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ㆍ장인ㆍ얼음의 앙상블: 조선시대 생쪽 염색 기술의 실천과 제도
The Ensemble of Indigo, Artisan, and Ice: Practices and Institutions of Fresh Indigo Dyeing in the Chosŏn Dynasty
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Seoul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161
Abstract
This article investigates fresh indigo dyeing (saengch’ok) in the Chosŏn dynasty as a historical practice shaped by the interplay of material properties, artisans’ practical knowledge, and institutional arrangements. Drawing on late Chosŏn agricultural and technical writings, it examines how knowledge of indigo dyeing was recorded and gradually standardized in written form. The sources indicate a shift from mixed methods combining fermented and fresh indigo to an increasing emphasis on dyeing with fresh indigo alone. Rather than viewing this as a purely textual change, the article argues that the shift reflected practical knowledge developed in actual dyeing settings and later incorporated into technical writing. In this process, artisans’ responses to the heat sensitivity and instability of fresh indigo were especially important. A central feature of saengch’ok dyeing was the use of ice. Because this technique depended on maintaining low temperatures during the summer, it became closely connected to state systems of ice storage and distribution. Fresh indigo dyeing thus emerged as more than a craft technique: it was a historical practice in which materials, skills, and administrative order became closely linked.
1. 머리말
인디고 색소가 포함된 쪽풀을 사용하여 직물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기술인 쪽 염색은 한반도를 포함해 쪽 식물이 자생하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화학 염료가 발달하기 이전까지 널리 활용되던 염색법이다.1 인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쪽 식물은 그 내부의 형질과 외부의 풍토를 따라 인간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그중에서도 조선 사회에서 쪽 혹은 쪽풀이라고 불리는 품종은 마디풀(여뀌)과의 1년생 초본으로 요람(蓼藍)으로도 알려졌다.2 요람은 또 다른 쪽 식물 종인 청대(靑黛) 또는 전(靛)과 함께 조선의 청염(靑染)을 담당하였다.3 본고에서는 쪽 염색의 염재(染材)로 쓰이는 요람의 물질적 특성과 이를 다루는 장인의 경험 지식, 그리고 염색 과정에 개입한 얼음이라는 자원이 서로 맞물리며 조선 후기 생쪽 염색 기술이 실천된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여름철 생쪽 염색에 요구된 저온 환경과 얼음 확보의 문제가 기술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 자원 분급 체계와도 긴밀히 접속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4
한반도의 남염 기술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구체적인 기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쪽 염색을 위해 사물과 실제적인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그들의 경험 지식을 문자로 남기지 않았다. 확인되는 쪽 염색 관련 기록의 다수는 조선 후기 비(非)염색전문가들에 의해 소략하게 정리된 형태로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비전문가들이 남긴 문자화된 기술 지식은 무엇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는가? 그들의 기록은 실제 장인이 수행했던 기술을 반영했을까? 우선 남염 지식을 기입(inscription)한 각종 기술서의 내용이 염색 기술의 현장 지식을 포섭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5 나아가 기술서에서 언급된 지식을 토대로 조선의 남염 기술이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 당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도 확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일정 부분 해소하기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7 첫째, 조선 후기 농서와 기술서에 수록된 남염 관련 기록을 분석하여 장인의 경험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 문자화되었는지 살펴본다. 둘째, 생쪽만을 활용하는 염법과 얼음 사용이 왜 조선 후기 남염 기술의 핵심으로 부상했는지 검토한다. 셋째, 생쪽 염색의 지속적 실천이 얼음 수요를 둘러싼 행정 절차와 자원 분급 방식에 어떤 변화를 요구했는지 추적한다. 다시 말해,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생쪽 염색이라는 특정한 기술 실천이 얼음 수요를 매개로 행정 절차와 자원 분급 체계 속에서 어떻게 가시화되고 조정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8
쪽의 물질적 성질, 장인의 실천과 감각, 그리고 행정 체제가 얽혀지는 복합적인 실천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본 연구에서는 조선 사회에서 시행된 생쪽 염색을 단순한 수공 기술이 아닌 물질ㆍ지식ㆍ제도가 얽힌 역사적 실천으로 주목한다.
2. 인정받은 현장 지식, 생쪽만 사용하는 염색 방법
쪽 염색을 포함해 한반도에서 시행된 염색 방식을 정리한 별도의 기술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전통 염색이 식물성 재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염색 관련 내용은 작물을 다루는 농업 기술서에 포함되었다. 특히 염색 과정을 언급한 내용은 작물의 재배 방식을 설명하는 문맥의 틈에 간략하게 서술되었다. 쪽에 관한 기록의 분량이나 형식만 보았을 때, 기록자들은 염색 과정보다는 작물 재배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점을 전환해보면, 기록자들이 작물 재배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농서를 구성하면서 굳이 쪽 염색 과정을 언급한 사실은 자원의 용도 곧, 쪽이 가진 염재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염두에 두었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작물 재배법에 편입된 염색 과정에 대한 기재는 기록자들이 쪽의 용도를 단순한 재배 대상이 아니라 염재로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문자 지식을 그대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기록한 주체가 쪽 염색과 가장 밀접한 관계자들인 쪽 식물도, 염색 장인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비전문가들이 쪽 염색에 대한 지식을 무엇을 참고해서 구성했는지, 서술한 내용이 기술의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쪽 재배 및 염색에 관련한 내용은 『산가요록(山家要錄)』(전순의, 1450년대), 『색경(穡經)』(박세당, 1676), 『산림경제(山林經濟)』(홍만선, 1700년경),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유중림, 1766), 『해동농서(海東農書)』(서호수, 1798-99), 『규합총서(閨閤叢書)』(빙허각이씨, 1809),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서유구, 1842-45), 『죽교편람竹僑便覽』(한석효, 1849) 등에서 확인된다.9 이 가운데 쪽 염색 과정을 언급한 이른 시기의 기록은 박세당의 『색경』이다.10
