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몸”의 지식, 무예의 번역과 실천
Bodily Knowledg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ranslating and Practicing Martial Arts
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Seoul National University
2 한국학중앙연구원 태학사과정 AKS Scholar of Taehaksa,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133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compilation of late Joseon martial arts manuals, including Muyejebo and Muyedobotongji, as a dynamic process of knowledge translation and collaboration. Driven by the state's ambition to standardize military practices, the compilation was achieved through the close collaboration of “middling experts”such as Han Kyo, Lee Deok-mu, and Pak Je-ga with field officers and soldiers. Rather than merely replicating Ming Chinese texts like Jixiao Xinshu, these actors actively translated tacit bodily movements into systematic textual and visual formats tailored to the Joseon context. They categorized techniques by their practical applications and innovated visual representations to establish an authoritative standard of "correct martial arts." Consequently, the textualization of martial arts was a profound project to secure the state's epistemic authority over bodily knowledge. However, these standardized manuals did not entirely dictate field practices. Instead, late Joseon martial arts remained living bodily knowledge, constantly adapting to practical needs while interacting with the official texts. Ultimately, this study reveals that the unique landscape of Joseon martial arts was shaped by the continuous tension between text and body, state standardization, and local field variations.
1. 들어가며
『무예제보(武藝諸譜)』는 한국사 최초의 관찬 무예서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31년(1598)에 편찬됐다. 개전 초기 조선군은 조총과 단병기(短兵器)를 앞세운 일본군의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선조 26년(1593) 1월 평양성 전투에서 명의 이여송(李如松) 휘하 남병(南兵)이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활약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전술과 무예가 담긴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들여오기 위해 노력했다.1 『무예제보』는 이 책에 실린 무예를 번역해 낸 결과물이었다. 이후로도 무예서 편찬은 계속됐다. 광해군 2년(1610)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영조 35년(1759) 『무예신보(武藝新譜)』, 그리고 정조 14년(1790)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간행됐다.
조선 후기 무예서를 다룬 연구들은 책에 담긴 무예보다는 주로 그것의 편찬 배경과 영향에 주목했고, 무예서를 군사·정치적 도구로 이해했다. 먼저 군사사 연구에서는 “군사혁명론(Military Revolution)”2을 한국사에 적용하는 일환으로 조선 후기 무예서 편찬을 조명했다.3 임진왜란 중에 『기효신서』가 넘어온 뒤 조선은 조총을 활용한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창ㆍ검을 활용한 단병 무예도 훈련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 후기 무예서 편찬과 보급은 국가 주도로 조총과 궁시(弓矢)를 보조하는 단병 무예 교육을 위한 것으로 파악됐다.
『무예신보』와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왕권 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4 대리청정 시절부터 노론과 마찰을 빚고 영조와의 갈등으로 군무를 장악하기 어려웠던 사도세자가 『무예신보』 편찬을 통해 당색(黨色)에 얽매이지 않은 신흥 무반층을 양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도 정조가 생부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군권 장악과 왕권 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 전략”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무예서 편찬의 배경과 그 과정은 대체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은 무예서를 군사ㆍ정치적 수단으로만 이해하여 거기에 수록된 무예라는 “지식”이 조선으로 이동하며 텍스트화된 과정과 그 의의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
무예 자체에 주목한 연구들은 체육학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진행됐다.5 이들은 『무예도보통지』가 한ㆍ중ㆍ일 삼국의 무예를 하나의 수련체계로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했다.6 그러나 이들은 현대 체육학ㆍ무예학의 관점에서 무예의 실용성과 실전성을 탐구하는 데에 치중하거나, 무예의 연원을 고찰하며 한국적 특징이나 전통성을 부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 논문은 최근 과학기술사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무예서의 편찬을 새롭게 조명한다. 과학 지식은 국가나 소수 엘리트 학자의 머릿속에서만이 아니라 장인들의 “몸”을 통한 일상적 실천과 물질과의 교류 속에서 탄생했다.7 무예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무예도 장인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문서로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암묵지(tacit knowledge)로 무관과 군인의 “몸”을 매개로 학습 및 전승됐다. 무예서 편찬이 국왕의 명령으로 시작됐을지라도 그들의 몸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한교(韓嶠, 1556~1627)ㆍ이덕무(李德懋, 1741~1793)ㆍ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같은 “중간자”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8 프랑스 혁명기(1789~1799) 포병 장교들은 학자의 수학 지식과 장인의 특수 지식을 결합해 기하학적 기술 도면을 고안해 내며 일반 작업자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했다.9 물론 한교 등은 무예를 직접 연마하지 않았으며, 무관ㆍ군인과 자신들을 차별화하려는 의도에서 무예서를 편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은 자신의 학술적 역량을 활용하여 무관과 군인의 몸에 머물러 있던 지식을 체계적으로 텍스트화하며 이질적인 두 인식론적 세계(문자와 몸)를 잇는 전례 없는 지적 도전을 수행했다.
