사(隆福寺), 서쪽의 호국사(護國寺)를 중심으로 묘회(廟會)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대규모 상업 지대가 형성되었는데, 이곳에는 서화포ㆍ문구포ㆍ골동포 등과 더불어 화초포도 밀집해 있었다.65 특히 일부 화초포는 단순한 소매점에 그치지 않고, 온실 시설을 갖춰 화훼를 자체 재배하고 직판하는 “화창(花廠)”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66 흥미로운 점은, 융복사 인근에 이러한 화초포는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 지식인의 연행록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화초포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기록은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1766년 연행 중 융복사 동쪽의 한 화초포를 방문하고 남긴 글에서 확인된다. 이후 화초포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필수적인 방문지이자 여행기의 주요 기록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67 특히 이들 기록은 유사한 묘사 구조와 관찰 항목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먼저 화초포에 대한 홍대용의 다음 기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화초포는 융복사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정월 12일 가보니 모두 흙집을 짓고 각종 화분들을 넣어 두었는데, 위는 밝은 창문을 통해 놓았고 아래는 온돌을 만들어 두었다. 그 안에 들어서면 완연히 봄 기분이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차서 화초는 모두 꽁꽁 얼어붙었는데, 유독 이 조그만 흙집 속만은 딴 세계를 이루어 붉은 꽃, 흰 꽃들이 서로 비치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이다. 모란ㆍ작약ㆍ수선화ㆍ해당화ㆍ홍매ㆍ백매ㆍ석류ㆍ월계수 등 없는 것이 없다. 대개 부잣집의 관상용으로 팔리는 모양인데, 사 가는 사람들 또한 끊어질 새가 없으니 이익이 많은 것을 알겠고, 풍습이 사치를 좋아하는 것도 짐작이 갔다.
서쪽으로 훨씬 넓은 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십 개의 화분에 풀과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대함에 더욱 상쾌한 기분을 던져 주었다. 대개 중국 풍속이 석류를 제일 소중히 여기고 월계수가 그 다음을 차지한다. 봄 늦게 사람 집안에서 가꾸어진 화초들을 들여다보면, 석류가 그중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해당화는 우리나라 산단화(山丹花)와 매우 흡사한데, 다만 색깔이 연분홍에 꽃잎이 좀 큰 편이다. 수선은 뿌리는 무 같고 줄기는 파 같고 꽃은 원추리 같은데, 희고 약간의 향기가 풍긴다. 봉오리가 터지기 전엔 모두 아래로 수그리고 있다가 터질 무렵이 되면 평상시처럼 일어서게 되므로 중국 사람들이 진귀하게 여긴다.68
홍대용은 융복사 동쪽에 위치한, 온실과 같은 일정한 규모를 갖춘 화초포의 형태와 판매되는 화훼의 종류를 소개하는 한편, 이를 통해 드러나는 당시 북경의 원예 취향까지 상세히 서술하였다. 이러한 그의 최초의 설명은 이후 지식인들이 반복적으로 주목한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대 연행사들은 화초포를 탐방하면서 홍대용의 기록에서 시사된 관찰의 틀을 공유하고, 유사한 항목을 중심으로 견문을 기록하였다.
첫째, 화초포의 공간 구조와 축조 방식이다. 홍대용의 묘사에 따르면 해당 화초포는 흙으로 지은 집으로 위에 창문, 아래에 온돌이 설치되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온실과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연행 기록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보완된다. 예컨대 1804년 화초포를 방문한 이해응이 “세 구역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땅을 파서 굴집을 만들었는데, 그 등마루가 지면 위로 몇 치쯤 약간 드러나 있다”고 하여 그 규모와 굴집 구조를 설명하였다.69 굴집의 특징에 대해 1827년 홍석모는 “깊이가 4, 5치 이상이고 길이는 10여 칸, 너비는 3, 4칸에 이르며, 그 위에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고 띠풀로 겹겹이 덮어씌웠다”고 하여 보다 상세한 축조 방식을 기록하였다.70 나아가 1831년 화초포를 방문한 한필교는 40, 50칸에 이르는 굴집이 갖추어진 넓은 공간을 묘사하며,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하다고 그 규모에 깊은 인상을 표하기도 하였다.71
이처럼 대규모 온실 시설을 갖춘 화초포는, 조선에서 겨울철 동해를 막고 화훼를 갈무리하기 위해 마련된 움집이나72, 앞서 살펴본 한양 성내의 옥외 화훼 점포와는 그 형태와 성격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계절적 제약을 극복하고 화훼를 대량으로 재배, 판매할 수 있게 하는 이러한 축조 방식과 운영 기술은 조선 지식인의 주요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특히 온실 형태로 조성된 화초포 내부의 풍경은 대체로 12월이나 1월의 한겨울에 북경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들에게 외부와는 전혀 다른, 봄기운이 충만한 이질적 공간, 곧 하나의 “기이한 경치[奇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 방식과 구조적 원리를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를 통해 화초포를 하나의 관찰 대상이자 기술적 탐구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둘째, 조선 지식인의 관심을 끈 화초포의 또 다른 핵심적 특징은 화훼가 사시사철 생장할 수 있도록 마련된 보온 장치와 재배 기술에 있었다. 홍대용의 기록에서 확인되듯, 화초포 내부의 지면에는 온돌이나 연돌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불을 지피면 꽃향기와 함께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이 실내에 가득 퍼졌다는 묘사가 여러 연행록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73 그러나 화초포의 연돌은 단순한 온도 유지를 위한 장치에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석모가 “연기를 쏘이고 물을 대어 화훼를 기른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74, 화초포의 연돌은 병충해 방제와 같은 화훼 관리에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75 이러한 재배 기술은 조선 지식인들이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확인한 지식으로 축적되었다.