쪽(藍) 속
쪽밭은 잘 갈아야 하며 땅이 숙성되어야 한다. 3월 중에 씨를 물에 담가두었다가 싹이 나면 두둑에 파종하는데 아욱을 심는 방법과 같다. 잎이 3개가 나오면 새벽과 밤에 물을 대준다. 김을 매어 깨끗하게 한다. 5월 중에 비가 내린 뒤, 즉시 땅이 축축하게 물기가 배어있을 때 누거(樓車)로 갈고 싹을 뽑아 옮겨 심는다. 세 줄기를 한 포기로 한다. 심을 때에는 힘이 들어도 손을 재빨리 놀려 땅이 마르기 전에 심는다. 또 흙이 희게 마르면 즉시 호미질하고 심을 때 습기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혹여 흙이 굳어 딱딱하게 될 수 있다. 호미질은 5번 정도 해주는 것이 좋다. 7월 사이에 쪽 염료를 만든다. 쪽 1담(擔)을 베고 감수(甜水) 1담을 사용한다. 잎과 줄기를 잘라 부수고 솥 안에 넣어 함께 삶는다. 여러 차례 끓이고 찌꺼기를 없애면 그 즙을 항아리에 담는다. 다음 날, 비율을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 1정으로 사용한다. 생쪽 잎을 마반(磨盤) 위에 두고 손으로 세 차례 주무른다. 익힌 즙을 활용해 (주무른 생쪽 잎에) 끼얹으며 힘껏 누르고 찌꺼기는 걸러내어 고루 섞이게 해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는다. 쪽 뿌리는 남겨두었다가 열매 맺기를 기다린다. 8월이 되면 거두었다가 다음 봄에 심는다.11 [괄호 및 강조 표시 : 본고 필자]
3월에 파종되기 시작한 쪽은 7월이 되면 염재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한다. 이때부터 쪽은 생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염료로서의 생을 시작한다. 쪽의 새로운 삶의 여정인 염색 공정은 작물 수확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수확된 쪽은 일정한 비율로 물과 함께 고온에서 끓여지고, 찌꺼기와 분리된 후에 숙람(熟藍)즙으로 전환된다. 이튿날에는 으깬 생쪽과 섞어져 남색을 들일 염료가 완성된다. 이처럼 박세당이 기록한 염색 공정의 중심은 염료 제작 과정 즉, 수확한 쪽을 가열해서 숙즙을 만들고 이를 생쪽과 섞어서 염료를 만드는 과정에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숙즙과 생쪽을 혼합한 염료를 활용해 염색하는 방식을 혼합 염법이라 설명했다.12 혼합 염법의 특징은 두 단계의 제작 공정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먼저 쪽을 삶아 숙즙을 만들고, 이후 생쪽과 혼합하여 쪽즙을 완성한다. 소개된 혼합 염법은 최소 이틀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만들어진 염료는 보관 가능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염색 공정의 내용을 유자(儒者) 박세당은 무엇을 근거로 제시했을까? 『색경』에는 그가 실제 염색을 경험했다는 언급도, 전거의 출처도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13 박세당이 장인들의 염색 과정을 직접 관찰했는지 혹은 전해들은 지식을 근거하여 작성했는지, 기존 문헌을 참고했는지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색경』에서 제시한 혼합염법이 실제로 조선 사회에서 시행된 기술인지 그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색경』의 많은 내용이 『농상집요(農桑輯要)』를 비롯하여 중국 화북지역 농법을 정리한 농서들을 따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혼합염법이 조선의 기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성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경』에서 소개한 혼합 염법이 다른 기술서에서도 흔적을 남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혼합 염법의 실행 여부가 확실하지 않더라도, 해당 지식이 당대에 일정 부분 통용되던 기록 지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혼합 염법은 조선의 기술 현실과 무관한 지식이었을까? 『색경』과 유사한 염색 방식을 언급한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아울러 살펴보겠다.
쪽 심기
평지가 좋다. 3월에 밭을 잘 갈아 파종하고 써레로 밭을 고루어준다. 억새로 만든 발로 덮어준다. 매일 아침에 물을 뿌려준다. 싹이 나면 억새 발을 걷어버린다. 4촌(寸)쯤 자라게 되면 숙토에다 두둑을 만들고, 고랑을 만들어 길을 낸다. 5촌 간격으로 한 구덩이씩 심고 (『사시찬요』에는 “5월 망종 때 비가 와서 습기가 있을 때 쪽 싹을 뽑아 한 구덩이에 세 줄기씩 빠르게 심어서 땅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했다.) 날마다 물을 대준다. 척박한 땅이면 맑은 거름물을 한두 차례씩 대주어야 한다. (『신은지』) 호미질은 다섯 번쯤 하는 것이 좋다.(『사시찬요』)
7월에 쪽을 벤다. 쪽 1담(擔)에 물 1담을 사용한다. 잎과 줄기를 잘라 부수고 솥 안에 넣어 함께 삶는다. 여러 차례 끓이고 찌꺼기를 없애면 그 즙을 항아리에 담는다. 비율을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 1정으로 사용한다. 생쪽 잎을 마반(磨盤) 위에 두고 손으로 세 차례쯤 주무른다. 익힌 즙을 활용해 (주무른 생쪽 잎에) 끼얹으며 힘껏 누르고 찌꺼기는 걸러내어 고루 섞이게 해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는다. (속방(俗方)에는 “생쪽 즙 2분(分)에 익힌 쪽즙 1분을 섞어서 물을 들여도 오히려 전부 생쪽을 사용해서 염색한 것만 못하다. 쪽즙은 쉬이 상하는데 상하면 빛깔이 거칠어진다. 그러므로 마반에다 얼음을 두고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해야 한다.” 했다.) 쪽 뿌리는 그대로 두고 개화 해서 열매 맺기를 기다린다. 8월에 거두었다가 다음 봄에 심는다.(『신은지』)14 [괄호 및 강조 표시 : 본고 필자]
관직 생활 대부분을 지방관으로 보냈음에도 산림처사를 자처한 홍만선은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다양한 서적을 토대로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여 『산림경제』를 저술했다.15 홍만선은 쪽 재배와 염색 방법을 다루면서 박세당이 언급했던 혼합 염법과 유사한 내용을 소개했다. 『산림경제』에서 서술된 혼합 염법은 명대(明代) 도교 계통의 실용 기술서인 『신은지(神隱志)』에 기반했다고 명시되었다.16
홍만선의 기록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박세당 역시 『신은지』를 참조했을 가능성을 있으나 단정할 수는 없다. 『색경』과 『산림경제』에는 유사한 내용이 공유되는 한편, 뚜렷한 차이도 확인된다. 바로 홍만선이 세주(細注) 형식으로 처리한 속방(俗方)의 내용이다. 『산림경제』에 수록된 쪽 재배와 염색 지식에는 인용된 부분마다 전거가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반면 출처 표기 없이 별도로 속방으로 분류된 내용은 조선 사회에서 실천된 현장 기술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판단된다.17
속방의 내용에서 주목할 점은 숙즙과 생쪽을 혼합하는 염법보다 생쪽만을 사용하는 생쪽 염법이 우수하다고 평가한 부분이다. “혼합 염법으로 들인 쪽염이 오히려 생쪽으로 한 것만 못하다”는 설명은 혼합 염법이 조선에서도 활용되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혼합 염법이 앞서 살펴본 『색경』의 혼합 염법이나 『산림경제』 본문에 수록된 혼합 염법과 동일한 내용은 아니었다. 『신은지』를 바탕으로 구성된 『산림경제』 본문의 혼합 염법은 숙람과 생쪽의 비율이 3:1인 반면, 속방으로 기재한 혼합 염법의 비율은 생쪽의 비중이 더 높은 숙람:생쪽=1:2이었다.
