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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석회로 빚은 조선 초 능실의 ‘신종(愼終)’

Devotion Crafted by Hands: Re-examining Discourses on Burial Chambers of Royal Tombs in Early Joseon

안소희1*
Sohui AHN1*

1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과정 Seoul National University

발행: 2026년 4월·Vol. 48, No. 1·pp. 103-132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103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role of materiality and craftsmanship in burial ritual. Burial chamber was the focal space expressing devotion to the deceased. In addition to the kings and scholar-officials, this paper focuses on the agencies of technocrats, craftsmen, craftsmanship and materiality, suggesting that forming alliances with technology and materials was crucial in practicing Confucian values. Stone and lime were main contenders for the chamber. Stone had been the classic material dating back to ancient time, representing for dignity and opulence. On the other hand, lime was brought up to the debate in Early Joseon, being supported by Zhu Xi’s Family Rituals(Jia Li). Scholar-officials upheld lime, eagerly seeking coherence between the ritual texts and reality. However, the significance of the stone for contemporaries did not easily fade away. Technocrats and craftsmen played their role in this stage. Their sense of material and space stimulated intellectual flexibility of debaters over the chamber; thereby, as scholar-officials had striven for, lime could become the protagonist for the chamber.

Keywords:burial chamberburial ritualFamily RitualsLee CheonSejongYejong

머리말

조선 사람들에게 문헌 속 의례와 당면한 현실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사료를 읽다 보면 이들은 현실에서 문헌으로 향했다기보다, 문헌에서 현실로 향했다는 인상이 든다. 고전과 왕조례(王朝禮)를 가지고 현실을 무리 없이 재단해 나갔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최근 한 길례(吉禮) 연구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사료상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경험했음을 보였다. 문헌으로부터 현실이라는 방향성을 갖기에는 현실이 갖는 무게감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당대 논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문헌보다 복잡했고, 그들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라오지도 않았다. 현실과 문헌을 꼭 맞출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았을 그들은, 문헌의 내용을 구부리고 서로 다른 내용을 얼기설기 엮어내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렇게 사료의 표면에만 맴도는 이상적이고도 가지런한 예치(禮治)와 조선의 현실은 실상 가까워질 수 없었다.1

우리에게 익숙한 설명을 되짚어 보자. 대략 이러할 것이다. “왕과 유학적 소양을 가진 신료들이 다양한 문헌을 동원하여 나름의 절충을 통해 의례를 구성했다.” 이 설명에서 주인공은 왕, 신료, 유학적 소양, 문헌이다. 주인공을 정했다면, 이상과 현실의 내용, 그리고 양자의 관계도 정해지기 마련이다.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다간 유학자들이 특정한 문헌에 응축해 놓은 이상을 주장하거나 추구해야 한다. 이 서사에서 현실은 악역이다. 주인공들의 주장과 추구가 온전하기 어렵게 하고, 가끔은 좌절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인공들을 제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비슷한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라면, 주인공들을 새롭게 설정해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왕릉이라는 소재로 범위를 좁혀서 생각해 보자. 왕릉을 조성하는 일은 망자의 사망 후 장사지낼 땅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 시신을 안치하기까지 3~5개월 동안 이루어진다. 능은 망자의 육신이 영혼과는 분리되어 안식에 드는 공간이다. 육신의 온전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동시에 신주에 영혼을 모셔 와 이어질 절차를 기약하는 장례에서 능의 조성은 핵심적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을 두고 누가, 무엇을, 어떻게 고민했을까? 능 가운데에도 흥미로운 공간은 능실(陵室)이다. 능실은 왕과 왕비의 관[재궁(梓宮)]을 모시는 지하공간이다. 조선 초에도 이 공간을 두고 적잖은 논의가 오갔다. 유학에서는 장사 후 시신이 습기나 벌레 등에 상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 적절한 속도로 부패하기를 바란다.2 왕과 신료들은 망자를 위한 유학적 바람을 의식하며, 다양한 고사(故事)와 가치를 들어 능실 구조를 반복적으로 문제 삼았다.3 이들은 고사와 가치라는 담론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능실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말이다. 말이 본래의 목표인, 시신을 온전하고도 적절하게 보존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말 밖의 사물(事物)과 교섭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 교섭을 가능하게 했던 주인공으로서 기술관료와 장인을 호출하고자 한다.4

기술관료와 장인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는 연구가 분명 적지는 않은데5, 무엇을 새롭게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본고는 기술관료, 장인의 지식과 활약을 조정에서의 논의와는 분리해서 다루는 경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의례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가치는 사물,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이고, 당대인들은 기술자들의 도움 덕택에 가치를 더욱 깊게,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생각은 사물과 기술을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보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에 기대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사물ㆍ기술-가치의 연결고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ANT에 대한 홍성욱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ANT에서 기술이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기술이 마치 인간처럼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을 하다가 교통경찰을 보고 안전벨트를 매는 운전자와,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경보음이 귀찮아서 안전벨트를 매는 운전자의 행위에는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6

위의 설명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명령이나 법이 아닌 기술도 인간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설명에 특정 행동과 가치를 연결하는, 의례의 시각을 대입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운전자의 사례로 생각해 보자. 운전자의 안전이 핵심적인 가치이며, 안전벨트를 매는 것은 핵심적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실천이다. 여기서 실천을 유도하여 가치를 달성하도록 하는 요소로는 제도로서 교통경찰과 기술로서 경보음이 있다. 교통경찰과 경보음이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데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제도와 기술 모두 가치의 실현에 동등하게 기여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술적 혁신은 법적, 정치적 토대를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는 Langdon Winner(1980)의 주장을 빌리면, 기술은 사회적 가치의 토대를 만든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7

본래의 주제인 조선 초의 능실 논의로 돌아와서, 다음의 생각들을 논의의 줄기로 삼고자 한다. 사물, 기술, 가치의 연결 속에서, 기술관료와 장인들은 사물과 기술을 다루는 그들만의 역량으로 능의 핵심 가치인 신종(愼終)에 구체적인 형상을 입혔다. 임금과 신료들은 그 구체적인 형상에 힘입어 본인들이 지향하는 신종을 새롭게 사유할 여지를 얻었다. 본고에서는 특히 기술관료와 장인들이 가진 사물과 기술에 대한 역량이 신료들의 유학적 사고와 실천을 견인하는 장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기술과 유학이라는 이종적인(heterogeneous) 지식이 연결되는 양상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8

본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조선 중후기 문집, 의궤를 참고하여 능실을 구성한 돌과 석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 보아, 장인과 기술관료가 구사했을 지식의 토대를 짚어 본다. 2장에서는 세종대 왕릉 조성에서 활약했던 이천(李蕆, 1376~1451)의 사례를 통해, 기술관료가 지녔던 고유의 지적 층위와 그것이 유학자들과의 논의에서 다루어진 양상을 논할 것이다. 3장에서는 회격릉이 도입되었던 예종대 세조 광릉의 사례를 검토하고, 회격릉을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 요인들을 살펴보며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의례 지식의 전개와 구현의 속성을 따져본다. 분석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오례의』를 주로 활용했는데, 필자는 이들 사료가 왕과 신료들의 유학적 소양을 중심으로 당대 논의가 재구성된 것이라고 전제한다. 재구성된 사료에서 생략된 목소리들, 비(非)유학 분야의 역량들, 현장의 손과 묘안, 재료, 공간, 건축물 등을 복원하는 것이 본고의 목표이다. 이로써 조선 초 능제 논의에 얽힌 다채로운 사유와 실천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1. 능실의 돌과 석회, 그리고 장인의 손

愼終追遠 民德歸厚矣『논어』학이

망자의 마지막에 예를 다하고 오래전 돌아가신 분을 정성껏 추모한다면 사람들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상례에서는 장사를 기점으로 망자의 지위가 인격에서 신격으로 변하며, 무덤은 현실에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는 공간이다. 인격으로서의 여정을 마친 망자를 남은 이들이 정중히 대우한다는 신종(愼終)의 가치에서 장사, 특히 무덤이 갖는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무덤의 지하공간은 시신이 물기나 벌레 등으로 인한 변고를 겪지 않도록 견고해야 할 동시에 지기(地氣)의 유행과 같이 자연의 순환에 순응할 만큼 열려 있어야 했다. 밀폐와 개방의 미묘한 경계에서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지하를 구성할 재료들의 물성을 조화롭게 사유해야 했다. 장사라는 의례에서 돌과 석회라는 사물, 재료와 건축에 관한 제반의 기술, 사회적 가치로서 신종은 그처럼 미묘한 경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연결된다.

위와 같은 연결고리는 조선 초 능실의 주재료가 돌에서 석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돌로 조성한 석실은 처음부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멀게는 한반도 고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고, 조선 사람들에게서도 (대체로 중국의 사례이지만) 고대의 제왕들은 석실을 썼다는 언급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석실은 귀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고, 익숙한 만큼 고사(故事)로서의 무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선초 석회가 『가례(家禮)』의 전거를 업고 석실을 대신할 회격(灰隔)이라는 지하공간의 주재료로서 등장했다. 물론 이 전거를 논의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가례』에 강한 신뢰를 보였던 신료들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가례』의 보급, 확산을 시도했고, 국가 의례 정비의 중요한 전거로서 활용했다.9 『가례』의 위상을 감안하면 석회의 승리는 예견되었을 법하지만, 전거가 강력하다는 점만으로 석회가 처음부터 온전한 설득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돌과 석회, 두 재료의 경쟁은 태종대 태조 건원릉 조성에서부터 확인된다. 당시 서운관에서는 석실을, 일부 문신들은 『가례』를 근거로 회격을 주장했는데, 논의만으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종묘에서 점을 쳐서 석실로 결정했었다.10 이 논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건 서운관의 주장이다. 서운관에서는 돌을 주인공으로 삼아, 돌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풍수지리서 『지리신법(地理新法)』의 “기혈론(基穴論)”과 『가례』를 읽어내었기 때문이다.11 이들은 “기혈론”에서 전석(塼石)으로 곽을 만들되 바닥에는 전석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으로부터 바닥은 비워둔다는 결론을, 『가례』 작회격(作灰隔) 가운데 석회와 모래를 섞어 쓰면 돌과 같이 단단해진다는 대목으로부터 지하공간에는 실상 돌을 쓰는 게 좋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기혈론”에서 지하공간의 재료로 전제한 벽돌[塼石]은 인용 과정에서 주목되지 않았고, 『가례』의 석회도 실상 돌의 속성을 추구한 것으로 세월의 조건이 더해지면 돌을 닮게 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의 이면에는 돌의 물성을 기반으로 하는 석실은 벽돌이나 석회의 물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혈론”, 『가례』의 무덤보다 신종의 가치를 더 적절히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석실은 귀함과 후함의 의미를 지녔기에, 석회가 단번에 돌의 위상을 흔들기는 어려웠다.12