특히 화초포에서는 계절에 맞지 않은 화훼를 재배하고 개화 시기를 앞당겨 공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위해 보온 장치와 더불어 다양한 인위적 재배 기술이 동원되었다. 1855년 겨울, 서경순은 화초포에 다녀온 정사와 부사의 견문을 바탕으로 당시 북경 화초포에서 송나라 항주 마승(馬塍) 일대에서 사용되던 “당화법(堂花法)”이 활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76 이 방법은 밀폐된 굴집의 조성과, 소 오줌과 유황을 섞어 토양에 거름을 준 뒤, 끓는 물을 구덩이 속에 부어 증기(蒸氣)를 발생시키고 이를 통해 단기간에 개화를 유도하는 이른바 최화법(催花法)을 포함하는 기술이었다. 이 당화법은 송나라 주밀(周密, 1232∼1298)의 『제동야어(齊東野語)』에 처음 기록된 이후77 청나라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이 『거이록(居易錄)』과 『향조필기(香祖筆記)』 등에 이를 재수록하면서 “오늘날 경사(京師)의 원정(園丁)들이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78 왕사정의 저술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서경순의 설명 역시 왕사정의 언급을 직접 참조한 것이었다. 즉 조선 지식인들은 문헌을 통해 접한 재배 기술을 연행 과정에서 화초포라는 현장에서 실제로 확인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화훼의 조기 개화를 유도하는 또 다른 방법도 이미 익숙하게 알려져 있었다. 이는 중국 『거가필용(居家必用)』에 기원을 두고, 조선 초기 강희안(姜希顏, 1417∼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거쳐 『산림경제』와 『예원지』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된 기술이다.79 이 방법은 말똥을 물에 우려 뿌리면 개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비교적 간단한 방식으로, 굴집의 조성, 보온, 복합적 시비 등을 수반하는 당화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북경 화초포에서 구현된 당화법이 조선 지식인들의 주목을 끈 이유는, 온실 구조와 시비법 등이 결합된 복합적 재배 기술이 조선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기술을 “인력으로 하늘의 조화를 빼앗은 것”이라 표현하며 감탄하였고80, 이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체득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셋째, 조선 지식인의 또 다른 중요한 견습 대상은 화초포에 진열된 다양한 화훼 품종이었다. 이들은 화훼를 단순히 나열하거나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품종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와 중국과 조선 간의 품종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이를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홍대용은 화초포에 있는 화훼 가운데 중국에서 특히 중시되는 품종으로 석류와 월계를 지목하고,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해당화81와 수선화의 형태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다른 지식인들 역시 품종의 희귀성과 지역적 차이에 주목하여 이를 평가하고 기록하였다. 예컨대 박지원은 화초포의 국화 가운데 대부분은 조선에도 존재하지만, “학령(鶴翎)”은 조선 것보다 줄기가 짧고, “금국(金菊)”은 조선에 없는 특이한 품종으로 그 모양이 동전과 같다고 설명하였다.82 이해응 또한 영춘화ㆍ수선화ㆍ천추화ㆍ말리화ㆍ석류ㆍ자몽ㆍ해당화ㆍ종려나무ㆍ선인장ㆍ옥잠화 등을 특별히 관람할 만한 품종으로 언급하였다.83 북경 화초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선화ㆍ치자ㆍ석류ㆍ종려나무 등은 이미 조선에서도 귀하게 여겨지던 인기 품종이었으며, 불수감ㆍ남천ㆍ선인장ㆍ말리화 등은 조선에서 보기 힘든 희귀 품종이었다.84 이러한 점에서 화초포에 진열된 화훼들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강한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지식인이 화초포의 화훼 목록에 주목한 것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조선 내 보유 품종과의 비교를 통해 새로운 종(種)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훼 지식 체계를 확충하려는 지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유구의 저술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예원지』와 『만학지(晚學志)』에서 중국과 조선의 식물 품종 차이를 전제로, 납매, 겹꽃 석류, 매괴, 백색 외의 목련, 난초꽃, 홍ㆍ백색 외의 연꽃, 운향(芸香), 남천, 호자나무, 종려나무 등 여러 식물에 대하여 “우리나라에는 없으니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와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85 이와 같은 서유구의 언급은 단순히 원예 취미를 충족하려는 완물적 태도를 넘어, 화훼 지식을 보완하고 체계화하려는 지적 탐구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그러한 지식 확충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자료를 적극적으로 확보하려는 실천적 지향을 보여준다. 