무엇보다 속방에서 밝힌 조선 쪽 염색법의 핵심은 혼합 염법보다 선호된 생쪽 염법에 있었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생쪽을 갈아서 즙을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을 다루었다. 부연하자면, 속방에서는 조선 사회에서 선호한 생쪽염법을 언급하면서 쪽즙 제조와 염색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방식, 곧 염료 제조와 염색 과정의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로 공정이 빠르게 실행되는 양상을 다루었다.
이러한 생쪽 염법의 공정은 앞서 살펴본 혼합 염법과 크게 구별된다. 혼합 염법은 숙즙을 제조하는 단계와 생쪽을 으깨어 숙즙과 합쳐 염료를 완성하고 완성된 염료는 항아리에 보관 가능한 방식이다. 반면, 생쪽 염법은 숙즙 제조 과정을 생략하고 생쪽을 갈아서 나온 생즙을 가지고 바로 염색 하는 방식으로, 염료를 제조하는 과정과 염색에 소요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진다. 다시 말해, 두 염법은 기술 구성뿐 아니라 염색 완성까지의 소요 시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혼합 염법과 생쪽 염법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공존했을까? 염색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되었을까? 속방의 내용에는 당시 실제로 실천된 기술이 반영되었을까? 혼합염법에 대한 언급은 생쪽염법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 전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살펴본 기술서의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의문들에 명확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홍만선이 속방에서 언급한 생쪽 염법은 이후 기술서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혼합 염법에 대한 서술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조선 후기 기록 지식으로서 인정되었던 남염 방법은 생쪽 염법이었으며, 뒤에서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이는 기술의 현장성을 반영한 내용이 점차 기록 지식을 재구성해 나가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산림경제』 속방의 내용이 조선의 남염 지식으로 정착되는 양상은 먼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서 확인된다.18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산림경제』의 속방 기사가 본문으로 등장하는 한편, 『산림경제』에서 주요하게 다뤄졌던 숙즙 제조 과정이 매우 소략하게 언급되었다.
7월에 쪽의 줄기와 잎을 베어 물에 끓여 익으면 찌꺼기를 버린다.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즙 1정의 비율로 섞는다. 염색할 때는 전부 생쪽즙을 사용한 것만 못하다. 쪽즙은 쉬이 상하는데 상하면 빛깔이 거칠어진다. 그러므로 마반(磨盤) 위에 얼음을 두고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한다. 바람에 나부끼게 해서 말린다.19
『증보산림경제』에서는 혼합 염법의 흔적이 남아있으나 비중이 줄었고, 오히려 생쪽 염법을 주로 소개하면서 생쪽 염색 이후 직물 처리의 내용까지 추가했다. 생쪽 염색 방식을 중심으로 문자 지식이 구성되는 변화는 서호수의 『해동농서』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요람(蓼藍) 쪽
요람의 잎은 여뀌(蓼)와 비슷하다. 5~6월에 꽃이 피고 이삭이 생긴다. 연홍색의 씨 역시 여뀌와 비슷하다. 푸른 물은 들일 수 있으나 전(靛)을 만들지는 못한다. 씨를 거둬서 약에 쓴다. 3월에 밭을 잘 갈아서 파종하고 써레로 밭을 고루어준다. 억새로 만든 발로 덮어준다. 매일 아침에 물을 뿌려준다. 싹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억새 발을 걷어버린다. 싹이 4~5촌(寸)쯤 자라면 별도로 기름진 밭에 두둑을 만들고 옮겨 심는다. 5촌 간격으로 한 구덩이씩 심고 또 매일 물을 준다. 호미질은 다섯 번 정도 한다. 7월이 되면, 잎을 베어내 즙을 만들어 비단에 물을 들인다. 쪽즙은 쉬이 상하므로 빙반(氷盤) 위에 두어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해야 한다. 바람결에 마르게 한다. 이상 『증보산림경제』20 [강조 표시 : 본고 필자]
『해동농서』에서는 『증보산림경제』의 내용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으며, 기존에 소략하게나마 언급되었던 숙즙 제조 과정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후 남염 지식을 다룬 기술서들에서 혼합 염법은 사라지고, 생쪽즙을 내어 바로 염색하는 생쪽 염법이 자리 잡는다.
한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는 쪽 염색이 양잠ㆍ직조ㆍ염색 등을 설명한 『전공지(展功志)』와 작물 재배 방식을 서술한 『만학지(晩學志)』에서 각기 다뤄졌다. 이는 이전 기술서들과 달리 염색을 작물 재배로부터 분리된 주제로 다루고자 한 시도로 볼 수 있다.21 『전공지』에 기록된 남염 기술은 다음과 같다.