재료에 관계된 지기, 체백(體魄), 배수ㆍ방수의 조건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기는 능실의 최소한의 개방성, 체백은 시신과 직접 닿을 재료들의 부패 속도, 배수ㆍ방수는 능실 내부 및 주변의 물기와 관계되었다. 풍수학의 관점에서 지기는 우주의 근원적인 기인 생기가 땅속에 흐르는 것으로, 이 기가 망자의 유해와 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사의 핵심 목표다.13 다만, 이 생기는 흙을 통해 유행하기 때문에, 매장을 위한 땅은 흙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었다.14 석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지기는 곤란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돌은 그 무게와 견고함으로 무덤 주인의 격을 보장했고, 벌레와 나무뿌리, 물기까지도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얻었다. 하지만, 이 장점은 흙과는 거리가 있었다. 돌은 능실 내부로 지기가 들어갈 틈조차 허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석실을 주장한 논자들이 바닥에만은 돌을 쓰지 않는다는 방안을 종종 내놓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15 또, 2장에서 다룰 석곽ㆍ석상 논의에서 보이듯, 돌의 견고함은 돌 단독으로는 시신, 즉 체백이 의지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16 나무로 제작하는 관곽은 돌보다 먼저 부패할 것이기에, 관곽이 부패한 뒤 유해가 돌 위에 덩그러니 놓일 상황도 달갑지 않았다. 이러한 고민에 비추어볼 때 석회는 나름의 장점을 가진 재료였다. 석회는 돌을 대신할 능실의 바닥재로서 언급되기도 했는데, 석회가 돌보다는 지기가 통할 법한 재료로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17 이를 석회의 유연성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유연성은 역으로 회격이 석실을 대신할 만큼 견고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3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능실에서 석회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 소헌왕후의 영릉, 예종대 세조의 광릉 조성 논의를 거치면서이다. 이전까지도 석실만을 조성하다 세종대 논의를 거쳐 석실과 회격을 함께, 예종대 논의 이후 회격을 단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18 현존하는 조선 중후기의 기록은 회격릉으로 전환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조선 초 석실에 쓰였던 거대 석재와 그 조성 과정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장에서는 중후기의 기록과 관련 연구부터 거슬러 읽어가며 능실 작업의 대략과, 돌과 석회가 능실을 구성하기까지의 과정을 파악하여 당시 기술자들의 경험과 지식의 토대를 짚어 보고자 한다.

돌, 석회는 지하의 능실은 물론 지상의 공간을 구성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자재였다. 능을 조성하는 임시기구인 산릉도감 내에는 다양한 부속 기구가 존재했는데, 현재 보존된 가장 오래된 산릉 의궤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1601)에 실린 주요 부서는 9곳이다. 능실과 봉분을 조성하는 삼물소(三物所), 장례 및 제향용 공간을 조성하는 조성소(造成所), 능 내외 조성에 필요한 각종 석재를 제작하는 좌우부석소(左右浮石所), 철물 및 기타 비품 제작을 담당한 노야소겸잡물소(爐冶所兼雜物所), 능소 건물의 주춧돌, 온돌, 계단 등을 제작한 소부석소(小浮石所), 능소의 지세를 보충하고 잔디를 시공한 보토소(補土所), 탁자, 덮개, 우산 등의 소품을 제작한 별공작(別工作), 자재 운반 기구를 제작하고 직접 석물을 운반했던 좌우수석소(左右輸石所), 능소의 건물에 필요한 기와를 제작했던 번와소(燔瓦所)가 그에 해당한다. 능실 조성을 주도한 부서는 삼물소로, 명칭은 석회, 세사(細沙), 황토를 배합하여 만드는 석회인 삼물회에서 비롯하였다.19 이곳을 대표하는 장인은 사토장(莎土匠)이었다. 의인왕후의 산릉 의궤에는 삼물소에서 진행하는 한 달여의 작업 내용이 실려 있다.20

능실 작업은 정지 작업부터 봉분을 쌓는 성분(成墳)까지 이어진다. 순서는 대략 이러하다. 능실을 보호하기 위한 가건물인 옹가(甕家)를 만들고 광의 규격을 맞추기 위한 틀인 금정(金井)을 바닥에 설치한다. 광을 파고 나면 외재궁(外梓宮)을 내리고 시신을 모신 재궁을 지하로 들이는 길인 수도(隧道)를 조성할 남면 제외, 외재궁을 둘러싼 세 면에 격판(隔板)을 설치하고 보판(補板)으로 천장을 삼는다. 격판 바깥 광중의 흙벽을 다듬고, 남면을 제외한 동, 서, 북면과 천장의 네 면에 삼물을 시공한다. 삼물은 한 번에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척씩 바르되 총 23번을 행한다. 삼물을 바르는 작업이 끝나면 석난간(石欄干)을 포함한 능 주변의 석물을 설치하고 수도를 정비한다. 남면 제외 반원형으로 봉분 작업까지 완료하고, 발인한 재궁이 능소에 도착하면 수도를 통해 재궁을 외재궁 내에 안치한 후 능실의 남면과 남은 반원의 봉분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마무리한다.21

안온한 능실을 위해서는 삼물의 배합과 굳는 정도를 가늠해 작업하는 것이 중요했고, 시공은 사토장이 담당하였다.22 삼물을 잘 섞지 않으면 시공 후 석회가 갈라져 터지기도 했으며, 촉박한 시일 탓에 석회가 제대로 굳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봉분의 흙을 다지면 재궁을 모셔 놓은 지하공간이 무너질 위험도 있었다.23 한편, 봉분을 둘러싼 석물을 접착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삼물회는 성공적으로 시공되었을 경우 오랜 시일이 지나도 봉분과 병풍석이 빈틈없이 붙어 있게 할 정도로 견고했다.24

돌과 석회가 능실을 구성하게 된 경로를 따라가 보자. 석재의 경우, 천릉(遷陵)이라면 이전의 자재들을 재활용했지만 새로 조성하는 경우 부석처(浮石處)를 설치하여 석재를 조달하였고, 석재는 무게 때문에 가능하면 공사장 주변에서 채석하려 했다.25 먼저 산릉처가 정해지면, 석수(石手) 변수(邊首)들이 낭청(郎廳) 및 감조관(監造官)과 함께 채석처를 둘러보고, 현장에서 돌의 품질을 감정한 후 석편(石片)이라는 견본을 만들어 총호사(總護使)와 당상관(堂上官)에게 확인받아 부석소를 결정하였다.26 석장들은 돌의 품질을 감정하는 것은 물론, 작업 조건을 감안하여 돌을 채취해야 했다. 특히 겨울철에는 날이 춥고 땅이 얼어붙어 도구가 파손되기 쉬웠고, 해가 짧아 다른 계절보다 작업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대부석소 석수 이희선 등의 소장 내, “엄동설한 속 모든 역이 중하고 어렵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온갖 역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돌을 다루는 역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흙을 파서 돌을 캐내고 운반하는 일은, 심히 추운 날 짧은 해에 막중 막대한 역이 기한을 맞추지 못할 염려가 있기에, 저희들이 개인 철물을 각자 가져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상황을 본소에서 이미 헤아리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27

선초에는 중후기와 달리 통돌로 석실의 천장과 사방의 벽을 조성했기에, 석재를 주로 난간과 석상 등에 사용한 후기보다 거대 석재의 필요성과 부담이 컸을 것이다. 태조대부터 능실 조성에 필요한 개석을 운반하다 손발이 상한 사람이 89명이었으며, 단종대 문종 현릉 조성시 개석용 석재를 가지고 강을 건너다 물이 불어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기사도 확인된다.28 채석하는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이들은 태종비 원경왕후 헌릉 기준 개석용으로만 가공 후 대략 너비 2m, 길이 4.2m, 두께 0.9m가 될 석재 두 개를 흠 없이 채취해야 했다.

능실을 위한 석회는 어떻게 만들어져 어떠한 의미를 띠게 되었나? 조선에서는 석회석을 구워 다른 재료와 섞어서 다양한 종류의 석회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태조대부터 강화도에서 석회를 구웠다는 기록이 확인된다.29 조선 후기 관영 공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채굴된 석회석을 번회소(燔灰所)로 보내면 번회소에서는 회부(灰釜)라는 가마에서 돌을 구웠다. 이 작업은 회장(灰匠)이 맡았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석회는 니장(泥匠), 석수(石手), 사토장(莎土匠)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활용하였다.30 석회석을 구워 삼물회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우복집(愚伏集)』“번석회기사(燔石灰記事)”를 참고할 수 있다.