따라서 북경 화초포에서 다양한 화훼 품종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 내 원예 활동의 전개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화훼 지식의 확대 과정에서 화훼 실물과 관련 정보를 수집,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자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연행 기록에 나타난 화초포의 묘사는 건물 구조, 재배 기술, 화훼 품종 등 여러 측면에서 놀라울 만큼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현상적 일치를 넘어, 공유된 문화적 실천과 기록 전통의 전승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화초포 탐방과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 지식인들의 개별적 경험이 반복된 결과인 동시에, 지식인 네트워크 내부에서 관행화된 여행 체험과 견습 방식을 구조적으로 재현하고 규범화한 산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교유 관계와 기록 전통이라는 두 축을 통해 지속적으로 작동하며 강화되었다.
먼저, 북경에서의 여행 체험과 그 과정에서 획득된 정보도 지식인 간 교유 관계를 매개로 조선 사회 내부로 확산되었다.86 18세기 중반 이후 북경 화초포 탐방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견문과 정보의 장거리 이동, 그리고 내부 확산의 활성화에 힘입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먼저 1760년대 홍대용의 화초포 탐방과 소개 이후, 그를 중심으로 한 북학파 및 관련 실학자 집단에서 화초포 방문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북학파 대표인물인 박지원은 물론이고 북학파와 교유한 실학의 거두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손자인 홍석모 등도 이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달성 서씨 가문과 연결된 정사 서희순(徐熙淳, ?∼?)과 그를 모신 종사관 서경순, 그리고 정사 서경보(徐耕輔, 1771∼1839)의 서장관으로서 따라간 김경선 등도 북경 사행 중 화초포를 들러 구경하였다. 또한 신위를 중심으로 한 교유망에 속한 양반인 이유원, 기술직 중인인 김진수 등 역시 화초포를 탐방하고 관련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교유망 속에서 이루어진 지식인 간의 구두 대화나 서신 왕래를 통해 화초포의 존재와 관찰 항목이 지속적으로 공유되었으며, 그 결과 “탐방-교유-확산-재방문”으로 이어지는 지식 실천의 순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연행록이라는 기록 매체 역시 이러한 네트워크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였다. 연행록은 단순히 개인의 체험을 기록한 문헌에 그치지 않고,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활발히 회람되고 향유된 텍스트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사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었으며, 북경 화초포의 위치와 구조, 화훼 품종과 재배 기술 등에 관한 지식 또한 폭넓게 확산되었다. 특히 홍대용의 연행록이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힌 3대 연행록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기록한 융복사 동쪽 화초포에 대한 상세한 묘사 역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텍스트의 축적과 유통은 후대 지식인의 지식 실천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대의 연행록을 통해 화초포에 대한 정보를 익힌 지식인들은 연행길에 오르면 이를 직접 확인하고자 화초포를 방문하였으며, 나아가 선행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자신의 기록을 구성하였다.87 예컨대 김경선은 화초포의 상업적 성황을 서술하면서 홍대용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고88, 박사호 또한 이해응의 화초포 묘사를 직접 베껴 쓰기도 하였다.89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선행 텍스트의 단순한 모방이나 기계적 재현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김경선의 경우,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 기록하는 한편, 홍대용 등의 전대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차이가 있는 부분은 교정, 보완하고,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에는 전인의 표현이 정밀하고 아름답다고 판단될 때 그 구절을 그대로 수용하였다.90 즉 그는 “경험의 일치”와 “표현의 적합성”이라는 두 기준에 따라 화초포에 대한 홍대용의 묘사를 수용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행록의 저술은 기록을 매개로 전대와 후대의 지식인들이 각자의 경험을 교차시키며 일종의 “상호 소통”을 수행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91 다시 말해, 조선 지식인들은 화초포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식 자체를 공유된 지적 형식 속에서 수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북경 화초포 탐방은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여행을 통한 화훼 지식의 현장 견습, 원예 정보의 지역적 이동과 사회적 재현, 그리고 교유와 기록에 기반한 지식의 재생산 등이 결합된 복합적 지식 실천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유 관계라는 인적 연대와 연행록이라는 공유된 기록 형식이 교차하며 작동함으로써, 해외 원예 공간에 대한 접근과 견습은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되고 점차 관행화되었다. 이러한 규범적이고 연동적인 지식 실천은 화훼 재배 기술과 품종 등에 관한 지식의 지속적인 축적과 보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5. 맺음말