남(藍)색
6~7월 요람(蓼藍) 잎이 풍성하고 진액이 왕성할 때 잎을 따다가 깨끗한 그릇에 담는다. 물을 붓고 주물러 으깨서 즙을 얻어 염색한다. 쪽 염색은 매번 삼복(庚伏)에 하게 되는데, 찌고 습한 더위에 쉬이 변색되므로 얼음의 찬 기운을 쏘이는 것(照氷)이 필요하다. 『경솔지』22
『전공지』에 나타난 염색 방법은 서유구의 또다른 저술로 알려졌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경솔지(鶊蟀志)』를 저본으로 삼았다고 명시되었다. 『경솔지』의 제목은 『십국춘추(十國春秋)』에 등장하는 춘경추솔(春鶊秋蟀)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은 봄과 가을에 이루어지는 양잠과 방적 관련 기술을 다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공지』의 염색 부문에서 『경솔지』는 『천공개물(天工開物)』 다음으로 빈번하게 인용되었으며, 염색 이외 기술 항목에서는 주로 조선의 고유 기술을 설명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23 선행 연구에서 분석한 『전공지』의 체제 구성을 따르면, 서유구가 언급한 남색 염법은 조선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염색 기술을 정리한 내용을 통해 서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공지』의 남색 염법은 앞서 검토한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해동농서』에서 다룬 생쪽 염색 방식이 반영되었다. 특히 『산림경제』에서 속방의 형태로써 농업 현장의 지식으로 기록된 생쪽 염법이 언급된 이래로, 생쪽 염법은 이후의 기록 지식 속에서 재구성되며 점차 표준화된 기술 지식으로 정착했다. 지금까지 검토한 쪽 염색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1 조선 후기 기술서들에서 언급된 쪽 염색 방법
| 저서 | 저자 간행 연도 |
관련 내용 | 특징 |
|---|---|---|---|
| 색경 | 박세당 1676년 |
7월 사이에 쪽 염료를 만든다. 쪽 1담(擔)을 베고 감수(甜水) 1담을 사용한다. 잎과 줄기를 잘라 부수고 솥 안에 넣어 함께 삶는다. 여러 차례 끓이고 찌꺼기를 없애면 그 즙을 항아리에 담는다. 다음 날, 비율을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 1정으로 사용한다. 생쪽 잎을 마반(磨盤) 위에 두고 손으로 세 차례 주무른다. 익힌 즙을 활용해 (주무른 생쪽 잎에) 끼얹으며 힘껏 누르고 찌꺼기는 걸러내어 고루 섞이게 해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는다. | 혼합 염법 소개 전거 불명확 |
| 산림경제 | 홍만선 18세기 초 |
7월에 쪽을 벤다. 쪽 1담(擔)에 물 1담을 사용한다. 잎과 줄기를 잘라 부수고 솥 안에 넣어 함께 삶는다. 여러 차례 끓이고 찌꺼기를 없애면 그 즙을 항아리에 담는다. 비율을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 1정으로 사용한다. 생쪽 잎을 마반(磨盤) 위에 두고 손으로 세 차례쯤 주무른다. 익힌 즙을 활용해 (주무른 생쪽 잎에) 끼얹으며 힘껏 누르고 찌꺼기는 걸러내어 고루 섞이게 해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는다. 속방(俗方)에는 “생쪽 즙 2분(分)에 익힌 쪽즙 1분을 섞어서 물을 들여도 오히려 전부 생쪽을 사용해서 염색한 것만 못하다. 쪽즙은 쉬이 상하는데 상하면 빛깔이 거칠어진다. 그러므로 마반에다 얼음을 두고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해야 한다.” 했다. | 혼합 염법 소개 『신은지』인용 속방 소개 생쪽 염법 선호 얼음 활용 소개 |
| 증보산림경제 | 유중림 1766년 |
7월에 쪽의 줄기와 잎을 베어 물에 끓여 익으면 찌꺼기를 버린다. 익힌 쪽즙 3정(停)에 생쪽즙 1정의 비율로 섞는다. 염색할 때는 전부 생쪽즙을 사용한 것만 못하다. 쪽즙은 쉬이 상하는데 상하면 빛깔이 거칠어진다. 그러므로 마반(磨盤) 위에 얼음을 두고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한다. 바람에 나부끼게 해서 말린다. | 혼합 염법 소략 속방 본문화 생쪽 염법 및 얼음 활용 언급 |
| 해동농서 | 서호수 1798-99년 |
7월이 되면, 잎을 베어내 즙을 만들어 비단에 물을 들인다. 쪽즙은 쉬이 상하므로 빙반(氷盤) 위에 두어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해야 한다. 바람결에 마르게 한다. | 혼합 염법 생략 증보 인용 생쪽 염법 및 얼음 활용 언급 |
| 임원경제지 전공지 | 서유구 1842-45년 |
6~7월 요람(蓼藍) 잎이 풍성하고 진액이 왕성할 때 잎을 따다가 깨끗한 그릇에 담는다. 물을 붓고 주물러 으깨서 즙을 얻어 염색한다. 쪽 염색은 매번 삼복(庚伏)에 하게 되는데, 찌고 습한 더위에 쉬이 변색되므로 얼음의 찬 기운을 쏘이는 것(照氷)이 필요하다. | 혼합 염법 생략 경솔지 인용 생쪽 염법 및 얼음 활용 언급 |
굵은 명조체 ☞ 혼합 염법
고딕체 ☞ 생쪽 염법
표에서 다시 확인되듯이, 조선 후기 기술서에 나타난 남염법은 조선 사회의 실천 기술을 토대로 점차 기록 지식으로 정착하고 표준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기술서에서 나타난 쪽 염색 방식은 외부 문헌의 혼합 염법 서술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조선의 염색 현장에서 통용되던 생쪽 염법으로 재정리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현장 지식에서 표준화된 기록 지식으로 정립된 생쪽 염법은 어떻게 발달하게 되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문헌에 남은 기록을 통해 생쪽 염법의 수행 조건과 그 배후에 놓인 장인들의 실천 감각을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쪽의 물질적 성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얼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3. 생쪽 염색의 실천과 얼음의 매개적 역할
조선 후기의 기술서 편찬자들은 대체로 쪽을 직접 다루던 전문 염색인은 아니었다. 따라서 문헌에 남은 남염 지식은 장인의 실천이 문자로 번역ㆍ정리된 형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생쪽 염색이 실제로 어떤 물질적 조건 아래 수행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얼음이 어떤 매개적 역할을 맡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기술서들에서 나타난 남염법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했다. 하나는 생쪽만을 사용하는 염색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쪽 염료 제조 및 염색 과정에서 얼음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일부 기술서에서 언급된 숙람을 활용한 혼합 염법에서도 생쪽이 일정 비율로 활용되었으나, 조선의 장인들은 생쪽만으로 염색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기법의 선호 차원이 아니라, 쪽이라는 식물의 생태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장인들이 파악한 쪽 식물의 성질은 무엇이었을까?