경신년 9월 숙부를 장사 지낼 때 여산(蘆山)에서 돌을 캐고 산기슭에서 돌을 구워 도마산(刀馬山)으로 운반하였다. 첫째 날에는 11명을 부려서 나무를 베어 바위를 태웠다. … 그 다음 날(사흘째-필자)에는 9명을 부려 돌을 부수어 약 120태(馱)를 얻었다. 그 다음 날에는 25명을 부려 나무를 베고 구덩이를 팠다. 그다음 날에는 18명을 부려 나무와 돌을 구덩이에 쌓고 구웠다. 4일간 부린 인부는 76명이었고, (돌을) 구운 뒤에는 소 60마리를 써서 날랐다. 경험자에게 듣기로, 돌을 구우면 본래 수량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이를 물로 일어 1태 당 돌가루 10두(斗)를 얻었는데, 태울 때 돌은 너무 많았고 구덩이는 너무 넓어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60태에서 대략 600두를 얻었는데, 쓰지 못하고 버린 것도 20태 정도였다. 경험자가 일전에 말하기를, 돌을 구워서 정제하면 1태 당 15~16두를 얻는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정말이었다. 석회를 시공할 때 『가례』의 법에 따라 사토(沙土)를 섞으니 600두가 족히 1000두는 되었다. … 31

석회석을 암벽에서 채취한 뒤 땔나무를 써서 구덩이에서 구워내어 석회를 얻고, 이를 황토, 세사와 섞어 삼물회를 만들었다. 석회를 구울 때는 원석에 열을 고르게 가하는 일이 중요했다. 인용문에서 경험자에 따르면 1태당 15~16두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정경세의 경우 1태당 10두를 얻었으니 일반적인 경우보다 적게 얻은 셈이었다. 그는 돌을 구울 때 원석의 양은 너무 많고 가마 역할을 하는 구덩이는 너무 넓어 열이 충분히 가해지지 않았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았다. 『북학의(北學議)』에도 유사하게 원석의 질을 판단하고 불을 조절하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는데32, 정경세 글에서의 “경험자” 그리고 『북학의』에서는 생략된 누군가가 자신의 몸으로 익힌 석회 지식을 사대부 지식인이 글로 남길 수 있도록 일러주었을 정황을 상상할 수 있다.

능에 쓰일 석회는 선공감(繕工監) 소속 석회장(石灰匠)이 담당하였고, 그 존재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부터 확인된다.33 정조대 『일성록(日省錄)』에는 석회장과 관련해 짧지만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선공감 소속 석회장 장한흥(張漢興)은 모리배들이 석회장의 지위와 기술을 도용했다고 상언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모리배들이 석회장 한 명의 이름을 끼워서 몰래 회계(灰契)를 만들고 자신들의 능침 회역(灰役)을 빼앗았으며, 이들은 오히려 석회를 팔면서 그것을 석회장으로부터 사들였다는 내용의 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34 이 기사는 석회장의 이름으로 보증된 기술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다양한 종류의 석회 중에서도 능실을 구성한 삼물회는 독특한 점이 있다. 다른 석회와 달리 삼물회의 재료 혼합비, 즉 석회3:세사1:황토1의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그 비율은 『가례』에 명시된 그대로라는 점이다. 후기 관영 공사에서의 석회를 검토한 연구에 따르면, 석회 기반 미장재는 삼물회 이외 각종의 건물에 사용하는 유회(油灰), 양상도회(樑上塗灰), 축중방(築中防)용 미장재 등이 있었으며, 이들 재료 혼합비는 시기에 따라 유의미한 편차를 보였다.35 이와 달리 삼물회의 재료 혼합비가 『가례』에 근거하면서 유달리 고정적이었다는 점은 삼물회 자체가 『가례』라는 전거를 가진, 망자를 위한 공간을 구성할 상징적인 재료였음을 의미한다. 3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삼물회의 접착성을 높이기 위해 시도된 것은 재료 혼합비의 조정이 아닌 느릅나무즙이라는 첨가물의 활용이었다. 기능의 향상을 위해 재료 혼합비의 조정이 아닌 첨가물을 고안해 낸 것은 재료 혼합비의 상징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삼물회는 의물로서 기능하기도 했는데, 능 조성시 삼물소에서 삼물회를 담은 작은 함과 삽을 마련하면 고위 관료들이 직접 보판 앞에 삼물회를 보태는 의식을 치렀다.36

신종의 가치를 구현하는 공간으로서 능실은 돌과 석회 등 재료의 속성과 그들 간의 조화에 기대고 있었으며, 재료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단연 장인들이었다. 다만, 사물을 토대로 하는 지식과 가치와 담론을 다루는 지식은 서로의 무대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이 거리 사이에 있었던, 사물과 담론 지식 모두에 발 딛고 있던 행위자로서는 기술관료를 들 수 있다.37 다음 장에서는 세종대 이천(李蕆, 1376-1451)의 사례를 통해 상이한 두 지식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었던 기술관료의 모습을 그려보자.

2. 석회의 부상: 세종대 기술관료 이천(李蕆)의 재료, 공간적 상상력

능실 논의는 실록상 태종대 태조 건원릉 조성에서부터 확인되지만, 구조를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은 세종대였다.38 당시 논의에서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배수와 방수, 지기와 체백의 문제가 다루어졌다. 본격적인 검토의 계기는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상이었다.39 세종은 기존 능실 구조에 불만을 제기하며, 능실의 완고함과 지기 소통의 사이에서 고민했다.40 시신이 쉽게 상하지 않도록 무덤은 당연히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지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시신의 보존만을 목표로 한다면 석곽이나 석실을 단단히 조성해 완벽히 밀폐된 지하공간을 구축하면 될 테지만, 그렇게 되면 자칫 통하게 해야 할 지기마저도 막아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불만의 중심에는 돌의 물성이 있었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돌의 견고함은 당대인들에게 신뢰와 함께 딜레마도 안겼다. 돌이라는 재료 위에서 제로섬(zero-sum)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완고함과 지기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신료들은 먼저 바닥에 시선을 두고 해결책을 생각했다. 제기된 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하연 등은 너른 돌 하나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석상을 두어 재궁을 모시자 했다. 이하 이천이 제기하는 배수장치도 함께 사용하자고 덧붙였다. 둘째, 이천은 재궁이 놓일 근처는 석체(石砌), 흙, 다리 없는 나무상으로 조성하되, 석체 바깥은 돌을 깔자고 하며, 구리관을 활용해 석실 바깥으로 배수가 될 장치도 함께 제안했다.41 다른 신료들은 이 두 가지 안에 기대어 의견을 제시했는데, 대체로 이천(李蕆, 1376~1451)이 고안한 배수장치를 인용하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정녕이 의논하였다. “지기(地氣)는 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의 밑바닥에 너른 돌을 쓰는 것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어효첨, 안지귀 등이 의논하였다. “너른 돌과 석상은 물을 방지하는데 실로 좋고 유익합니다. 다만 사람은 지기를 받아 태어나며 체백은 흙에 의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입니다. 만약 오랜 뒤에 황장(관곽-필자)이 썩어 (체백이) 돌 위에 놓이게 된다면 이치상 미안함이 있습니다. 너른 돌과 석상은 쓰지 말고 오직 삼물을 써서 다지되 황장목으로 만든 다리 없는 상을 두십시오. 배수에 있어서는 다만 문비석 바깥 면에 수도를 뚫고 동관(銅管)과 삽동(鈒銅)을 쓰기를 이천의 논의와 같이 하십시오.” 정식의 의논도 어효첨과 같았다. 다만 삼물을 쓰지 말고 흙을 써서 다지자고 하였다. 상이 일렀다. “의논한 바가 모두 타당하나, 지금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하여 이승손, 강석덕, 어효첨 등에게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42

신료들은 하연 등의 돌만을 사용한 안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외부의 것들을 막는 데에는 유용하나, 그만큼 지기도 통하기 어렵고 본래 체백이 의지해야 할 흙과는 멀어진다고 여겼다. 한편, 이천의 다리 없는 나무상과 배수장치는 습기, 지기, 체백을 함께 고려했을 때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듯, 신료들 대부분이 자신의 안에 활용했다. 어효첨 등은 제시된 두 안에 대해 지기와 체백의 이론을 따져본 후 이천의 안에서 바닥만 삼물회로 바꾸자는 대안을 제시했고, 정식은 바닥만 흙으로 바꾸어 쓰자고 했다. 이들의 주장과 결론에서 주목할 점은 완고함과 지기의 딜레마가 더 이상 문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딜레마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었을지를 논의에서 활용되었던 재료와 장치들을 통해 추론해보자. 애초에 세종의 말과 하연 등의 안에서는 돌이라는 단일한 재료에 집중했기에 완고함과 지기를 상충하는 가치로서 생각하거나, 구체적인 안에 있어서도 완고함과 직결되는 습기의 방지에 착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천이 본인의 안에서 복수의 재료를 활용해 완고함을 위한 장치와 지기를 위한 장치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음을 보이고, 신료들도 그를 인용하면서 완고함과 지기는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나무상과 배수장치는 그 핵심적인 장치이다. 석상과 달리 관곽과 같은 나무로 만들면서도 다리를 없애 땅과의 거리를 최소화한 나무상, 그리고 습기의 방지보다 배출을 우선으로 하는 배수장치의 조합은 지기와 완고함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시기 바닥 형태의 독특함은 이전 왕릉의 구조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다. 태조 건원릉, 태종비 원경왕후 헌릉,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는 <표 2>와 같다.

표 2 건원릉, 헌릉,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 [출처: 신지혜, “조선 세종대 삼물회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문화재』 55:1 (2022), <그림1>, <그림5>, <그림7>]

건원릉 내부 추정도 헌릉 내부 추정도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
표 2 건원릉, 헌릉,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 [출처: 신지혜, “조선 세종대 삼물회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문화재』 55:1 (2022), <그림1>, <그림5>, <그림7>] 표 2 건원릉, 헌릉,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 [출처: 신지혜, “조선 세종대 삼물회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문화재』 55:1 (2022), <그림1>, <그림5>, <그림7>] 표 2 건원릉, 헌릉, 이천의 안(영릉) 내부 추정도 [출처: 신지혜, “조선 세종대 삼물회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문화재』 55:1 (2022), <그림1>, <그림5>, <그림7>]

이상의 추론은 신료들의 이론적 사고가 재료와 공간을 결정했다기보다, 기술관료의 재료와 공간에 대한 감각이 신료들의 이론적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음을 말해준다. 논의의 흐름상 신료들이 지기와 체백을 따지는 것은 하연과 이천의 기본적인 안이 제기된 이후의 일이었다는 점도 주목되는데, 신료들의 이론적 사고의 폭이 재료와 공간이 언급되는 정도에 기대는 바 적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이천의 안이 채택되고 『세종실록』 오례에 전범으로 자리잡으면서, 그의 안이 이 시기의 사유를 대표하게 되었다.43

능실에 대한 새로운 구상들이 정리되는 건 그로부터 2년 뒤, 세종비 소헌왕후의 영릉을 조성하면서였다. 이번에는 방수와 배수, 지기와 체백의 문제가 바닥이 아닌, 석실과 석곽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었다.44 석실이 기대와 달리 방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논의에 앞선 권규(權跬, 1393~1421)의 이장 과정에서 확인되었다.45 이에 세종은 방수를 위해 새로운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석곽을 제안했다. 석곽은 당시 전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태종비 원경왕후와 태종의 장사에서는 소나무로 만든 곽을 썼고, 이보다 앞서 세종 자신도 그의 수릉(壽陵)에 대해 나무로 곽을 만들 것을 전제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46 정황상 세종은 목곽의 관행을 의식하면서도 석곽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2년 전의 논의에서도 석곽을 언급했으나 별다른 동조를 얻지 못한 반면, 석실이 완벽한 방수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을 확인한 현시점에는 석곽을 적극 도입하려 한 듯하다. 그는 석곽을, 통돌의 내부와 밑바닥을 비워 관을 둘러싸는 벽체처럼 만들고 덮개를 따로 만들어 쓰자는 안도 직접 제기하며 자신의 지향을 뚜렷이 했다.