한편, 지식이나 물질의 이동은 고정된 원본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새로운 맥락 속에서 창조적으로 재구성되는 “번역(translation)”의 과정이기도 했다.10 『기효신서』를 통해 이동해 온 무예 지식도 조선 후기 무예서에 그대로 실리지 않았다. 그 지식은 무관과 군인의 몸을 거쳐 중간자의 붓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조선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됐다. 더욱이 무예서 편찬 이후에도 무예는 텍스트에 박제된 전통으로 존재하지 않고, 현장의 실천 속에서 부단히 변화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선 후기 “몸”의 지식으로서 무예가 번역되고 실천되는 맥락을 자세히 탐색한다. 우선 무관과 군인의 몸으로 전승되던 무예가 왜 하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 차원에서 기록·관리할 지식으로 부상했는지를 살필 것이다. 나아가 무예를 번역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당면했던 난관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어떠했는지, 무예가 종이(목판)ㆍ그림ㆍ표와 같은 텍스트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무예서 편찬 이후에도 무예가 현장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2. 기록될 필요가 있는 “몸”의 지식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무예와 같은 “몸”의 지식은 텍스트화되지 않았다. 그 원인을 흔히 무예를 천시했던 당대의 사회 인식에서 찾곤 한다. 전근대에는 무예가 천한 기예로 여겨졌기에 굳이 문자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본 것이다. 고려 명종대 인물인 두경승(杜景升)은 공학군(控鶴軍)에 있었을 때, 수박(手搏)을 하던 무리가 그를 같은 오(伍)에 편입시키려 했다. 이때 그의 외숙[舅]인 상장군(上將軍) 문유보(文儒寶)가 “수박은 천기(賤技)이니 장사(壯士)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만류했다.11 문자 그대로만 보면 무관인 문유보조차 수박을 천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예는 몸 자체로서의 신체 조건과 함께 하급 무관과 군인의 선발에서 중요한 기준이었다.12 특히 수박은 단순한 전기(戰技)를 넘어 권력자의 눈에 띄어 승급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의민(李義旼)은 수박을 잘한다고 의종의 총애를 받아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진급했고,13 최충헌(崔忠獻) 집권기에도 중방(重房)에서 힘이 센 자들이 수박을 겨루어 이긴 사람이 교위(校尉)나 대정에 임명되기도 했다.14
이처럼 고려시대에 무예는 무관이나 군인으로 발탁되려면 익혀야 하는 가치 있는 지식이었다. 따라서 무예가 기록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으로서의 가치 부재가 아니었다. 무예는 몸을 통해 전승되는 지식이고 이러한 방식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굳이 무예서를 편찬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편찬하더라도 그만큼 실용성이 없었을 것이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임진왜란 이전 군사 지식의 구조와 전승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시 군사 지식은 계략(計略), 진법(陣法), 무예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이는 대략 오늘날의 전략, 전술, 전기(戰技)에 대응한다. 먼저 계략은 문자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여겨졌고, 최고 지휘관은 주로 경전과 병서를 통해 계략을 익힌 인물로 임명됐다. 고려시대 대규모 정벌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최고 지휘관은 서희(徐熙)ㆍ강감찬(姜邯贊)ㆍ윤관(尹瓘)ㆍ김부식(金富軾) 등과 같은 문관이었다. 이들은 군사작전의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공과에 대한 상벌을 정하는 역할을 했다.15
또한 유홍(柳洪)16은 『춘추좌전(春秋左傳)』뿐만 아니라 병가(兵家)의 비결(秘訣)에 통달하여 국가의 위기 때마다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정책을 결정했는데, 적중하는 경우가 많아 여론이 그를 중히 여겼다고 알려졌다.17 이처럼 계략은 주로 고사에 근거해 전훈을 분석하고 적용하는 능력이었으며, 경전이나 병서와 같은 문자를 통해 학습 및 전승되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에 가까웠다.
진법은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중·상급 무관의 필수 지식이었다. 어려편오진(魚麗偏伍陳)을 시험 보고 일과(一科)를 차지하여 별장과 낭장(郎將)으로 연이어 승급한 신보순(申甫純)이나, “병진(兵陣)의 일에 정성을 다하여[業精兵陣]” 대정에서 섭교위(攝校尉)로 승급한 김순(金純)의 사례는 고려시대 무관에게 진법 지식이 그만큼 승급할 때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고려에서는 11세기에 거란전쟁을 겪으며 병서와 진법에 관한 관심이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난 직후인 정종 6년(1040)에 조정에서 변방에 『김해병서(金海兵書)』를 배포했고,19 그 외에도 여러 병서를 수입하고 중앙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병서장(兵書藏)을 두고 이를 관리하는 간수군(看守軍)을 편성했으며,20 여기에는 『병서접요(兵書接要)』, 『제갈량집(諸葛亮集)』과 같은 병서가 소장되어 있었다.21
하지만 병서와 진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학습하는 체계는 잘 정착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종 4년(1109)에 설치된 강예재(講藝齋)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인종 11년(1133)에 폐지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22 고려시대 무관 임명은 주로 음서와 항오(行伍)에서 발탁을 통해 이루어졌고,23 이러한 상황에서 병서나 진법에 대한 교육이 개인이나 가문을 통해 구전심수(口傳心授) 됐을 가능성이 높다.24 묘지명에서 신보순이 누구의 휘하에서 승급했는지를 일일이 명시한 사실은 당시 무관에게 누구의 밑에서 일하고 배웠는지가 중요했음을 시사한다.25
그런데 조선 건국 이후 국가는 진법 지식을 문자로 기록하고 그 전승을 주도하고자 했다. 태조 2년(1393)에 훈련관(訓鍊觀)이 설치되고 무예를 익혔으며, 병서와 전진(戰陣)을 강습한 이후로 정도전(鄭道傳)이 주도하는 진법훈련이 진행됐다.26 정도전은 『주례(周禮)』의 이상적인 훈련을 조선 진법의 표준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진법 지식의 표준화는 당시 병권을 분점하던 절제사와 휘하 무관들의 지휘ㆍ관계망이 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27
그러나 이를 단지 병권 장악을 위한 정책적 수단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정도전 주도의 진법 훈련과 이에 대한 무관들과의 반발은 진법 지식의 권위를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다. 즉, 이는 현장 무관들에게 체화된 경험적 진법을 배제하고, 정도전이 제시하는 텍스트 기반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임을 규정해 가는 지식 권위의 독점 과정이었다.