쪽을 수확하여 염색을 시행하는 시기는 한여름인 음력 7월이었다. 이 시기 염색 장인들이 가장 우려했던 문제는 쪽이 상해서 빛깔이 변질되는 상태였다. 염료가 될 쪽이 상하게 되면 염색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쪽즙이 상하면 색이 거칠어진다(혹은 색이 변한다)”는 표현은 장인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생쪽 염법의 과정을 가장 구체적으로 다룬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서는 쪽이 상하면 붉은 빛을 띤다고 기록되었다.24 빙허각의 기록을 토대로 남염 과정에서 붉은색이 나타나는 문제가 염색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 (쪽빛)
쪽잎이 둥글고 두꺼워 두틀두틀한 당종호품이 좋은 것이고, 얇고 귀난 것은 좋지 않다. 날이 몹시 찌개 더울 땐 잠시 동안에도 쉬어 빛이 붉어지니 서늘한 날을 가려 들여라.25
조선 시대 남염의 원리를 화학적으로 분석한 조경래의 연구를 따르면, 염액의 온도가 높은 상태에서 쪽 염색을 하면 적자(赤紫)색의 염색물을 얻는다.26 앞서 『산림경제』 속방에서 숙람즙 비율을 줄여서 사용하였음에도 전부 생쪽으로 염색한 결과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도 이러한 온도 문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온으로 인한 쪽즙의 변질은 장인들이 마주한 기술적인 도전 과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생쪽만 활용하는 염법으로 발달되었는데 기술의 핵심은 바로 얼음의 활용이었다. 고온의 염액의 온도를 낯추고 단시간에 염색 과정을 완결시키는 장인의 얼음 활용 기술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나타난다.
쪽잎을 물에 담고, 독에 물을 많이 길어 붓고, 비단과 명지를 담가 놓고, 큰 바가지에 쪽 가는 돌을 들여세우고 물을 쳐가며 힘써 갈아, 얼음 얼려 다른 그릇에 체에 밭여, 감을 넣고 들여라. 연 쪽빛은 물을 조금 섞고 얼음을 많이 꽂아 손을 재게 놀려 너비를 앗아야 쉬지 않는다(물빛이 상하지 않는다). 물속에 잠긴 것은 누른빛이 있어, 물빛이 옅거나 짙게 듦을 알기 어려우니 위에 얼음을 놓아 밑에 비치는 것으로 짐작한다. 비록 짙은 쪽빛은 여러 번 물들이면 산뜻하지 못하니 물을 타지 말고 전국을 밭여 들여 냉수에 얼음 넣어 여러 번 급히 헹궈 빙수에 한동안 담가두면 빛이 산뜻할 것이다. 만일 손 놀리기를 천천히 하면 물빛이 상하고(붉은빛이 돔), 두드려 빨면 빛이 곱지 못하니, 꼭 베틀어지게 짜서 대에 꿰어 그늘에서 힘써 잡아당겨 부쳐 마르거든 줄에 걸고 오래 부채질하여야 물빛이 상하지 않는다.27 [괄호 내용 : 역자, 강조 표시 : 본고 필자]
『규합총서』에서는 쪽 염색을 할 때 얼음 사용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앞서 살펴본 기술서들에서도 생쪽 염법 과정에서의 얼음 활용이 기록되었다. “마반(磨盤)에 얼음을 둔다”, “빙반(氷盤)”, “얼음의 찬 기운을 쏘이다(照氷)” 등으로 등장하는 얼음 장치는 쪽의 생태를 고려하여 고온 환경에서도 색이 변질되지 않도록 한 장인들의 대응이자 기지였다. 얼음은 염액의 농도를 낯춰 쪽의 변질을 방지할 뿐 아니라, 피염물의 색 농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데에도 유용한 도구였다. 또한 염액 속의 용존산소량을 높여 발색을 순조롭게 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므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진 기술적 매개물이었다.28



이와 함께 생쪽 염법의 또 다른 핵심 조건은 속도였다. “쪽을 가는 대로 즉시 염색한다”는 기술서들에서 확인되는 표현은 염료 제조와 염색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속도 문제를 지적한다. 쪽이 가진 성분으로 인해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섬유 안에 쪽 성분이 침투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얼음이 녹아서 염액의 온도가 상승하면 다시 색이 붉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규합총서』에서 “손을 재게 놀려야 한다”, “손을 천천히 놀리면 물빛이 상한다”는 언급도 쪽 염색에서의 빠른 속도를 강조한다.