신료들이 석곽 사용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약한 우려를 표명하는 데에 그쳤다면, 이천은 정면으로 반박하며 석곽은 쓰지 말고 석실을 견고히 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래의 인용문이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우의정 하연이 아뢰었다. “왕비의 장사에는 마땅히 석곽을 써야 합니다. 집 짓기에 비유하자면,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면 기둥은 썩지 않고, 땅에 세우면 매우 쉽게 썩는 것과 같습니다. 또 옛사람은 말하기를,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천이 아뢰었다.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말뜻이 반드시 관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 석곽을 써야 함을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정인지가 아뢰었다. “만약 석곽을 쓰면, 내관이 다 썩고 나서는 유골이 돌 위에 있게 되니 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 이천이 아뢰었다. “만약 석관으로 재궁을 덮으면 만일의 변고가 있어도 문제를 파악할 수가 없고, 또 가운데를 비우고 밑을 없애는 경우 큰 돌이 재궁을 누르고 있는 격이니 (돌이) 부서질 경우가 염려됩니다. 지금 석실을 만들되 매우 견고하게 한다면 수기(水氣)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 ” 마침내 이천 등의 논의에 따랐다.47

하연은 석곽을 주춧돌에 비유하여 왕의 선호를 뒷받침하였고, 정인지는 석곽을 쓰면 목관이 부패한 후 유골이 돌 위에 놓이게 될 것을 염려하는 정도였다. 반면, 이천은 석곽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세종의 안과 같이 애매하게 석곽을 쓰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과감히 비판하였다. 그는 대안으로 석곽 없이 석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자는 길을 제시했다. 석실을 완전하게 조성하면 물기가 아예 스며들 수 없으니 배수나 방수를 위한 장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석곽을 사용할 경우의 걱정들도 사라질 것이었다. 구체적인 결론은 한 달 뒤 산릉도감의 이름으로 제시된 안에서 확인되는데, 석실을 삼물회와 숯가루로 둘러싼다는 안이 채택되었다.48 최종적으로 소헌왕후 능제를 기록한 기사에서는 삼물회와 숯가루로 “가운데는 높고 사면은 낮은 것이 엎어 놓은 가마솥의 형상과 같게 하면 물이 스며들더라도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석실 사방을 삼물회로 두른 이유가 방수 때문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49

소헌왕후 능제 속 삼물회와 숯가루의 사용법은 『가례』의 회격 조성 방법과 같다. 기왕의 석실과 『가례』의 회격이 함께 사용된 것이다. 이처럼 석실과 회격을 섞어 쓰는 방법은 이전 왕릉에서 시도된 적 없다. 비록 조연이긴 하지만, 석실만이 주연이었던 왕릉에 회격이 실제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실록상 이천이 석실을 견고히 만들자고 제안한 이후 어떠한 논의가 이어졌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선 논의에서 석곽 주변을 맴돌던 세종과 신료들의 시각을 이천이 석실 전체로 확장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회격이 왕릉에 들어설 여지도 이 넓어진 시야 위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회격이 호출된 이유가 석실의 방수 효과를 높이기 위함에 있다고 한다면, 회격과 석실 사이의 연결은 의미심장하다. 방점은 여전히 석회가 아니라, 돌의 견고함에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언급한 것처럼 길천군 이장 과정에서 석실은 방수를 위한 완벽한 답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논의에서 석곽과 석실이 대안의 핵심으로서 다루어진 것을 보면 돌의 견고함은 논자들에게 여전히 신뢰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돌의 견고함을 어떻게 당대인들의 기대만큼 살릴 수 있을지였을 것이다. 이천이 제기한 방향성도 결국 이처럼 돌의 견고함을 살리는 방안이었지만, 동시에 『가례』의 전거를 그 어느 때보다 직접적인 실천으로 잇는 것이기도 했다.50 이는 『가례』 회격의 물성이 기존의 석실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단절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석실과의 연계 위에서 사유되었음을 의미한다.

산릉도감의 결론은 『가례』의 전거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 실제의 효용도 갖추었다. 예종대 영릉의 천장을 위해 능을 열었더니 지하공간에는 물기가 없고 관과 부장품이 새것 같았다는 후일담은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이었음을 말해 준다.51

3. 예종대 회격릉(灰隔陵)을 구현한 이들과 『가례(家禮)』

세조는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이나 석곽은 쓰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내렸고, 예종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능실은 다시 큰 변화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52 당면한 시점까지 왕릉에서 석실은 당연한 존재였기에, 석실 없는 능실은 신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은 석실을 쓰지 말라는 유명의 본의는 능 자체를 화려하게 만들지 않는다에 있다고 해석하고, 석실은 쓰되 능 외부의 석물을 줄이자고 했다. 이들은 세조의 유명은 검소한 덕, 민폐를 줄인다는 덕목을 지닌 것이지만, 현실에서 석실의 견고함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달리 없다고 여겼다. 대신들이 석실을 옹호하며 제기한 주장은 네 가지이다. 첫째, 선유(先儒)들이 회격을 말했지만, 실상 그들은 석실을 바랐으나 역부족하여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석실을 쓰지 않으면 부장품을 묻을 곳이 부족해진다. 셋째, 석실에 관해서 지기를 막고 배수가 원활하지 않을 것을 문제시하지만, 바닥돌만 두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다. 넷째, 석실이 지맥을 상하게 할 것을 걱정하지만, 회격릉도 재궁의 사방에 목판을 쓰니 지맥을 상하게 하는 건 마찬가지이다.53

석실이나 석곽을 쓰지 말라는, 구체적인 대안도 없는 유명이 어떻게 곧바로 『가례』의 회격으로 연결되었을까? 대신들의 입장에 기대어 추론해 보면, 당시 석실을 쓰지 말자는 왕의 뜻에 동조하여 석실의 대안으로서 회격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신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례』에 근거하여 선유들은 회격을 선호했다는 지적과 함께, 석실의 단점으로서 신숙주 등의 발언에서 보이는 공역의 과도함, 지기 유행 및 수기 배출의 어려움, 지맥의 손상을 지적한 듯하다.54 인용문 중 신숙주가 지맥 손상을 이야기하며 재궁의 사방에 목판을 설치한다고 한 것은 『가례』에 명시된 회격묘의 구조와 같으므로, 이들은 당시 『가례』를 기준으로 회격릉을 구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신들은 석실의 유용성을 강조했지만, 그들이 언급한 구체적인 안은 바닥돌뿐이었다. 앞선 세종대 논의에서 능실 바닥에 돌이 아닌 다양한 재료를 조화롭게 사용하자는 생각들에 비하면 제안이 단순하다.

대신들 제안의 수준과 무관하게, 석실에 비해 회격의 가능성이나 유용성에 대한 의심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석실을 쓰자는 주장을 제기한 지 엿새 만에, 석실을 쓰지 않기로 했기에 역부를 기존 6천 명에서 3천 명으로 줄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55 최종적으로 기록된 세조의 장례 의주[遷奠儀]에는 석실을 사용했던 이전의 의주와 비교해 부장품을 묻는 장소가 바뀌었으며, 일부 절차 또한 변경되었다.56 그로부터 1년 뒤, 소헌왕후와 세종의 영릉을 천장하면서는 세조의 광릉과 같이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 않기로 하기까지 했다.57 단기간에 큰 사안이 결정된 셈인데, 실록 상 신료들의 뾰족한 해결책은 확인할 수 없다. 의심이 실천으로 이어진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행위자를 그려볼 필요가 있다.

고고학 발굴 상으로는 고려 후기부터 묘에 석회를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며, 실록 상으로도 세종 즉위 초부터 신료가 사망하면 조정에서 석회를 부조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58 앞서 소헌왕후의 영릉을 조성하면서도 석실을 둘러싼 삼물회를 시공한 바 있었다.59 그렇다면, 이처럼 급작스러운 결정과 시행에는 석회를 썼던 묘나 전례의 경험으로부터 유의미한 방안을 도출할 수 있었던 전문가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존재와 기여를 상상하기 위해 『가례』, 『가례집람(家禮輯覽)』,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이하 본문에서 “선조 천릉도감”이라 명명)에 등장하는 회격 조성 방법을 비교해 보자.60

『가례집람』과 선조 천릉도감에는 『가례』에 명시된 것보다 더 구체적인 시공법이 담겨 있다. 『가례』에는 삼물회의 비율, 삼물회와 숯가루의 활용, 격판의 사용법만이 명시되어 있지만, 『가례집람』과 선조 천릉도감에는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구체적인 시공법, 그리고 삼물회에 일종의 접착제를 첨가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헌 내용 간 차이점부터 짚어보자. 먼저 시공법이다. 『가례』에서는 바닥을 조성한 후 벽을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반면, 『가례집람』에서는 땅을 거푸집처럼 활용하여 벽을 조성한 다음 바닥을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가장 먼저 광 바닥 사방에 도랑을 만들어 도랑의 시공을 마친 후 관이 놓일 중심부를 작업했는데, 사방 도랑의 깊이가 4~5척, 중심부의 바닥 두께가 3척이 되도록 하므로 사방 도랑의 1~2척 정도가 관을 둘러싼 벽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김장생은 이 방법을 인용하고서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간이한, 회격의 옛 제도의 경우 먼저 광을 파고 바닥을 만든 다음에 벽체를 축조하는데, 그 법이 공력을 쓰는 데 어려움이 있고, 견실하지도 않다. … 이 법(벽 조성 후 바닥을 만드는 방법-필자)은 가장 간략하고 합당하면서도 견실하다. 이는 내가 사람들이 축조하는 것을 직접 본 것이다.”64