비록 조선 후기에 유박이나 서유구와 같이 전문적 문헌 연구와 재배 실천을 결합한 체계적 원예서의 저술이 드물었고,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원예학 또한 성립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사실이 원예가 비체계적이거나 단순한 취미 활동에 머물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의 지식인들이 일상적 교유와 화훼에 밀착된 취미적 실천을 매개로 재배와 감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화훼에 관한 지식 실천을 전개하고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사회적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지식인들은 교유 관계에 기반한 단체 정원 유람과 문예 모임을 통해 화훼의 품종과 형태를 직접 관찰하는 한편, 특정 공간 속 상호작용과 대화, 시문 텍스트를 매개로 화훼 지식을 유통, 확산하였다. 또한 교분을 바탕으로 화훼 실물과 관련 지식을 교환하고 이동시키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화훼 재배와 연구에 필요한 물질적 자료와 지적 자원을 상호 공급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훼 지식은 다양한 주체에 의해 활용, 검증되며 점차 심화되었다. 나아가 교유 관계와 연행록을 매개로 관행화, 규범화된 북경 화초포의 탐방을 통해 중국의 원예 문화와 화훼 지식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조선 나름의 화훼 지식 체계의 보완과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사회적 관계의 작동, 사물의 이동과 참여, 그리고 특정 공간과의 접촉이 결합된 복합적 네트워크 속에서 조선 후기의 원예는 단순한 취미적 탐구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관여하는 사회적 지식 실천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화훼 지식이 고정된 체계로 축적되기보다, 교유망 속에서 순환, 검증, 재구성되는 과정을 통해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원예 활동과 화훼 연구는 서실이나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전문적 학술 활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기보다, 화훼에 밀착된 일상적 취미와 다양한 주체가 얽힌 교유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지식 실천이었다. 즉 조선 후기 원예는 형식화된 학문 체계라기보다, 화훼에 대한 공동의 관심을 매개로 형성된 지식인 간 교유 속에서 수행된 관계적ㆍ협동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지식인들은 정원 유람, 화훼 교환, 화초포 탐방 등을 통해 서로의 지식과 기술을 공유, 비교하고, 이를 자신의 실천 속에서 검증한 뒤 다시 네트워크로 환류시키는 순환 구조를 형성하였다.
또한 이러한 교유 기반 지식 네트워크는 근대 유럽의 범유럽적 학술 공동체와 같이 보편적 정체성이나 제도적 기반에 의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인적 관계와 일상적 문예 활동에 기반한 보다 사적이고 긴밀한 인적 연대를 중심으로 작동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지식 유통에 필요한 신뢰성 역시 근대 유럽에서처럼 엘리트 집단의 인격적 기준이나 경험적 규범에 의해 확보되기보다, 교유 관계 속에서 형성된 상호 인식, 경험의 정서적 공유, 반복적 검증 및 보완의 실천 등을 통해 구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원예는 유교 사대부 문화에 기반한 문예적 취향과 감정적 유대의 공유가 지식 생산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식 실천의 구조 속에서 원예는 조선 후기 지식인 네트워크의 작동을 통해 형성된 지식 생산의 한 형태이자, 지식인 사회 내부의 새로운 지적 연대를 창출하는 장으로 기능하였다.
이상의 논의는 조선 후기 원예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함과 동시에, 한국 과학사 및 지성사의 전개 양상을 재고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다. 저술 성과나 학문 체계의 형성뿐 아니라, 특정한 인적ㆍ물적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과 사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지식 실천 자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식의 순환ㆍ축적ㆍ심화 역시 “지적 발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본고는 주로 유교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이러한 네트워크의 작동 양상을 검토하였다. 향후에는 이러한 네트워크가 의지한 보다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조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지식인과 비엘리트층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식 생산에 미친 영향까지 포괄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