오늘날 생쪽 염색을 시행할 때에도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일정 시간 내에 염색을 마쳐야 한다는 점은 중요한 유의 사항으로 지적된다. 또한 전통 쪽 염색 방식을 재현하고 발전시키는 현대 염색 전문가들은 생쪽 염색에는 상당한 양의 얼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31 실제로 한 쪽 염색 기술자는 “조선시대에 생쪽 염색이 정말로 시행될 수 있었어요?” 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은 생쪽 염색 시 생쪽뿐만 아니라 대량의 얼음, 혹은 얼음에 준하는 차가운 물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32
지금까지 검토한 고문헌의 기록, 화학 연구 성과 그리고 현대 전통 염색의 재현 과정을 종합해보면, 조선의 염색 장인들이 쪽 식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 특성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장인들은 한여름에 자신들이 원하는 푸른빛을 얻기 위해 고온에 취약하고 쉽게 변질되는 쪽의 성질에 대응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고안된 기술이 바로 얼음을 활용해 생쪽을 갈아 단시간에 염색을 완성하는 생쪽 염법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여름날 쪽 염색에 얼음을 사용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쪽을 수확하고 염색하는 시기가 여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얼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다음 장에서는 조선 사회의 얼음 관리 및 활용 체계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남염 과정에서 얼음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4. 쪽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법률 조항, 남염빙(藍染氷)
조선 시대의 얼음은 자연의 정상적 순환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겨울철에 얼음이 얼지 않는 무빙(無氷) 현상은 재이(災異)로 인식될 만큼 얼음은 국가가 주목하는 자원이었다. 겨울의 얼음이 자연 순환의 질서와 정상성을 의미했다면, 얼음을 저장하는 장빙(藏氷)은 여름철 화기(火氣)를 제어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수단으로 여겨졌다.33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빙고 제도를 따라 한양에 빙고를 설치하고 얼음을 보관했다. 빙고에 저장한 얼음은 여러 관사ㆍ종친ㆍ고위 관료 등에게 배급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은 『경국대전』 「예전」 반빙(頒氷)조에 명시되었다.34 반빙은 여름철마다 거행된 국가 의례로서, 얼음의 저장과 분배는 국가의 통제와 관리 체계 속에서 운영되었다.35 이와 같이 얼음 보관과 사용을 단속했던 사회 체제 속에서 쪽 염색에 필요한 얼음은 어떻게 확보되고 활용되었을까?
쪽 염색 과정에서 얼음을 사용하는 조선 장인의 기술은 국왕은 물론 관료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1504년(연산 10) 예조에서는 국왕에게 빙고에 저장된 얼음이 충분하니 배급할 양을 늘리자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연산군은 쪽 염색에서 얼음이 많이 필요하므로 반빙을 확대할 수 없다고 윤허하지 않았다.36 생쪽과 얼음을 활용한 염색 방식은 적어도 16세기 초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얼음 저장량이 부족해서 염색 때 얼음을 사용하지 못하는 인조대의 사건도 주목된다.
송국택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얼음덩이가 이미 다 녹아서 제향(祭享) 및 공상(供上)에 이어 쓰기가 어려울 듯한데, 여러 궁가 및 대신, 원훈 집에 얼음을 반급(頒給)하라고 또 계하하셨습니다. 공상하는 얼음도 조만간에 끊어질 판인데 상의원에서는 또 남염(藍染) 때에 사용하기를 청하여 30정(丁)이나 요구하였습니다. 옮겨 지급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입계하여 처치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멀리서 운반해 오는 약간의 얼음덩이마저 이미 다 녹아 버렸는데 쓸 용도는 이와 같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스러우므로 변통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제향 및 공상하는 외에 얼음을 반급하는 일과 남염에 쓰는 일은 우선 정지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37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남염에서 얼음이 사용되는 기술은 국왕뿐 아니라 중앙의 관료들도 충분히 주지하던 사실이었다. 인조대 쪽염을 시행할 때 얼음 사용을 제지하려는 움직임은 상의원의 얼음 사용에 대한 예조의 행정적 대응이었다. 반빙이라는 국가적 의례를 담당하는 예조에서는 여름철 남염을 위한 상의원의 얼음 요구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얼음 공급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예조에서는 남염 시 얼음 사용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조문수가 상의원의 말로 아뢰기를, “토주(吐紬)는 본원에서 마련하여 이달 초 8, 9일 사이에 남색으로 물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얼음덩이가 금처럼 귀하여 부득이 여염에서 염색하는 방식에 따라 끓는 물을 사용해 염색하려고 합니다. 다만 끝에 염색할 때는 약간의 얼음 조각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자문감(紫門監)의 얼음 30정 정도를 제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세가 이와 같아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38
청염장(靑染匠) 10명이 소속된 상의원에서는 명주에 청색 물을 들이기 위해 얼음을 필요로 했다.39 그러나 궐내의 얼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장인들은 생쪽만으로 염색하는 생쪽 염법을 온전히 구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명주 염색이라는 과업을 수행해야 했던 청염장들은 자신들의 정식 기술을 유보하고 민간에서 활용하던 염색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사료에서 언급된 “(쪽을) 물에 삶아 물을 들인다(烹水入染)”는 어염집의 기술은 본론 2장에서 살펴본 숙람즙을 활용한 혼합 염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숙즙에 생쪽을 섞어서 물을 들일 때에도 생쪽을 가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얼음은 필요했다. 이러한 사정을 이유로 상의원에서는 자문감(紫門監)의 얼음을 사용하겠다고 요청한 것이다.40
남염에 이용되는 얼음을 둘러싼 예조와 상의원의 갈등은 얼음을 활용하는 장인의 남염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조선에서는 빙고의 얼음이 부족할 경우, 청염장에게 얼음 사용을 제한하거나 중단시켜 그들이 익숙하던 염색법을 포기하거나 전환하도록 요구했다. 얼음이 부족한 상황에서 장인들은 그들이 원했던 청색을 구현할 수 있는 생쪽 염법 대신, 민간의 방식을 따랐다.
이러한 선택은 생쪽 염법이 생쪽과 얼음 수급이 원활한 조건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던 기술이었음을 시사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해동농서』 이전의 기술서에서 언급된 혼합 염법은 생쪽 염법의 실행이 어려운 환경에서 활용한 남염 기술이었으며, 주로 민간에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1
한편 민간에 비해 얼음을 접하기가 용이했던 왕실에서 조차도 염색을 위한 얼음 확보는 수월한 문제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궁중 전각의 남염에 필요한 얼음은 왕실용 얼음을 저장하는 내빙고에서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빙고의 물량이 부족할 경우에는 외빙고, 그중에서도 서빙고에서 일부 분담해야 했다.