『가례』에는 명시되지 않은 석회를 굳히는 정도와 횟수, 그리고 찹쌀풀이나 느릅나무즙과 같은 접착제도 짚어 보자. 『가례집람』에는 삼물회를 한 번에 1석씩 시공하며 찹쌀풀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선조 천릉도감에는 하루 최대 두 번, 1회에 70석 혹은 96석씩을 부어 열흘간 18번 반복하며, 느릅나무즙을 접착제로서 활용한다고 하였다. 접착제로서 찹쌀풀은 명의 『천공개물(天工開物)』(1637)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느릅나무즙은 독특하다.65 느릅나무즙은 세종대 소헌왕후 영릉 축조 당시부터 삼물회 제작에 활용되었으며, 이는 예전부터 장인들의 경험에 기대어 사용해 온 것으로 벌레가 생길 우려가 있지만 석회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다고 여겨졌다.66

『가례집람』에서 김장생이 시공하는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 점, 그리고 왕릉의 회격 시공은 사토장들이 맡았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가례』에 명시되지 않은 접착제의 활용과 구체적인 시공법 등의 지식은 시공자들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67 특히 『가례집람』의 경우는 시공자들의 자체적 기술이 사대부의 문헌적 지식과 결합하여 활용된 정황을 보여준다. 이 두 사례는 비록 예종대와 시기상 간극이 있지만, 세종대부터 느릅나무즙을 활용했다는 점, 그리고 근래 발굴된 중종대 장경왕후의 초장지(初葬地)인 구희릉(舊禧陵)이 후기 의궤 기록에서 확인되는 회격릉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중기의 시공자들은 실상 그 이전부터 활약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68 예종대 대신들의 반대에도, 그리고 실록 상으로는 분명한 대안이 보이지 않음에도 석실릉이 회격릉으로 무리 없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시공자들의 지식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보인다.

다만, 일부 문신들은 회격이 갖는 분명한 전거와 기술적 뒷받침에도, 회격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은 광릉의 봉분이 무너질 때마다 재차 석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광릉은 석실은 물론 봉분을 둘러싼 사대석(莎臺石)까지도 쓰지 않았기에 다른 능보다 봉분이 유독 자주 무너졌다.69 이때마다 문신들은 사대석은 물론 석실을 되살리자고 했다. 제왕의 능실에는 예로부터 석실과 사대석을 써왔으니 이들을 쓰지 않는다는 세조의 유명은 영구한 계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70 하지만, 이러한 의심을 일정 정도로 제한하며 능에 얽힌 『가례』의 전거를 유지하게 한 건 회격릉의 경험 그 자체였다. 한 번 조성된 회격릉은 석실릉이 허용되기 어렵게 했다. 문신들은 세조의 유명에 따른 회격릉은 영구한 계책이 아니라는 과감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말끝에 “지금 고칠 수는 없다”라고 하며 스스로 입장을 유보하기도 했고, 이러한 비판 자체가 논의에서 유의미하게 수용되지 않았다. 회격릉으로서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조 광릉의 존재에 논자들은 자신의 의심과 비판을 한풀 꺾어야 했고, 회격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다른 해결책, 즉 능실 위의 구조물이나 봉분의 크기 조절 등을 생각해 내야 했다.71 그 존재로서 전거의 무게를 유지하던 회격릉은 이후의 왕릉 조성에서 재현되다가 영조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원칙으로서 기재되었다.72

태종대부터 예종대까지 이어진 능실 논의는 조선 초 의례 정비의 어떠한 측면을 보여주는가? 이전까지도 벽체를 다듬는 데 주로 활용되었던 석회가 벽체의 중심이 되기까지 『가례』는 중요한 전거로서 역할했다. 일부 신료들도 그에 높은 신뢰를 보이며 지속적으로 언급하여 석회가 공식적인 논의의 장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석실릉에서 벗어나 회격릉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도 돌은 존귀한 이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 최적의 재료로서, 그 물성은 신종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고 여겨졌다. 또, 『가례』에서는 석회를 써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조선 초의 현실에서 돌이 견고한 위상을 지녔던 것에 비해 『가례』와 일부 신료들의 석회는 그에 필적할 수준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석회의 수준을 높여 돌의 우위에 서게 하는 데에는 기술관료와 장인들의 공이 컸다. 이천은 바닥과 석곽을 중심으로 재궁 근처에 머물던 임금과 신료들의 시야를 석실 전체로 넓힘으로써 석회가 우선은 보조적인 벽체로서 기능할 수 있게 했고, 시공자를 비롯한 장인들은 석회의 시공법이나 첨가물로서 느릅나무즙과 같은 그들만의 지식을 제공하여 석회가 벽체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이처럼 다양한 행위자의 노력으로 구현된 회격릉은 석실릉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이후 왕릉에서 재현되며 전범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조선 초 문물제도의 정비에서 『가례』와 같은 주요한 문헌의 지식이 조선의 현실에 유의미한 것으로 포착, 구현되는 데에는 그 문헌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했던 신료들만큼이나, 문헌 밖의 지식을 다루던 이들의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기술과 기술자들은 문헌과 신료들이 자신들의 구상이나 지향을 위해 포섭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전자들은 후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가치를 상상할 길을 제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맺음말

의례 연구에서 이상과 현실의 이분법은 흔히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설명하기로, 문헌에 가지런히 정리된 것들이 따라야 할 이상이라면, 가지런하지 않은 현실은 당대인들이 이상을 추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임금과 신료, 문헌이다. 필자는 서두에서 주인공을 다르게 설정한다면, 이 이분법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해 볼 주제로는 장사, 능실을 잡았으며, 기술관료와 장인들, 그리고 가능한 만큼 사물과 장소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자 했다. 1장에서는 능실 논의를 분석하기에 앞서 왕릉 조성과 관련된 장인들의 기술, 그리고 관련한 돌과 석회의 물성을 다루었다. 2장에서는 세종대 기술관료 이천이 자신만의 재료와 공간에 대한 감각으로 능실 바닥과 벽체 구조의 방향성을 제안했고, 이것이 신료들의 이론적 사유를 유연하게 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감각이 『가례』의 회격이 비록 일부이지만, 능실에 직접 적용되도록 했다는 점을 보였다. 3장에서는 예종대 회격릉 논의에서 회격릉의 온전한 실천을 이끌고 지탱한 주인공들로서 이름은 남아 있지 않은 장인들과 그들이 조성한 회격릉 공간 자체에 주목했다. 이상의 서사에서는 임금, 신료, 문헌을 주인공으로 할 때보다 이상은 흐릿해지고, 현실이라 지칭되기도 했던 문헌 밖, 비-유학적인 내용들은 기존 이상과의 대립쌍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더 크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기술과 사물의 기여로써 『가례』의 실천이 가능했고, 궁극적으로 신종의 구현에는 이들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은, 의례 내의 가치가 다양한 만큼이나 이질적인 행위자들 덕에 비로소 형상과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행위자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은 의례 정비와 행례의 공을 임금과 신료들에게만 돌리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수많은 행위자가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의례 논의의 핵심을 학문이나 권력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보다 넓은 지평에서 의례를 더 풍요롭게 설명할 여지를 열어 준다.

옹가(甕家) [출처: 翼宗綏陵遷奉都監儀軌]
그림 1 옹가(甕家) [출처: 翼宗綏陵遷奉都監儀軌]
퇴광(退壙)과 난간석(欄干石) [출처: 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文化財』45:1 (2012), 62, 그림 6]
그림 2 퇴광(退壙)과 난간석(欄干石) [출처: 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文化財』45:1 (2012), 62, 그림 6]
태안군 이팽수 회격묘 발굴 과정 및 유구 실측도 [출처: 김우림,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 2016), 223-224.]
그림 3 태안군 이팽수 회격묘 발굴 과정 및 유구 실측도 [출처: 김우림,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 2016), 223-224.]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① 천광 및 외재궁 설치 ② 외재궁 주변 격판 및 보판 설치 ③ 삼물회 및 숯 시공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표 1 舊禧陵 회격 축조 방법 추정도 [출처: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 방법”, 『한국학』 32:3 (2009), 327-329쪽, 그림 6-그림 11]
④ 재궁 봉안 ⑤ 재궁 봉안 후 마감

표 3 『가례』, 『가례집람』, 『선조목릉천릉산릉도감의궤』 회격 조성 방법 비교

『가례』 치장(治葬) 『가례집람』 치장 (1559년 편찬, 1685년 간행)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삼물소(三物所) (1631)

1. 광 바닥에 재 2~3촌(寸), 삼물회 2~3촌을 깐다.

2. 관이 놓일 곳의 네 면에 얇은 판을 놓아 곽의 형상처럼 만든다. 판 안쪽에는 역청(瀝靑)을 바른다. 벽체는 관보다 4촌 정도 높다.

3. 곽 형상의 판 바깥쪽 네 면에 판을 한 겹 더 설치하는데, 곽과 가까운 쪽에는 삼물회를, 바깥쪽에는 숯가루를 둔다.

4. 삼물회가 굳으면 그 판을 위로 뽑아올려 삼물회와 숯가루를 반복해서 쌓고, 곽 형상의 판과 높이가 같아지면 작업을 그친다.

5. 관을 내린 후 곽 형상을 한 판의 벽체와 네 면이 꼭 들어맞는 얇은 판을 영구(靈柩) 위에 놓고 유회(油灰)로 틈을 메운다. 그 위에 역청을 부어 굳힌 후 그 위에 외판을 하나 더 덮는다.

6. 외판 위에 삼물회를 깔고 숯가루를 그 위에 펴는데, 각각 그 두께가 바닥과 사방의 배가 되도록 한다.61

1. 광을 3척(尺)가량 파고 바닥을 평평하게 한다.

2. 바닥에 관을 놓을 곳을 제외하고 사방에 도랑을 판다. ‘母’자형이 되도록 한다.도랑 너비는 2척, 깊이는 4-5척으로 한다.

3. 도랑 안에 숯가루를 펴고, 삼물회를 찹쌀풀[糯米煎汁]을 활용해 반죽하여 붓는다. 1석(石)씩 나누어 붓고, 마지막으로 숯가루를 편다. 중심 부분과 높이를 맞춘다.