현장의 무관들에게는 분명 몸으로 전승되던 그들만의 익숙한 진법 지식이 존재했다. 태종 7년(1407) 1월에 올린 성석린(成石璘)의 상소에는 “고려 말 전투를 잘하기로 소문난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은 모두 제기(梯己)ㆍ심복(心腹)ㆍ수족(手足)과 같은 사람을 두어 결정적일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언급하며, 장상의 자제와 친지 중 능력이 있는 사람을 미리 뽑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이는 장수와 휘하 무관 간에 호흡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다시 말해 당대 무관들에게 전투 수행을 위한 지식이란 문자로 적힌 진법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함께 어울리며 손발을 맞추는 경험적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법 지식의 전승 방식은 개별 장수의 역량에 따라 전투력에 심각한 편차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29
따라서 조선 조정은 표준화된 진법을 마련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정도전의 『오진도(五陣圖)』를 기점으로 하륜(河崙)ㆍ변계량(卞季良)‧하경복(河敬復) 등이 새로운 진법을 저술했고, 문종대에는 『(오위)진법』이 완성됐다.30 이러한 결과물은 문자를 매개로 전국적인 보급과 체계적인 학습의 대상이 됐다. 일례로 하경복 등이 저술한 『계축진설(癸丑陣說)』은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됐고,31 전서(全書)뿐만 아니라 요점을 추린 약초(略抄)도 별도로 제작되어 보급됐다.32 결국 진법 지식이 현장의 장수와 군관 사이에 사적으로 전승되던 구조는 점차 해체됐고, 이를 국가가 직접 기록하고 관리하는 공적 텍스트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예는 조선 전기까지 텍스트화되어 전승되지 않았다. 대신 무관이나 군인들 사이에서 몸에서 몸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앞서 두경승을 같은 오에 넣어 함께 수박을 익히려 했던 장면은 이러한 전승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유보가 수박을 천한 기예라 표현한 이유도 그 지식 자체의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장차 중ㆍ상급 무관이나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무예보다는 진법이나 계략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몸으로 전승되는 구조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국가 차원에서 굳이 무예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고, 기록을 남기더라도 그만큼 쓸모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급 무관과 군인은 무예가 텍스트화되지 않아도 그것의 학습과 전승이 가능했다.
조선 전기에 무예 지식은 여전히 군사들의 몸에 머물러 있었다. 국가 차원의 무예훈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 13년(1431) 3월 방패(防牌) 10명을 선발하여 장검(杖劍)을 전수하여 깨닫게[傳曉] 하고, 대장(隊長)ㆍ대부(隊副) 40명을 선정하여 여름·겨울에 훈련하기도 했다.33 같은 해에 방패 외에도 내금위(內禁衛)ㆍ별시위(別侍衛)ㆍ갑사(甲士) 중 농창(弄槍)을 시험하여 입격한 사람을 훈련관에 모아 연습하게 했으며, 도진무(都鎭撫) 성달생(成達生)과 상장군 김가물(金加勿)에게 이를 관장하게 했다.34 특히 투화자(投化者) 출신으로 창술에 능한 김가물을 중심으로 무예가 전수됐던 점은 당시 무예 교육이 특정 인물의 몸에 체화된 지식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35
이러한 지식 전승 구조는 당시 법전의 평가 기준에서도 드러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린 기창(騎槍) 시험의 기준에 보면, 말을 타고 25보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3개의 추인(芻人)을 15척 5촌의 창으로 적중시키는데, 그 사이사이에 “세를 갖추었을 때만 쓴다[用勢具者]”고 한다.36 이 세는 기창세(騎槍勢)와 보창세(步槍勢)로 구분되어 착창세(着槍勢)ㆍ배창세(背槍勢)ㆍ좌우세(左右勢) 등의 동작이 존재했다.37 하지만 각각의 세를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이는 군사들 사이에 몸으로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 전기의 무예 평가에서는 동작을 정확히 취했는지보다는 상대를 몇 명 제압했거나 목표물을 몇 번 적중시켰는지가 중요했다. 태종대에는 수박으로 3명을 이긴 사람을 방패나 갑사에 보충하도록 했으며,38 이는 『육전(六典)』에도 반영되어 수박으로 4명을 이긴 사람을 상등, 3명을 이긴 사람을 중등으로 평가했다.39 그리고 무과 시험의 핵심이었던 활쏘기 역시 목표물에 몇 발을 맞추거나 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물론 『경국대전』이나 『육전』처럼 국가 통치를 위한 최고 법전에서는 무예의 동작이나 평가 기준을 굳이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 전기에 국가의 무예에 대한 관리는 동작의 명칭이나 훈련의 횟수, 합격 기준과 같은 외적 지표를 정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만큼 무예의 구체적인 동작이나 원리는 여전히 군사의 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무예를 둘러싼 조정의 인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여송 휘하 명군이 보여준 전술과 무예는 조선 조정에 큰 충격을 안겼다. 조선에서는 이들 전술과 무예라는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창설하고 명군의 전술이 수록된 『기효신서』에 따라 훈련하도록 했다. 선조는 비밀리에 역관을 통해 이여송 휘하의 인물에게서 『기효신서』를 구매하도록 했고, 1594년(선조 27) 2월 훈련도감 낭청(郞廳) 한교에게 명하여 『기효신서』를 번역하게 했다.40 그 결과 『기효신서』 중 일부 무예들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가 편찬됐다. 조정에서 몸의 지식이었던 무예를 기록하고 관리해야 할 지식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활이나 포와 같은 장병기(長兵器)는 교육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 데에 반해, 검이나 창을 다루는 단병 무예는 실전에 닥치면 저절로 알게 되므로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예제보』 저자인 한교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창과 검을 들고도 왜적의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을 무예를 익히는 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에게 무예는 싸우면서 우연히 체득되는 요행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와 단계에 따라 반복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 기술이었다. 그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예로 들며, 밥을 먹는 일상적 행위조차 학습을 통해 습득되듯이 무예도 반드시 체계적인 연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고 역설했다.41