효종대 내빙고의 공상(供上)을 담당했던 선공감(繕工監) 곧 자문감에서는 궁중의 남염용 얼음을 서빙고에서 함께 공급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서빙고 제조였던 홍주원(洪柱元)은 서빙고의 공급 분담에 반대했다. 그는 서빙고가 궐내 염색용 얼음을 담당한 전례가 없음을 지적하고, 서빙고의 얼음도 이미 고갈 직전임을 피력하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신이 이전에 빙고에 보관된 얼음이 곧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이미 아뢰었습니다. (…) 이처럼 매우 곤란하고 절박한 시점에, 뜻밖에 선공감(繕工監)이 내빙고에 보관된 얼음이 곧 바닥날 것이라는 이유로, 궁중 각전(各殿)의 쪽염용 얼음을 본고(서빙고)에서 담당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내빙고와 외빙고 모두 국가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로서, 만일 어느 쪽이 부족하게 된다면 상호 조정하고 보완하여 사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문제는 내빙고의 수요량은 본고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데, 지금 와서 아무런 전례도 없이 고갈 직전의 본고에게 이 업무를 떠맡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선공감이 아마 내빙고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이런 상소를 올렸을 것입니다.42

서빙고에서 궐내 남염용 얼음을 분담해야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내빙고의 남염빙을 서빙고가 분담한 전례가 없으므로 분급을 거부했던 효종 연간의 상황과 달리, 숙종대에는 이미 분담 체제가 상습적으로 이루어졌다.
1700년(숙종 26) 예조에서는 서빙고가 궐내 남염용 얼음을 분담하는 일에 따른 어려움을 제기했다. 궁궐 전각에서 남염에 사용하는 얼음은 내빙고에서 담당하는 것이 정례(正例)였으며, 예외적으로 윤달이 있는 해에만 서빙고가 분담하는 것을 운영 원칙으로 두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윤달 여부와 상관없이 쪽 염색 시기만 되면 내빙고가 얼음 부족을 이유로 배급 물량을 감축하면서, 서빙고가 궁중 전각의 남염빙을 떠맡게 되었다.
남정중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서빙고(西氷庫)에서 올린 공문을 살펴보니, 연례에 따라 궁궐에서 쪽 염색(藍染)을 할 때 필요한 얼음(藍氷)은 내빙고가 전담하여 책임지고 공급하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규정입니다. 윤달이 있는 해에는 절반 정도를 나누거나 혹은 2~3일치 분량을 본고(서빙고)로 넘겨 공급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몇 해 사이에 내빙고에서는 염색이 시작될 때 처음 1~2일 분량만 공급한 후, 얼음이 부족하다며 윤달 여부와 관계없이 서빙고로 넘겨 서빙고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하게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서빙고는 보관 중이던 얼음을 모두 소진하고, 결국 경기 일대의 읍들에서 얼음을 취해서 8~9월 공상(供上)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 남염용 얼음(藍氷) 문제에 있어서 이전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만약 이 사태를 바꾸고 조정하는 조치가 없다면, 공상(供上)과 각처의 얼음 공급 업무에 지장이 생길 것이니 이는 말로 다할 수 없이 답답하고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신은 서둘러 아뢰오니 올해부터는 윤달이 없는 해에는 염색용 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빙고가 전담하는 것을 공식으로 규정하여 시행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 궁궐 내 염색에 쓰이는 얼음은 내빙고에서 전담 공급하고, 상의원(尙方)에 쓰이는 얼음은 서빙고에서 공급하는 것이 예전부터의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내빙고는 항상 부족하다며 1~2일 정도만 얼음을 공급하고, 그 이후 전량을 외빙고(서빙고)로 넘겨 사실상 전부 전담시키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단지 예전부터 정해진 규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얼음으로 항상 곤란이 이어지고, 결국에는 주상께 드릴 얼음도 부실하게 올려지는 폐단에 이릅니다. 일의 체계로 보아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 올해는 예전의 규정대로 내빙고가 염색용 얼음을 전담하여 서빙고로 이관하는 일이 없도록 해서 혼란을 막아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44 [강조 표시 : 본고 필자]
전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염 얼음은 사용처를 따라 공급을 담당하는 빙고가 구분되었다.45 궐내 전각의 얼음은 내빙고에서 상의원의 남염빙은 서빙고에서 각각 공급했다. 그런데 내빙고가 윤달 유무와 상관없이 본래 담당하던 각전의 얼음까지 서빙고로 전가함으로써 사실상 서빙고가 남염빙의 총수요를 책임지게 되었다.
서빙고를 관할하는 예조는 전례를 따라 궐내 남염용 얼음은 내빙고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서빙고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예조의 요청은 당시에 가납되었으나, 이후에도 서빙고가 여전히 내빙고의 남염 얼음까지 떠맡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3년 뒤인 1703년(숙종 29) 예조에서는 동일한 문제를 재차 언급하며, 행정 원칙이 지켜져 시행되기를 건의했다.46 다시 말해, 궁궐 내 각전에서 사용하는 쪽염용 얼음은 내빙고가, 상의원에서 소비하는 남염빙은 서빙고가 담당하는 것으로 분급처를 명확히 했다. 숙종의 재가로 서빙고의 남염빙 분담 사안이 일단락 해소된 듯 보였으나, 수요에 비해 상시적으로 부족한 공급 구조 속에서 남염빙(藍染氷) 배급 문제는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1773년(영조 49) 내빙고의 얼음 부족으로 인해 남염용 얼음을 서빙고에서 담당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47 영조 연간에도 내빙고의 보유량이 부족해질 경우에 궐내 전각의 남염빙 분급은 서빙고가 분담하는 변칙이 다시 운용되었다. 이처럼 쪽의 온도를 낮추고 선명한 푸른빛을 얻기 위해 얼음을 활용한 조선의 남염 기술은 왕실의 얼음 소비 현황과 직결되었고, 그로 인해 내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각 담당 기관인 자문감과 예조 간의 행정적 긴장은 지속되었다.