4. 도랑 안쪽인, 중심 부분을 파내고 바닥을 축조하되 두께는 3척이 되도록 한다.

5. 이어 아래에 얇은 판자를 (바닥과 네 면에) 두고 판자가 맞닿은 부분에 유회를 바른 후 찹쌀풀로 갠 정회(淨灰)를 사방에 바른다.

6. 하관한 후에는 두꺼운 판자로 위를 덮은 다음 회를 붓고 가볍게 밟아 물고기 등 모양이 되도록 한다.62

1. 외재궁을 내리기 전 별문석(別紋席), 남초선(藍綃縇), 지의(地衣), 능단욕(綾段褥), 화문석(黃花紋席) 등을 광중에 깐다.

2. 외재궁을 내리고 남면과 천장을 제외한 삼면에 격판(隔板)을 설치한다. (보판(補板)을 천장으로 삼는다.)

3. 격판 바깥에는 작은 격판을 활용해 재궁(梓宮)과 가까운 곳에는 삼물회, 바깥쪽에는 숯가루를 붓는다.

4. 삼물회는 석회 3두(斗), 세사와 황토 각 1두의 비율로 하고, 유근피수(柳根皮水)를 섞는다.

5. 열흘간 석회는 18번, 숯가루는 6번 시공한다. 작은 격판의 높이만큼 쌓고 석회가 굳으면 격판을 올려서 마저 쌓아 나간다. (석회는 하루에 최대 2번 작업하였다.)63

ㆍ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부여하였다.

ㆍ의궤의 경우 날짜별 공역 내역이 기록된 것을 필자가 재정리하였다.

감사의 글

본 논문은 2025년 10월 20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BK21 교육연구단에서 주최한 2025년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BK21 참여대학원생 성과발표회 “사물과 기술, 장인으로 보는 조선시대사”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원고를 읽고 조언해주신 문중양, 이정 선생님, 토론을 맡아주신 서은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좋은 기회를 주신 『한국과학사학회지』 편집진과 유용한 심사평을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들께도 감사드린다.

각주

  1. 1장지연, 『조선을 읽는 법, 단』 (푸른역사, 2025)
  2. 2『家禮』 卷4, 喪禮, 治葬: 【作灰隔】 … 程子曰: 古人之葬, 欲比化不使土親膚. … 惟欲不見而已, 又有求速化之說者, 是豈知必誠必信之義. 且非欲求其不化也. 未化之間, 保藏當如是耶. 이하 경전 인용에서 【 】 안의 내용은 대문, 나머지는 주석에 해당한다. 조선 초 능실 논의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도 임금과 신료, 그들의 유학적 소양, 정치적 요소를 중시했다. 관련한 연구로는 김상협, “조선왕릉 회격현궁 축조방법 연구”, 『건축역사연구』 21:4 (2010), 37-46; 신지혜, “조선 세종대 삼물회(三物灰) 도입에 따른 석실릉 구조개선과 의의”, 『헤리티지: 역사와 과학』 55:1 (2022), 223-242.; 안경호, “조선 능제(陵制)의 회격(灰隔) 조성방법 : 장경왕후 초장지(舊禧陵)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32:3 (2009), 297-332.; 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文化財』 45:1 (2012), 52-69. 등을 들 수 있다.
  3. 3이러한 유학적 바람의 표현으로서 신종(愼終)은 “끝을 삼간다”라는 뜻으로, 상례에서는 망자의 마지막에 예를 다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자세한 내용은 1장에서 다룬다.
  4. 4기술관료(technocrat)는 “과학적,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 행정과 경제, 사회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전문가 혹은 전문가 관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0961 (2025년 9월 2일 접속). 기술관료라는 용어와 연결된 전문가, 과학적 지식, 의사소통 구조 등을 전근대에 곧바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조정에서 누구보다 기술적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던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제한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5. 5대표적으로 장경희의 연구들을 들 수 있다. 그는 의궤에 등장하는 장인과 기술, 물품을 세심하게 탐구하였다. 본고와 가장 가까운 연구로는 장경희, 『국장과 부묘용 의물을 만든 조선의 장인』, (민속원, 2025)을 들 수 있다. 또, 김버들과 조정식은 일련의 연구에서 여말선초 건축가들을 조망하였다. 관련 연구로는 “고려말 조선 초 건축가 金師幸 조명”,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30:11 (2014), 125-134.; “15세기 건축감역관 이명민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31:10 (2015), 181-191.; “朴子靑의 궁궐건축 감역 연구-창덕궁 및 이궁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26:1 (2018), 93-104. 등이 있다.
  6. 6홍성욱, “제5장 인간과 기계에 대한 ‘발칙한’ 생각: ANT의 기술론”, 브루노 라투르 외, 홍성욱 편, 『인간, 사물, 동맹』 (이음, 2018), 142.
  7. 7Langdon Winner는 정치와 기술, 인공물(artifact)의 관계를 다루며, 기술적인 혁신은 도입을 전후하여 사회 제반의 관계와 구조를 형성, 재편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법적, 정치적인 토대를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Langdon Winner, “Do Artifacts Have Politics?”, Daedalus 109(1) (Cambridge: The MIT Press, 1980), 128.
  8. 8여기에서 사용하는 ‘이종적(heterogeneous)’이라는 표현은 ANT에서 가져왔다. ANT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요소를 동등한 행위자로 설명하며, 양자의 우연·가변적인 연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종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본고에서도 유학과 기술을 위시한 비유학적인 지식의 관계를 그와 같이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종성을 비롯한 ANT의 개념들에 대한 설명은 홍성욱, 앞 책을 참고하였다.
  9. 9국가 의례 정비에서 『가례』의 위상과 적용 양상에 관해서는 박윤미, “조선초기 국가의례 정비와 『가례(家禮)』” 『태동고전연구』47(2021), 71-96 참조.
  10. 10『太宗實錄』卷16, 太宗 8年 7月 26日 壬申.
  11. 11『太宗實錄』卷16, 太宗 8年 7月 9日 乙卯. 『지리신법』은 송대 호순신이 저술한 풍수지리서로, 조선에서는 음양과의 과시에 사용되었다. 기혈론은 혈자리를 분별하는 방법을 싣고 있는데, 그중 장지 선정의 내용이 있다.
  12. 12『太宗實錄』卷14, 太宗 7年 10月 8日 戊子: 今齊陵石室未成, 與平人無異, 實爲盛代之闕典, 而有司無有申請者, 殿下發於宸衷, 特令修造, 奉先之孝至矣.
  13. 13郭璞, 『葬書』內篇: 【葬者, 乘生氣也.】 生氣則一元運行之氣 … 陶侃曰: … 且夫生氣藏于地中, 人不可見. 惟循地之理以求之, 然後能知其所在. 葬者能知其所在, 使枯骨得以乘之, 則地理之能事畢矣.
  14. 14같은 사료: 山之不可葬者五, 氣以生和, 而童山不可葬也. … 氣因土行, 而石山不可葬也.
  15. 15각주 11;『睿宗實錄』卷1, 睿宗 즉위년 9月 22日 戊寅.
  16. 16체백 개념은 다음의 『서경』 구절에 근거한다. 『書經集傳』上, 卷1, 虞書, 舜典: 殂落, 死也. 死者, 魂氣歸于天, 故曰殂, 體魄歸于地, 故曰落.
  17. 17『世宗實錄』卷9, 世宗 2年 9月 4日 己巳; 卷106, 世宗 26年 12月 13日 丁巳.
  18. 18전나나, 앞의 논문, 53-54.
  19. 19문영식, “조선후기 山陵都監儀軌에 나타난 匠人의 造營活動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25.
  20. 20『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 各所應行條件, 三物所에는 경자년(1600) 11월 16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작업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1월 16일 整地 작업, 11월 26일 金井 설치, 11월 27일 穿壙, 12월 21일 梓宮 발인, 12월 22일 재궁 안치, 12월 26일 平土, 12월 29일 成墳.
  21. 21『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 各所應行條件, 三物所: 一開金井後, 十二月初三日巳時壙中畢鍊正, 午時三物始築, 每一築周尺一尺式, 限二十三度. 畢築, 石欄干始役. 第四日成墳, 翌日隧道堀土, 五日畢堀. 의인왕후 산릉 의궤의 경우 기록이 소략하여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1631)의 三物所, 사도세자 천릉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 『弘齋全書』卷58, 雜著5, 遷園事實二를 참조하였다. 연구서로는 원릉의 사례를 통해 산릉 조성 과정을 탐구한 정해득, 『조선 왕릉제도 연구』(신구문화사, 2013), 211-221을 참조하였다.
  22. 22『宣祖穆陵遷陵山陵都監』, 三物所: 初九日辰時, 左右補土始役, 莎土匠等分三物始役. 의인왕후 산릉 의궤 내 삼물소에는 사토장 변수 2명, 사토장 6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23. 23『顯宗改修實錄』卷27, 顯宗 14年 10月 13日 己酉: 上曰: 而至於石灰之役, 亦極無狀, 覆釜形縱橫坼裂者, 皆由於三物不善調和之致也.;『承政院日記』, 英祖 7年 4月 2日 甲午: 光佐曰: 諺云, 三年築址, 一年作室. 凡事必須寬限殫力, 然後可致完固, 而因山之役, 月限有制, 故或不能殫盡誠力矣. 況天灰未乾, 已試築土, 而逼近玄宮, 勢難緊築.
  24. 24『承政院日記』, 英祖 7年 7月 16日 丁丑: 淳又曰: 屛風石排設, 係是近百年所無之役, 而考見五禮儀, 則屛風內及像設諸石之下, 皆用三物填築. 又聞石工之言, 久遠陵寢屛風內, 多有築灰處, 而終無罅隙變動之事云.
  25. 25이상명, “조선후기 왕릉 부석처의 선정 과정과 부석처 조계동”, 『건축역사연구』26:3(2017), 52.
  26. 26『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下, 大浮石所: 山陵旣定之後, 十一月十七日, 郎廳, 監造官, 率石手邊首二名, 出往高陽地大沙器幕洞採石處, 看審後, 石片浮取, 看品于摠護使及堂上後, 入啓定奪, 仍設浮石所, 이상명, 같은 논문 참조.
  27. 27『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 辛酉二月二十五日: 大浮石所石手李希善等狀內, 嚴寒凡百之役, 無非重難, 而百役之中最難者, 石役也. 凍地掘土, 採石伐出, 隆寒短晷, 莫重莫大之役, 恐有未及之患, 矣徒等私鐵物各自取用, 以補萬一之狀, 本所想已洞燭是白如乎.
  28. 28『太祖實錄』卷10, 太祖 5年 9月 28日 癸未;『端宗實錄』卷2, 端宗 卽位年 8月 16日 丙子. 원경왕후 헌릉의 개석을 기준으로 석재의 무게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헌릉의 개석은 두 개로, 각각 너비 8척, 길이 14척, 두께 3척이다. 『世宗實錄』卷9, 世宗 2年 9月 16日 辛巳. 능 조성시 기준척은 영조척인데, 尺 ‘ 갌 걍 로 가정하자. 능에는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며, 현재 통용되는 화강암의 밀도는 2.65~2.75g/㎤이다. 지질학백과, “화강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145191&cid=61234&categoryId=61234 (2026년 2월 20일 접속). 화강암 밀도를 중간값인 2.7g/㎤로 두면, (8×30)×(14×30)×(3×30)×2.7 = 24,494,000(단위: g)으로 개석 하나의 무게는 약 24t이다. 개석을 두 개 쓴다면 그 용도로만 약 48t의 돌을 운반해야 하는 셈이다. 참고로 현대의 화물트럭이 24t이다.
  29. 29『太祖實錄』卷8, 太祖 4年 9月 17日 戊申.
  30. 30김은경·강소영, “조선 후기 관영공사에 사용된 석회 용어 및 공법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38:5(2022), 86. 조선 석회가마 유적에 대한 연구로는 이동준, “조선시대 석회가마 연구”, 『사학지』42(2011), 65-99. 참조.
  31. 31『愚伏集』卷14, 雜著, 燔石灰記事: 庚申九月葬叔父時, 伐石于蘆山, 燔于山底, 運致于刀馬山. 初日役十一人, 伐木燒石崖. … 次日役九人碎下, 約得百二十餘馱. 又次日役二十五人伐木掘坎. 又次日役十八人, 積木石于坎中而火之. 凡四日用役夫七十六人, 旣燔後用六十牛輸之. 嘗聞更事者言, 燔石輕於本數一半, 果然矣. 以水發之, 則每馱得石屑十斗, 蓋緣燔時石太多坎太廣, 不能盡熟故也. 六十馱凡得六百斗, 其不起而棄者約又二十馱. 更事者嘗言, 燔石而熟, 則一馱得屑十五六斗, 亦信矣. 築灰時依家禮式和沙土, 則六百斗恰成千斗.
  32. 32『北學議』上, 甓: 煉灰之石, 或靑或白, 欲密理而色潤, 否者疏而不昵. 煉之以薪或石灰[炭]焉, 火不絶二日有半而後足. 試之法, 先取一石權之, 襍衆石而煉之, 旣成而出之權之, 損其初三分之一, 此石質美而火齊得也.
  33. 33『經國大典』工典, 京工匠.
  34. 34『日省錄』正祖 24年 1月 19日 壬申: 繕工監石灰匠張漢興等上言以爲: 近者, 牟利奸細之類, 暗作灰契, 移奪渠等陵寢進排之役. 甚至於亂賣石灰, 自以爲買得於渠等, 僞造文券, 其中果有灰匠一人之名. 文券眞假, 到今不必索言, 準價還退則自可無是非之紛紜. 伏乞特令從文券本價還退.
  35. 35김은경·강소영, 앞의 논문, 87-91. 이 연구에 따르면, 재료의 부피비에 있어 삼물회는 유의미한 정도의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유회, 양상도회, 축중방용 미장재의 경우 개별 재료의 부피비가 많게는 2~3배의 차이를 보였으며, 저자들은 이들 석회에서 재료비 조절을 통한 혼합비 개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36. 36『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三物所: 一右議政再下壙中, 三物所郎廳盛三物於小函, 進于右議政前, 右議政以小鍤取三物各三鍤, 置於補板前三處而出.
  37. 37Hyeok Hweon Kang은 조선 군영의 사례를 통해, 중간 계층으로서 군관들이 상위 계층의 가치, 담론적 지식과 하위 계층의 경험적 지식을 결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 정체성을 구사했음을 보였다. Hyeok Hweon Kang, “Chapter 4 Skilling Up: Military Officers and Middle Epistemology” in “Crafting Knowledge: Artisan, Officer, and the Culture of Making in Chosŏn Korea, 1392-1910”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2020), 155-203.
  38. 38이하에서 사용하는 관, 곽, 실의 정의는 아래와 같으며, 내용은 권오영, “喪葬制와 墓制”, 중앙문화재연구원 편, 『동아시아의 고분문화』 (서경문화사, 2011), 49에서 인용하였다.