한교가 지식으로서 무예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왕명으로 『기효신서』의 해석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지만,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정통 유학 엘리트 집단의 중심에 서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위치는 그를 정통 유학의 테두리를 넘어 천문ㆍ지리ㆍ복서ㆍ병학 등 다양한 지식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지적 유연성은 한교가 “중간자”로서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 무관과 군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낯선 몸의 지식을 관찰하고 배우며 체계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42
3. 『무예제보』: 이동하는 무예와 한교의 번역
무예는 본래 몸으로 학습ㆍ전수되는 지식이다. 몸의 지식을 문자로 옮긴다는 인식의 전환은 시작일 뿐이었고, 무예서를 편찬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효신서』의 해독부터 쉽지 않았다. 중국의 방언이 섞인 문장은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고,43 그 안에 담긴 무예ㆍ무기ㆍ진법ㆍ편제 등은 조선 조정에서 지금껏 접하지 못한 이질적인 군사 체계였다. 선조가 “내가 천하의 서책을 많이 보았지만, 이 책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토로하고,44 훈련도감 제조(提調) 류성룡(柳成龍)도 문장과 용어가 난해함을 지적한 것은 엄살이 아니었다.45
더욱이 『기효신서』의 문자를 완벽히 해석해 내더라도 그 지식을 현장에 온전히 옮겨 심을 수 없었다. 책과 현장의 지식이 일치하지 않았고, 문자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지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한교는 책과 현장을 매개하는 “중간자”로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무예제보』를 저술했다. 이 지난한 번역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군이 명군으로부터 무예를 전수받는 현장의 실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조 26년(1593) 2월 이덕형(李德馨)과 이원익(李元翼)은 절강의 낭전(狼戰)이나 삼기병(三技兵) 제도를 익혀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며, 1년 후 이덕형은 다시 『기효신서』에 따라 여러 무예를 익히자고 건의했다.46 그해 3월 광해군의 호위부대였던 의용대(義勇隊)를 훈련도감의 살수(殺手)로 편입하고,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게 했다.47
무예의 전수는 주로 명군 교사(敎師)를 통해 이루어졌다.48 선조 25년(1592) 명의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명군이 돌아가기 전에 군사 조련법을 학습하도록 류성룡에게 권했고, 류성룡은 국왕에게 아뢰어 70여 인을 불러 모아 그의 휘하 군사 10인을 교사로 삼아 창ㆍ검ㆍ낭선 등을 연습하도록 했다.49 이때 낙성지 휘하의 문유(聞愈)는 척계광이 『기효신서』를 저술할 때 함께 참여했던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50 이후 선조 27년(1594) 겨울에 경략(經略) 손광(孫礦)에게 교사를 청해 이듬해 2월 진양기(陳良璣) 등 12~16명이 조선으로 왔고, 7월에는 호대수(胡大受)가 이끄는 100여 명이 조선군의 훈련을 돕기 위해 입국했다.51 이 외에도 같은 해 12월쯤에는 각 도에 교사를 파견하여 삼수기법(三手技法)을 훈련시켰다고 한다.52
그러나 명군에게 무예를 전수받는 과정에서 첫 번째 문제가 부각됐다. 『기효신서』에 있는 무예와 교사로부터 배우는 무예가 일치하지 않았고, 교사들의 수준도 제각각이었다. 초기 훈련도감은 주로 낙상지 휘하의 문유와 진양기 등에게 전술과 무예를 배웠다. 이후 명군이 새로 파견될 때마다 명군에 요청하여 무예를 전습했다. 선조 28년(1595) 2월 선조는 기존에 호여화(胡汝和) 등이 전수한 무예가 어색하다며 무예에 정통한 교사를 초빙하라고 지시했다.53 그해 6월에는 명 사신이 데려온 가정(家丁) 중에 솜씨 좋은 무사를 교섭하여 기예를 확인하도록 했다.54 선조 30년(1597)에는 오유충(吳惟忠)에게 교사를 요청하여 무예를 배웠는데, 그는 자신이 척계광의 제자라고 주장했음에도 『기효신서』의 창술과는 차이가 있어 문제가 됐다.55 따라서 조선에서는 표준이 되는 무예를 판단하고 정리하는 데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선조 31년(1598) 7월에 훈련도감에서 군사들이 무예의 대강만을 익혔을 뿐이라며, 명군의 복귀에 우려를 표한 것은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56
이처럼 『기효신서』와 명의 교사들이 전수한 무예 지식의 가장 큰 차이는 “세(勢)”와 “보(譜)”에 있었다.57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는 공격과 방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세”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각각의 세를 대표하는 그림과 함께 그에 대한 해설인 구결(口訣)을 적어 놓았고, 여러 세를 연결하여 연무하는 보는 따로 수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들이 전수한 무예는 각 무예의 여러 세 중 전부 혹은 일부를 활용해 일련의 순서에 따라 연무하는 “보”였다. 장창(長槍)의 사례를 살펴보면 책과 현장의 지식 사이에 괴리가 있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효신서』에는 장창의 24가지 세를 각각 그림과 구결로 설명하고 있고, 『무예제보』에는 그 중 12가지 세를 활용한 장창전보와 그 나머지 12세를 활용한 장창후보 둘로 나누어져 있다. <표 1>은 『기효신서』와 『무예제보』 장창에 수록된 세들을 정리한 것이다.
표 1 『기효신서』 장창의 세와 『무예제보』 장창전보ㆍ후보의 세
| 구분 | 『기효신서』 | 『무예제보』 | |
|---|---|---|---|
| 장창습법 | 장창전보 | 장창후보 | |
| 1 | 야차탐해세 | 야차탐해세 | |
| 2 | 사이빈복세 | 사이빈복세 | |
| 3 | 지남침세 | 지남침세 | |
| 4 | 십면매복세 | 십면매복세 | |
| 5 | 청룡헌조세 | 청룡헌조세 | |
| 6 | 변란세 | 변란세 | |
| 7 | 철번간세 | 철번간세 | |
| 8 | 과검세 | 엄검세 | |
| 9 | 포지금세 | 포지금세 | |
| 10 | 조천세 | 조천세 | |
| 11 | 철우지경세 | 철우경지세 | |
| 12 | 적수세 | 적수세 | |
| 13 | 기룡세 | 기룡세 | |
| 14 | 백원타도세 | 백원타도세 | |
| 15 | 비파세 | 비파세 | |
| 16 | 영묘착서세 | 영묘착서세 | |
| 17 | 태산압란세 | 태산압란세 | |
| 18 | 미인인침세 | 미인인침세 | |
| 19 | 창룡파미세 | 창룡파미세 | |
| 20 | 틈홍문세 | 틈홍문세 | |
| 21 | 복호세 | 복호세 | |
| 22 | 퇴산색해세 | 퇴산색해세 | |
| 23 | 요자박암순세 | 요자박암순세 | |
| 24 | 태공조어세 | 태공조어세 | |
장창을 전보와 후보로 나누게 된 배경은 『무예제보』「기예질의(技藝質疑)」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58 『기효신서』의 장창세는 척계광이 당시 유행하던 창법을 24가지로 정리한 것이었다. 무예를 텍스트화하여 정리하기 위해 선별한 것이다. 그런데 명군은 24가지를 전부 익혔던 것이 아니라 현장 실무자의 판단에 따라 그중에 일부 세를 선별하고 조합하여 훈련했던 것 같다. 그래서 『무예제보』를 만들 당시 명군 교사로부터 전수된 장창보는 24가지의 세 중 12가지 세만을 활용했다.