정조 연간에는 남염에 사용되는 얼음을 둘러싼 행정 문제를 제도적 차원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내빙고가 궐내 각전의 남염빙을 전담해야 하는 행정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빙고의 얼음 사용을 통제해야 한다고 인식했던 듯 하다.48 이에 따라 『대전통편』에서는 쪽 염색에 사용되는 얼음의 분급 방식을 남염빙(藍染氷)이라는 별도 조항으로 규정했다.49
신설된 남염빙조는 각전의 남염용 얼음을 분급하는 절차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각 전각(殿閣)의 중관(中官)들이 매년 5월 말까지 쪽 염색에 필요한 얼음 수량을 미리 파악해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은 뒤에 예조를 통해서 얼음 분급이 시행되었다. 새로운 규정은 사전에 인가받지 않은 물자를 출납하지 않음으로써 내빙고의 얼음 부족 현상, 나아가 서빙고로의 분급 전가를 방지하려는 수단이었다. 조항이 만들어지게 된 대강의 상황은 아래의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하교하기를, “매년 내빙고에서 관리하는 남염빙은 허실이 뒤섞이기 쉬운 탓에, 근래에는 빙패(氷牌)를 쓰지 않고 표지(標紙)로 처리해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표지로 처리하게 되면 이는 행정적으로 별도 판결 항목으로 귀결되니, 이 또한 이름과 실제가 맞지 않는다. 이후로는 각 전각(殿各)의 장무중관(掌務中官)이 그해에 실제로 필요한 얼음 수량을 계산하여, 매년 5월 그믐에 먼저 수본(手本)을 승정원에 올려 아뢰도록 하라. 그 문건 뒷부분에 관련 내용을 붙여 계하(啓下)를 받은 뒤 본조(예조)로 내려보내면, 본조에서는 이를 가져다가 해당 빙고에 통지하고, 그 지정된 수량만큼만 진배(進排)하게 하라. 예를 들어 명주 한 가지만 가지고 보더라도 정해진 규정상 필요한 물품이 사실상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경우가 많고, 해마다 따로 표지를 발행하여 처리하는 것 또한 매우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떤 해는 과도하게 많고 혹은 너무 적어 그로 인해 생긴 폐단도 결코 적지 않았다. 올해부터는 예조가 매년 6월 초에 바로 각 전각에 진배하게 하되, 그 수량은 지난 5~6년 동안의 것을 비교하여 기준 수치를 정한 다음, 임금이 주재하는 연석(筵席)에서 품정을 받은 뒤, 그 기준을 모범 삼아 시행하도록 하라.”50
정조대에는 남염 분급 절차에 대한 법규뿐만 아니라 관리 차원의 제재가 마련되었다. 내빙고의 관리 소홀로 8월 이전에 얼음이 바닥날 경우, 해당 관원을 파면한 뒤 의금부로 압송하고 하리(下吏)는 엄중히 감처(勘處)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51
또한 1795년(정조 19)에는 내빙고와 서빙고의 기능이 재정비되었다.52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는 두 빙고의 연간 소비량과 보유량을 바탕으로 내빙고는 공상(供上) 및 판부빙(判付氷)과 남염빙만을 담당하고, 종래 내빙고가 담당하던 궁방의 다른 얼음 공급은 서빙고로 이관할 것을 제안했다.53 이와 같은 정비는 쪽과 장인이 만들어낸 조선의 남염 기술로 인해, 기술 실천에 필수적 자원인 남염빙을 전담 공급하는 기관으로서 내빙고의 성격을 재규정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조정 양상을 기술 자체의 요구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ㆍ경제적 변화 속에서도 이해될 필요가 있다.54
살펴본 일련의 제도 정비는 생쪽 염색에 필요한 얼음 수요가 왕실의 반빙 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드러낸다. 『대전통편』에 남염빙 조항이 신설되고 내빙고의 운영 규정이 보완되었던 과정은 장인들의 기술 실천이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인정되었다기보다, 여름철 얼음이라는 희소 자원을 둘러싼 수요와 분급 문제가 행정 절차 속에서 가시화되고 조정된 결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55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생쪽 염색은 기술 내부의 숙련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원 분배와 제도 운영의 문제와 접속되면서 행정적 대응을 낳았다. 이러한 점에서 남염빙 조항은 장인의 기술을 직접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특정한 기술 실천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자원 수요를 국가가 관리 가능한 방식으로 조정한 제도적 산물로 볼 수 있다.56
5. 맺음말
조선시대의 생쪽 염색 기술은 쪽 식물의 물질적 성질, 장인의 경험 지식, 얼음이라는 자원, 이를 조정하는 행정 제도가 맞물려 성립한 역사적 실천이었다. 본고는 조선 후기 기술서에 남겨진 남염 기록을 검토하여, 생쪽 염법이 문자 지식으로 구축되는 과정과 기록 지식이 실제 염색 실천을 반영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색경』과 『산림경제』에서 확인되는 혼합 염법은 대체로 외래 기술서의 전거를 바탕으로 소개되었으나, 『산림경제』의 속방처럼 장인의 경험과 감각을 반영한 생쪽 염법의 흔적이 함께 포착된다. 이후 『증보산림경제』, 『해동농서』, 『규합총서』, 『임원경제지』 등에 나타나는 조선 후기의 남염 기록은 생쪽과 얼음을 결합한 염색 실천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고온에서 색이 탁해지는 쪽의 성질에 대응하여 장인들이 저온 유지와 신속한 작업을 중시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쪽 염색에 필요한 얼음의 확보 문제는 왕실과 관청의 반빙 체계와 연결되었다. 예조와 상의원, 내빙고와 서빙고 사이에서 반복된 갈등, 그리고 정조대 『대전통편』에 신설된 남염빙 조항은 생쪽 염색이 요구한 자원 수요가 행정 질서 속에서 조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국가가 기술 자체를 승인했다는 의미라기보다, 특정한 기술 실천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물질적 조건이 행정적 관리의 대상이 되었음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남염 기술은 전래된 지식을 수동적으로 답습한 결과도, 사회 주변부의 하찮은 잡술도 아니었다. 조선의 생쪽 염색은 쪽이라는 식물의 성질과 이를 다루는 장인의 숙련, 얼음이라는 계절 자원, 그리고 국가의 분급 제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 복합적 실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