    관(棺, 널): 직접 유체를 매납한 단순한 형태의 매장시설, 일반적으로 상자형이다.

    곽(槨, 덧널): 관과 일부 부장품을 수납하는 매장시설로서 장방형 혹은 정방형의 상자형이다.

    실(室, 방): 관(곽)을 수납한 매장공간이자 제사의 공간, 부장품 수납의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실용성이 있는 무덤문을 설치하여 내외가 통하는 것을 추구한다.

  39. 39『世宗實錄』 卷106, 世宗 26年 12月 8日 壬子.
  40. 40『世宗實錄』 卷106, 世宗 26年 12月 13日 丁巳.
  41. 41같은 기사: 演, 宗瑞, 承孫, 碩德等議: 兩室中, 各鋪全廣石, 以防水潤. 廣石上面, 鑿水道, 通于門扉石外, 使水氣不得停滯, 仍置石床高五寸許, 廣準外器之廣, 乃安梓宮于其上. 其門扉石外水滲之術如蕆議. 李蕆議: 壙底圍以石砌, 實土築之, 高若干許, 與石砌平而止. 上置黄腸無足床, 以安梓宮. 若滲水則從石砌四面, 至旁石隅石滿, 鋪薄石. 於薄石上刻水道, 達門扉石外, 承以銅管以引水. 管中實碎石, 管端置薄鈒銅, 以防蟲蛇. 又以銅壺承鈒銅下以停水. 如此二三節, 然後堀坎填石, 以滲水爲便.
  42. 42같은 기사: 李正寧議: 地氣不可不乘. 壙底用廣石, 甚爲未便. 魚孝瞻, 安知歸等議: 廣石及石床, 於防水固爲便益, 但人受天地之氣以生, 體魄依土, 是理之常也. 若於萬世之後, 黄腸朽依於石上, 恐有未安之理. 請勿用廣石及石床, 專以三物築之, 置黄腸無足床. 其滲水之方, 只於門扉石下面, 鑿水道, 仍用銅管鈒銅如蕆議. 鄭軾議, 與孝瞻同, 但勿(周)〔用〕三物, 用土築之. 上曰: 所議皆是, 然非今日可定. 命承孫, 碩德與孝瞻等更考古制以聞.
  43. 43『世宗實錄』 卷134, 五禮, 凶禮儀式, 治葬. 세종비 소헌왕후의 능제에도 이천의 안이 적용되었다. 『世宗實錄』 卷113, 世宗 28年 7月 19日 乙酉.
  44. 44『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4月 3日 庚子.
  45. 45권규의 “석실”은 실상 석곽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우림,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 2016), 276.
  46. 46원경왕후와 태종의 곽에 대해서는 『世宗實錄』 卷8, 世宗 2年 7月 24日 庚寅; 卷9, 世宗 2年 8月 8日 甲辰; 卷41, 世宗 10年 9月 12日 辛酉 참조. 세종 자신의 수릉 언급에 대해서는 『世宗實錄』 卷106, 世宗 26年 9月 3日 戊寅 참조. 『세종실록』 오례에도 목곽이 등장한다. 『世宗實錄』 五禮, 凶禮儀式, 治椑
  47. 47『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4月 3日 庚子: 右議政河演啓曰: 王妃之葬, 須用石槨. 比如作室, 立柱礎上, 其柱不朽, 立之於地, 其朽甚易. 且古人云: 無使土親膚. 李蕆曰: 無使土親膚者, 言當用棺槨, 非指爲石槨也. 鄭麟趾曰: 若用石槨, 而內棺朽盡, 骨棲石上, 竊恐有害. … 李蕆曰: 若以石棺覆梓宮, 萬一有變, 事不可測. 又若虛中無底, 用以大石壓之, 則恐有破碎之虞. 今當造石室, 極其牢固, 水氣焉能入侵? … 竟從蕆等之議.
  48. 48『世宗實錄』 卷112, 世宗 28年 5月 13日 庚辰.
  49. 49『世宗實錄』 卷113, 世宗 28年 7月 19日 乙酉: 依此周回築上於加置蓋石, 上中高, 四下如覆釜形, 如有滲水, 無停留之處.
  50. 50이러한 정황은 태종이 주도하는 논의에서 『가례』의 회격이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고 당위적으로 언급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석회를 바닥재나 접착제로 사용하는 데 그쳤던 분위기와는 대조된다. 『世宗實錄』 卷9, 世宗 2年 9月 4日 己巳; 16日 辛巳.
  51. 51『睿宗實錄』 卷3, 睿宗 1年 2月 30日 乙卯.
  52. 52『睿宗實錄』卷1, 睿宗 卽位年 9月 17日 癸卯.
  53. 53『睿宗實錄』卷1, 睿宗 卽位年 9月 22日 戊寅.
  54. 54심사 의견 중 회격릉과 관련된 공역의 간소화를 유의미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실로, 공역의 간소화는 예종대 회격릉을 주장한 논자들의 중요한 논거였고, 회격릉으로 전환하면서 역부가 줄었다는 기사 내용도 확인된다. 다만, 회격릉 조성 절차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설정할 것인지, 즉 예컨대 이전보다 더 많은, 양질의 회(灰)를 생산해야 하는 상황, 보다 넓은 시야에서 전반의 역이 어떻게 조절되었는지 등을 고려해서 당대 논자들 논거와 역부 규모 조정의 의미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차후 연구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55. 55『睿宗實錄』卷1, 睿宗 卽位年 9月 23日 己卯. 예종과 대신들이 석실을 두고 논의한 기사는 9월 17일부터 확인된다. 각주 52 참조.
  56. 56세조 국상의 천전의에서는 명기, 복완 등의 부장품을 난간 안의 좌우와 전면에 묻는다고 하였다.(『睿宗實錄』卷2, 睿宗 卽位年 11月 28日 甲申). 반면 그보다 앞선 문종과 의경세자의 국상에서는 문비석 밖에 편방을 만들어서 보관한다고 하였다. 『端宗實錄』卷3, 端宗 즉위년 9月 1日 庚寅; 『世祖實錄』卷10, 世祖 3年 11月 24日 甲申. 또, 석실을 쓴 앞선 국상들에서는 재궁 안치 후 “현실을 걸어 잠근다[鎖閉玄室]”라고 표현하는 반면, 세조 국상에서는 “수문을 닫는다[閉隧門]”라고 하였다. 회격을 사용할 경우 외재궁을 내려 회격을 조성한 후에 재궁을 들이기에 세조 국상에서는 능소에 도착한 후 재궁을 곧바로 수도를 통해 외재궁 내에 안치했지만, 석실을 활용한 앞선 국상들에서는 재궁이 능소에 도착한 이후에 재궁을 대관(외재궁)에 봉안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관련하여 최나래, “조선 초기 세조 국상 연구”, 『역사민속학』45 (2014), 171-175 참조.
  57. 57『睿宗實錄』卷3, 睿宗 1年 1月 3日 戊午.
  58. 58어원선, “조선시대 사대부 회격묘(灰隔墓) 연구”, 『역사문화논총』8 (2014), 157-163. 『世宗實錄』卷2, 世宗 卽位年 12月 25日 庚子. 실록 상으로는 태종 18년, 태종이 종친 이하의 예장에는 석실을 없애고 회격을 쓸 것을 명하였다. 『太宗實錄』卷35, 太宗 18年 1月 11日 壬戌.
  59. 59『世宗實錄』卷113, 世宗 28年 7月 19日 乙酉: 炭末所築東西各五寸, 石灰細沙黃土三物合築各四寸爲九尺. 幷石室東西外面相距二十尺, 爲二十九尺.