한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때마침 선조 31년(1598) 3월에 명의 장수 허국위(許國威)가 입국했는데,59 그는 『기효신서』를 잘 알고 무예도 뛰어났다. 결국 한교는 같은 해 7월에 허국위의 진중으로 찾아갔고,60 그에게 『기효신서』의 장창은 24세인데 명 교사가 전해준 장창은 어째서 12세뿐인지를 물었다. 허국위는 24가지 세는 하나의 세가 천변만화(千變萬化)한 것이니, 결국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며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에 한교는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나머지 12세를 활용한 보를 만들었는데 함께 연습해도 괜찮은지 묻자, 허국위는 뭐든 잘 터득하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답한다.
즉, 장창전보는 명 교사들이 알려준 보이고, 장창후보는 한교가 『기효신서』와 비교하여 누락된 12세를 활용하여 조천세에서 야차탐해세까지 이어지는 보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무예제보』는 『기효신서』에 담긴 세 중심의 무예 지식을 그대로 복사해 낸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 내용은 책과 현장 지식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던 조선의 실정에 맞게 당시 현장에서 전수되던 보 중심의 무예 지식을 재구성하고 텍스트화한 “번역”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말이나 문자를 통해 몸의 지식을 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락되는 요소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신 한교가 허유격에게 묻기를, “기격(技擊=무예)의 묘(妙)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 기예는 거칠지만 그 이치는 지극히 정밀한 데에 이른다. 그 수법(手法)·족법(足法)·신법(身法)의 묘리는 장수가 된 자라도 반드시 몸소 배워야 그 오묘함을 알게 되며, 반드시 세월이 쌓여야 그 정밀함을 얻을 수 있다. 잠깐 말하는 것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니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실로 잠깐 이야기해서는 말하기 어렵고도 어렵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정교하고 자세한 묘리는 본디 일거에 듣기 어렵겠지만 다만 지극히 대강이라도 대하(臺下)께 받고자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강은 첫째가 담력, 둘째는 힘, 셋째가 정밀함, 넷째는 빠름일 뿐이다.”라고 하였다.61
허국위를 찾은 한교는 무예의 묘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하지만 허국위는 말로만 그 이치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무예는 일종의 암묵지로 경험과 실천을 통해 몸에 체화된 지식이었다. 무예 동작의 순서를 익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핵심을 익히려면 분명 미묘한 힘의 조절, 동작의 방향과 속도 등을 세심하게 신경써야 했다. 결국 무예는 그 사람의 지위 고하와는 관계없이 반드시 손발과 몸을 직접 움직이며 단련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무예의 암묵지적 특성을 잘 알고 있던 허국위는 그 핵심을 한교에게 잠깐의 말로 풀어낸다고 해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교의 계속된 질문에 허국위는 담력, 힘, 정밀함, 빠름을 무예의 묘리라고 답했다. 이는 무예를 익히는 데에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그의 답변은 한교에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뿐이었다. 이를 손ㆍ발ㆍ몸짓 속에 녹여내 무예를 실천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결국 말에 의존한 무예의 학습은 단편적이거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묻기를, “이른바 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은 좌우입니까? 전후입니까?”하니, 답하기를, “대문은 전이며 소문은 후이다. 전은 곧 좌이며 후는 곧 우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이른바 음양수(陰陽手)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모든 기계(器械)는 손을 아래를 향해 잡는 것을 음이라고 하며, 위를 향해 잡는 것을 양이라고 한다. 양으로 들어 올리고, 음으로 쳐버리고 죽여버리니 모두가 자연스레 이와 같다.”62
글로 무예를 이해하는 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교는 『기효신서』 중 “대문”과 “소문”, “음양수”이란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문과 소문은 무예 이론에서 무기와 인체의 상대적인 위치를 규정하는 말이다. 『기효신서』에서는 당파(鏜鈀)의 운용을 다루면서 대문과 소문을 논했는데, 당파를 전방으로 겨누고 섰을 때 자신의 가슴과 배 쪽을 대문, 등 쪽을 소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대문은 앞이 되고 소문은 뒤가 된다. 이때 당파는 오른손을 앞으로 잡으므로 당파를 향하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이 대문이 되고 우측이 소문이 된다는 것이다. 음양수는 무기를 잡는 파법(把法)을 설명한 것으로 무기를 지면에 평행하게 놓았을 때 손바닥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음양을 나눈 것이다. 이는 무예에서 기본적인 개념이지만 글만으로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무예는 말과 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한교는 『기효신서』를 들춰보고 명의 허국위와 병사들에게까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답변은 때로 말ㆍ글ㆍ그림이 아니라 몸짓으로 되돌아왔다. 빠르게 돌고 구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그들의 몸짓을 보며, 한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떤 “세”인지조차 포착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동작을 이해하고 책에 담아야 하는 한교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질문하며 “증정(證正)”과 “추구(追究)”의 과정을 거쳤다.63
하지만 한교는 무예를 몸으로 직접 익히지 않았고, 무예를 책으로 옮길 때 동작 간 힘의 전달이나 무게 중심의 변화 등 미묘한 신체 감각을 책에 옮길 수 없었다.64 이러한 문제는 명의 진중에 가서 몸으로 무예를 배운 군인들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교가 허국위에게 질문하며 한창 『무예제보』를 만들고 있을 당시 훈련도감의 살수 중에 12명을 선별하여 허국위 진중에 보내 익히게 했다.65 무예를 익히려면 한교가 옮겨낸 텍스트도 중요했지만, 군인들이 몸에서 몸으로 전수받는 “교(敎)”와 “습(習)”이 빠질 수 없었다. 이들은 명군에게 무예를 배우고[習], 이를 다시 조선의 병사들에게 가르치는[敎]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이러한 전수 과정은 말과 글이 담아내지 못했던 신체 감각을 전달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
결국 국왕의 명령 아래 『기효신서』를 해석하고 무예를 책에 담으려 했던 한교는 “중간자”로서 이러한 군인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인들이 무예를 연무할 때 어색하거나 의심 가는 부분을 포착해 내고, 이를 다시 허국위 등 명의 장군과 군인들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결국 한교의 질문은 말과 글의 한계를 넘어 몸에서 몸으로 전수한 군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4. 『무예도보통지』: “올바른 무예”를 향한 새로운 번역
정조 13년(1789) 가을에 국왕은 이덕무ㆍ박제가ㆍ백동수 등을 불러 모아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명했다. 이 자리에서 정조가 제기한 핵심 문제의식은 군영별로 무예 동작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66 한교와 군인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무예제보』는 무예서의 전범이 됐으나, 앞서 보았듯이 무예 지식은 텍스트만으로 온전히 전승될 수 없었고 반드시 몸을 통한 전수가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한 특성상 무예는 고정된 텍스트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무예도보통지』의 “고이표(考異表)”를 보면, 훈련도감의 당파ㆍ쌍수도(雙手刀)ㆍ교전(交戰), 금위영의 예도(銳刀)ㆍ제독검(提督劍)ㆍ본국검(本國劍)ㆍ쌍검(雙劍), 용호영의 왜검(倭劍)ㆍ월도(月刀), 어영청의 쌍검 등과 같이 군영마다 무예 동작의 차이가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군영마다 동작 차이가 생긴 것은 무예를 전승하는 현장에서 텍스트보다는 몸을 통한 전승이 우선됐기 때문일 것이다. 인조 7년(1629) 검술ㆍ방패ㆍ언월도ㆍ권법 등 무예를 시험하고 있어 『무예제보』와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수록된 무예들이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무예제보』 책 자체는 별로 남지 않아 한 부를 찾아 어람용 3권과 교습용 100여 권을 복간했다.67 또한 당시 무예서에 수록되지 않았던 쌍검, 편곤 등의 무예들도 군중에서는 전수되고 있었으며, 관무재 등을 통해 시험하고 있었다.68 이러한 상황에서 『무예제보』와 별개로 무예의 전수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현장과 책의 지식 사이에 괴리가 다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숙종 말에는 군영에서 『무예제보』가 실전되기에 이르렀고, 숙종 40년(1714)에 훈련도감에서 책을 중간해야 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이명(李頤命)이 발문에서 “비록 종종 시예를 했으나 보는 이미 망실하여 전해지지 않고, 교사들이 서로 구전했기에 옛 법식을 잃은 것이 많았다”라고 지적한 대목은 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몸으로 전승된 지식이 원형의 표준과 달라졌음을 보여준다.69 『무예제보』가 다시 간행된 이후로도 무예가 몸으로 전승되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영조 35년(1759) 『무예신보』를 편찬할 때도 종래 무예 6기의 규정을 다시 고증하여 바로잡아야 했다.70
이처럼 군인들의 몸으로 전승되는 무예는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권법(拳法)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조 37년(1604) 『기효신서』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권보(拳譜)」가 처음 만들어졌다.71 이는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수록됐는데, 원전의 32세를 활용하되 요단편세(拗單鞭勢), 축천세(縮川勢), 고사평세(高四平勢) 등의 세를 몇 차례 반복하여 46개 동작으로 재구성됐다.72 비록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예신보』에서 권법이 38합(合)으로 구성됐다고 하니 이때는 전과 달리 대련 위주로 변모했던 것으로 보인다.73 『무예도보통지』에 이르러서 권법은 다시 변화하여 두 사람이 각각 갑과 을이 되어 나란히 연무하다가 종반에 서로 몇 합을 겨루고 마지막에 서로 둘러업어 거꾸로 메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는 훈련 현장에서 권법의 수련 형태가 계속 달라졌음을 보여주며, 무예서와는 별개로 현장의 무관과 군사들의 몸을 통해 무예 지식이 계속 재창조되며 살아 움직였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군영별로 무예 동작이 차이 난다는 점을 문제시하고 이를 통일시켜 다시 텍스트화하려 했을까? 기존 연구들은 대체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장용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무예서를 편찬하여 무예를 표준화한 것으로 해석했다.74 하지만 지식 전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조의 기획은 무예라는 지식 체계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지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자신이 직접 지은 『무예도보통지』 서문에서 무예가 진법과 경위(經緯)의 관계를 이룬다고 했다.75 이는 무예가 다만 개인의 몸에 귀속되는 지식이 아니라 진법과 일원화된 체계 속에서 구현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지식으로서 국가 차원에서 기록하고 관리해야 할 지식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몸의 지식을 책 속에 온전히 담아내겠다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야심은 국왕의 명령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여러 주체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정조는 장용영에 서국(書局)을 열고 궐 안에서 병법서 20여 부를 꺼내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연구하고 검토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이덕무에게는 규장각 서각인 열고관(閱古觀)의 비서(祕書)도 살펴볼 수 있도록 했으며, 박제가에게는 편집 간에 부족한 점을 찾아 보충하는 임무를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76 그들은 정조의 인식과 의도를 공유했고, 병법을 의술에 비유하며 진법(운기ㆍ경맥), 무기(초목금석), 무예(치고 찌르는 행위)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완전한 병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어린아이라도 무기를 들면 맹분이나 하육과 같은 용사도 피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바르고 정확한 자세로 한 번 치면 강한 사람의 백번 공격보다 낫다며 강함보다는 “올바른 무예”를 강조했다.77
이들은 한교와 같은 서얼 출신으로 정통 유학 엘리트의 세계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덕무와 박제가는 당대에 무시당하던 다양한 기술 지식의 가치에 주목했고,78 “중간자”로서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다시금 무예를 체계화하고 텍스트화해야 할 지식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무예도보통지』에서 『무예제보』와는 달리 무예의 보만을 정리하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무예와 무기의 연원, 칼과 창의 제작법, 좋은 칼과 창을 만들기 위한 재료 등에 대한 해설을 각 무예 앞에 덧붙였다. 이는 무예뿐만 아니라 관련된 지식을 망라함으로써 정조가 “올바른 무예”의 최종 판별자이자 담지자로서의 상징적 권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일조한 셈이다.