  60. 60『家禮輯覽』은 조선 중기 『가례』 연구가 활발했던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예학서로, 『가례』의 내용을 고증 및 보증한 것이다. 저자인 김장생은 『가례집람』 이외에 예서로서 『喪禮備要』(1583 편찬, 1621 및 1648 간행), 『疑禮問解』(1643 편찬, 1646 간행)를 남겼고, 조선의 예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꼽힌다. 관련하여 한재훈, “조선 중기 『家禮』에 대한 고증과 보정-『家禮輯覽』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86 (2020) 참조. 편찬 및 간행 연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각 항목을 참조하였다. 김장생의 『가례집람』은 중기의 사례이지만, 사대부묘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을 기술자들의 존재를 그려 보기 위해 함께 제시하였다.
  61. 61『家禮』, 卷4, 喪禮, 治葬: 【作灰隔】 穿壙旣畢, 先布炭末於壙底, 築實厚二三寸. 然後布石灰細沙黃土拌勻者於其上, 灰三分, 二者, 各一可也. 築實厚二三寸, 別用薄板, 爲灰隔如郭之狀. 內以瀝淸塗之, 厚三寸許, 中取容棺, 墙高於棺四寸許, 置於灰上. 乃於四旁旋下四物, 亦以薄板隔之. 炭末居外, 三物居內, 如底之厚. 築之旣實, 則旋抽其板近上, 復下炭灰等而築之, 及墻之平而止.; 及墓, 下棺, 祠后土, 題木主, 成墳: … 【乃窆】 … 【加灰隔內外蓋】 先度灰隔大小, 制薄板一片, 旁距四墙, 取令脗合, 至是加於柩上. 更以油灰彌之. 然後旋旋少灌瀝靑於其上, 令其速凝, 卽不透板. 約以厚三寸許, 乃加外蓋. 【實以灰】 三物拌勻者居下, 炭末居上, 各倍於底及四方之厚. 『國朝五禮儀』卷8, 大夫·士·庶人喪, “治葬”은 목곽 사용을 명시한 것을 제외하고는 『가례』 치장조 내용과 동일하다.
  62. 62『沙溪全書』, 家禮輯覽, 喪禮, 治葬: 只須開壙三尺餘, 卽攤平如地, 乃度穴道寬廣, 於四圍開溝, 寬二尺, 深四五尺. 留其中爲母, 務取方正, 卽鋪炭屑於溝中. 以糯米煎汁, 拌灰沙黃土, 每灰三石, 用沙土各一石. 務令巧勻周遭, 下之每石許. 築實傍外處, 仍用炭屑及母而止. 方可掘取中心, 築底厚三尺, 以薄板鋪于下, 用油灰布其縫. 仍用糯米汁調淨灰, 遍灰四旁. 俟下棺後, 乃用厚板蓋上, 加灰物輕輕躡之, 勢如魚脊. 도랑을 메운 후 관이 놓일 바닥을 축조하는 방법은 김장생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저술이 기본적으로 『가례』에 기반하는 만큼 『가례』에 명시된 바닥 축조 방식과 동일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以薄板鋪于下”를 관이 놓일 바닥과 사면 모두에 얇은 판을 설치한다고 의역했는데, 조선 후기 건축재 연구에서 비록 석재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유회는 기본적으로 교착재로 활용된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리고 이어지는 원문에서 “其縫”은 판자와 판자가 맞닿는 부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유회의 활용에 관해서는 이권영, “조선후기 관영건축공사의 灰미장재와 공법에 관한 연구-營建儀軌의 油灰, 水灰, 樑上塗灰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18:4 (2009), 63-79를 참조하였다.
  63. 63『宣祖穆陵遷陵山陵都監儀軌』, 三物所: 外梓宮未下前, 壙中先設別紋席藍綃縝, 四張付地衣一浮, 次設紫的綾段褥一坐, 次設黃花紋席藍綃縝上席一立. 席子長興庫, 褥尚衣院. … 十三日朝後, 始築灰. 先以隔板隔乎三面, 板外各空四尺, 皆用營造尺, 板內各空五寸. 築炭末, 炭末之外, 三面小隔板立之, … 一三物交合, 石灰三斗, 細沙, 黃土各一斗式, 楡根皮水交合. 一同日, 石灰初築七十石, 鋪灰八寸, 築則五寸, … 同日午, 石灰二築七十石. 十四日朝三築七十石, 築灰三度則滿於隔板之上, 滿則隔板懸上. 乃以炭末築之, 俟滿止之. 炭末楡水小許交合. 炭末未築前, 厚油紙一卷粘付, 鋪于灰上後炭末入築. … (중간 반복 작업 생략) … 同日午, 十八築九十六石. 同日夕, 炭末六築三十二石. 以上補板上所築四尺五寸, 已上石灰實入八百六十四石, 炭末一百九十二石.
  64. 64『沙溪全書』, 家禮輯覽, 喪禮, 治葬 (각주 62): 簡易灰隔舊制, 先開廣後築底且築墻, 其法似難用功, 此不堅實. … 此法最爲簡當且堅實. 此予親督人築之者.
  65. 65『天工開物』卷中, 石灰: 墓及貯水池則灰一分, 入河沙, 黃土二分, 用糯米粳[粰], 羊桃藤汁和勻, 輕築堅固永不隨壞, 名曰三和土.; 정해득, 앞의 책, 140. 최병규 역주 『天工開物』에 따르면, 糯米粳의 粳은 粰의 誤字로 나미갱은 찹쌀로 쑨 풀을, 羊桃藤汁은 중국다래즙을 지칭한다. 송응성 저/최병규 역, 『天工開物』(범우, 2009), 364.
  66. 66『世宗實錄』卷113, 世宗 28年 7月 19日 乙酉: 三物內石灰三分, 黃土細沙各一分, 和以楡皮煎水.; 『澤堂別集』卷16, 雜著, 家戒: 至於石灰用楡汁堅凝, 乃自古匠人經驗之方. 而以爲楡汁恐生蟲不用, 知禮家皆用湯水, 退溪先生嘗非之矣. 余再度經驗, 用水築灰者堅凝, 不及楡汁, 古匠所傳, 不誣也.
  67. 67『가례집람』에 등장하는 시공자들은 ‘사토장’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보다 앞서 집필된 『喪禮備要』(1583년 편찬, 1621·1648년 간행) 治葬 ‘穿廣之具’에는 莎土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68. 68중종비 장경왕후의 초장지인 舊禧陵도 격판을 활용하여 사방의 旁灰는 8차례, 천장의 天灰는 6차례에 걸쳐 다져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희릉의 경우 암반에 조성되었기에 광의 규모를 축소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구희릉의 구조와 조성 방법에 대해서는 안경호, 앞의 논문, 321-329 참조.
  69. 69『成宗實錄』卷94, 成宗 9年 7月 26日 乙酉.
  70. 70『成宗實錄』卷94, 成宗 9年 7月 23日 壬午: 昌孫, 明澮, 沈澮, 士昕, 國光議: 自古陵室, 皆內作石室, 外有臺石, 實萬世永久之道. 我世祖遺敎禁石室, 臺石, 以崇儉德, 非徒無永久之計. 後來與臣庶墳墓無別, 有乖大體, 然今不可改爲.; 7月 26日 乙酉: 同知事徐居正曰: … 世祖亦崇儉德, 故遺命勿作石室莎臺石. 然帝王陵寢不可無石室莎臺石, 繼自今須定制, 以垂後世.
  71. 71논자들은 봉분 내부에 설치한 복부형 석회를 없애거나 봉분을 더 넓고 높게 쌓는다는 두 가지 안을 제시했고, 후자가 채택되었다. 각주 69; 신지혜, “15~17세기 초, 난간석만 갖춘 조선왕릉의 등장과 구조적 특징”, 『건축역사연구』32:5 (2023), 35-37.
  72. 72『國朝喪禮補編』卷1, 治葬: 壙旣畢, 作灰隔. 先鋪三物石灰三分, 黃土, 細沙各一分, 拌均時, 用水多少適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