또한 이덕무와 박제가는 무예 지식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았다. 이들은 찌르기[刺], 찍어 베기[砍], 치기[擊]라는 무기의 용법에 따라 무예를 재분류했다. 예컨대 창류 뒤에 기창(騎槍)을, 쌍검 뒤에 마상쌍검을, 편곤 뒤에 마상편곤을, 월도 뒤에 마상월도를 배치했다. 이러한 방식은 그 당시에 흔했던 보병이나 마병과 같은 병종에 따른 구분보다도 무기의 형태나 원리에 따른 용법을 지식 분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무예제보』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예서 편찬에는 이덕무와 박제가뿐만 아니라 무관과 군인도 필수적이었다. 백동수는 군영의 장교 중에 무예를 아는 사람에게 기예를 시험하고 관찰했으며, 혹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가다듬었다. 이외에도 각 무예 관련 자료를 참고하고 조사하는[考校] 역할도 맡았다.79 또한 “간세인(看勢人)”이라 불린 지구관(知彀官) 여종주(呂宗周)와 김명숙(金命淑)은 무예의 각 세를 잘 알아 동작을 살피고 시연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0
이 외에 여러 교사도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13년(1789) 입춘에 유득공은 장용영에 가서 건물에 붙일 춘첩대련(春帖對聯)을 지어 올렸는데, 당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있던 이덕무와 박제가는 날마다 많은 교사를 불러 창·봉·도·패 등 여러 무예를 연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81 이러한 현장에서 무예의 시연과 관찰은 각종 동작을 구분하고 수정하며 책에 담아내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을 것이다.
다양한 주체의 협업 속에서 편찬자들은 무예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예서와 달리 다시금 몸으로 전수되며 변화하는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려 했다. 그 문제 중 하나는 3차원의 무예를 2차원의 글이나 그림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누락되기 쉬운 동작의 방향성이나 간격 등이었다. “올바른 무예”를 정립하는 일은 이러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몸의 지식을 책 속에 온전히 담아내야 했으며, 표현 양식 면에서 다방면의 개선이 필요했다.82
우선 총보의 표현 양식이 알기 쉽게 변화했다. <표 2>는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 장창후보의 총보를 비교한 것이다. 『무예제보』의 장창후보제세총도(長鎗後譜諸勢總圖)를 살펴보면 동작의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을 기준으로 줄을 구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은 글자를 뒤집었고, 물러나는 동작은 똑바로 기입했다. 이는 책을 봤을 때 아래쪽부터 위로 나아가고[進] 다시 뒤로 물러나는[退] 동작의 방향성을 글자의 방향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진(進)”, “퇴(退)” 글자와 세 명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동작의 시작점이 우측 하단이라서 한눈에 알아보기 불편하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들은 이러한 기록 방식을 마치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83 그런데 『무예도보통지』의 장창후총보를 보면 얇은 실선 안에 세의 명칭을 기입하고, 굴비처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움직임을 표현했다. 그리고 동작의 시작점[起] 우측 상단으로 통일하여 자연스럽게 동작의 시점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전에 없던 각 세의 그림을 연결한 총도를 새로 만들어 전체 동작의 순서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총도는 『무예제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식으로, 연속되는 몸의 동작을 목판(종이)에 담아내기 위한 핵심 도구였다.
표 2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의 장창후보
| 『무예제보』 장창후보제세총도 | 『무예도보통지』 장창후총보 | 『무예도보통지』 장창후총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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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동작의 진퇴를 기준으로 줄을 바꿔 기록하는 『무예제보』의 방식은 장창후보와 같이 앞뒤로만 움직이는 직선적 동작의 경우 비교적 이해하기 쉽지만, 좌우 또는 회전하는 움직임을 표현하면 조금 더 난해해진다. 아래 <표 3>의 『무예제보』에 실린 낭선의 보(선세총도)를 살펴보면 한차례 앞으로 나아갔다가 물러나고 다시 앞으로 전진할 때 구개세(駒開勢)를 취하며 오른쪽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갑하세(閘下勢)와 가상세(架上勢)를 취하며 좌측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두 차례 하게 되어있다. 총보만으로는 무예를 시연하는 사람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예도보통지』에는 하나의 실선으로 움직임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좌우 움직임이 추가되어도 훨씬 정돈되어 보인다. 전후좌우뿐만 아니라 아래 <그림 1>의 기창총보에서 알 수 있듯이 복잡하게 회전하는 동작도 이해하기 쉽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3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의 낭선총보
| 『무예제보』 선세총도 | 『무예도보통지』 낭선총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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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도보통지』 낭선총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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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무예도보통지』는 기존 무예서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편찬자들은 무관과 군인들의 몸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예를 “올바르게” 정립하겠다는 야심 아래 진법-무기-무예로 연결되는 지식을 체계화하고, 찌르기ㆍ찍어 베기ㆍ치기와 같은 용법을 기준으로 무예를 재분류했다. 또한 3차원의 몸의 지식을 2차원의 글이나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되기 쉬운 동작의 방향성이나 간격 등에 신경 쓰며 표현 양식 면에서 다방면의 개선을 이끌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편찬 작업은 개인의 몸에 귀속되는 지식을 국가 주도의 공적 지식체계로 전환해 낸 지적 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나가며
조선 후기 무예서는 국왕의 강력한 의지와 더불어, 그 의지를 현실로 구현해 낸 다양한 주체들의 치열한 협업을 통해 편찬됐다. 『무예제보』의 한교와 군인들은 명나라 군인들의 낯선 몸짓을 읽어냈고, 『무예도보통지』의 이덕무식박제가와 백동수를 비롯한 여러 무관과 군인들이 함께 무예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시각화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문자와 몸을 통해 무예 지식을 담아내는 데에 이바지했다.
게다가 이들의 작업은 『기효신서』를 비롯한 기존의 무예서를 당대의 맥락에 맞게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한교는 『기효신서』와 현장의 괴리 속에서 현장에서 전수되던 보 중심의 무예 지식을 정리하여 텍스트화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들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무예를 “올바른 무예”로 정립하기 위해 관련된 모든 지식을 망라하고자 했으며, 무예를 용법에 따라 재분류하고 그 동작들을 표현하기 위한 양식을 개선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속에 만들어진 『무예제보』나 『무예도보통지』의 표준이 곧바로 현장의 실천을 완벽하게 재편한 것은 아니었다. 편찬자들이 체계화했다는 결과는 종종 군영 현장의 운용 논리와 충돌하거나, 실무적 필요에 따라 변화했다. 이러한 괴리는 『무예도보통지』 편찬 이후의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앞서 살펴봤듯이 『무예도보통지』는 무예를 무기의 용법을 기준으로 분류하고, 명칭을 통일하며, 군영별로 차이 나는 동작을 고이표를 통해 표준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화는 군사들에게 익히게 하고 시험하는 현장의 운영 논리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보병과 마병의 구분, 또는 군영별 시예(試藝) 편제와 평가의 편의가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보이는 각 군영의 시예 평가 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용호영의 군사들은 관무재에서 용검수(用劍手)ㆍ창수ㆍ권법수로 나누어 평가했다.84 용검수는 용검ㆍ쌍검ㆍ제독검ㆍ언월도ㆍ왜검ㆍ교전ㆍ본국검ㆍ예도를 통틀어 일기(一技)로 삼았고, 창수는 목장창ㆍ장창ㆍ기창ㆍ당파ㆍ낭선‧ㆍ등패를, 권법수는 권법ㆍ편곤ㆍ협도ㆍ곤방ㆍ죽장창을 묶어 평가했다. 얼핏 보면 이는 『무예도보통지』의 분류 기준을 따른 듯하지만, 창수 과목에 등패가 들어가고 권법수 과목에는 협도ㆍ죽장창이 포함되는 것과 같이 어긋나는 부분이 보인다.
훈련도감의 경우는 더 분명하다.85 이들은 먼저 마병과 보군을 구별한 다음, 중순시에서 원기(元技)와 별기(別技)로 나누어 평가했다. 마병 원기는 기추(騎蒭)ㆍ유엽전ㆍ편전ㆍ편추였고, 별기로 월도ㆍ이화창ㆍ쌍검 중 한 과목을 선택했으며, 마재ㆍ쌍마재ㆍ기창교전은 자원 평가였다. 보군은 원기로 조총ㆍ유엽전ㆍ검예ㆍ권법을 평가하고, 별기로 왜검ㆍ교전ㆍ예도ㆍ협도 중 일부를 선택했다. 이때 보군 원기 중 검예에 등패ㆍ낭선ㆍ장창이 포함되고 권법에 곤봉·보편곤이 포함되는 구성 역시 『무예도보통지』의 분류라기보다 군영 운영의 편제에 따라 묶어낸 결과에 가깝다. 즉, 현장에서의 무예 분류는 군영의 상황과 편의에 따라 결정됐고, 이런 조건에서 각 군영 기예의 통일을 이루는 일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명칭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편찬 이전부터 군영마다 다르게 지칭하던 명칭을 통일하려 했다.86 이때 ‘검’을 ‘용검’으로 통일했고,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이를 다시 ‘쌍수도’로 정리했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 편찬 이후로도 현장에서는 용검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더 널리 통용됐다. 정조 22년(1798) 진주에서 간행된 『병학지남(兵學指南)』 권말의 필사기록도 이러한 간극을 보여준다.87 여기에는 원기를 평검ㆍ제독검ㆍ쌍검ㆍ월도ㆍ본국검ㆍ당파창으로 적고, 겸예로 협도ㆍ죽장창ㆍ목장창ㆍ낭선ㆍ등패ㆍ편곤ㆍ곤봉ㆍ단창ㆍ권법을, 별기로 목검ㆍ교전ㆍ왜검을 적어 모두 18기라고 했다. 이어 마상기로는 기추ㆍ편곤ㆍ월도ㆍ쌍검ㆍ이화창ㆍ교전창을 적고 6기라고 했다. 평검과 단검을 각각 쌍수도와 예도에 대응한다면 십팔기와 대략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나, 마상기는 『무예도보통지』가 제시한 구성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필사자가 책의 분류를 충실히 옮긴 것이 아니라, 실제 평가 과목과 현장 인식에 따라 기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아가 『무예도보통지』에 덧붙인 무예와 관련된 방대한 고증이 현장 실무진에게는 필수 지식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도 있다. “무예도보통지언해”라는 표제로 일부 전해지는 책은, 『무예도보통지』 각 기예의 총보와 언해만을 모아 따로 제본한 형태인데, 이러한 책의 유통은 훈련에 곧바로 투입될 수 있는 도식과 설명을 선별해 활용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무예도보통지』가 목표했던 “올바른 무예”의 확립과는 별개로 현장에서 여전히 필요한 부분만을 취하는 선택적 수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무예서의 편찬은 몸의 지식을 둘러싼 국가 권력과 현장 실천 사이의 역동적인 길항 과정이기도 했다. 국왕의 명령에 따른 서얼 출신의 중간자들, 무관과 군인과 같이 다양한 주체들의 협업을 통해 몸에 체화된 무예를 텍스트로 포착하여 표준화하고, 이를 통해 군사력에 대한 통제뿐만 아니라 지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무예는 무예서라는 완벽한 텍스트 속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끊임없이 참조하면서도 현장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쓰이는 살아있는 몸의 지식으로 존재했다. 이 글이 추적한 번역과 실천의 역사는 바로 이 책과 몸, 원본 또는 표준과 변용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낸 조선 무예의 고유한 풍경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