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Articles› Abstract
Research Article

Development of Shilhak and Western Studies in Eighteenth Century Korea

KIM Orun Kihyup

Department of History, Keimyung University

Published: January 1989 · Vol. 11 · pp. 87-100
Full Text

Abstract

朝鮮 천주교회의 성립은 1784년의 일로 공인되어 있는데, 이것은 李承薰이 이해 초에 北京의 南堂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좁은 범위에서나마 규칙적인 종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종교의식의 범위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는 南人 계열의 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의 학풍이 星湖 李瀷과 연결된다는 사실까지도 밝혀져 왔다. 實學의 두 단계에서의 泰斗로 꼽히는 星湖와 茶山이 직접·간접으로 西學과 연루된다는 사실만으로도 實學과 西學 사이의 상관관계에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설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 개연성을 학술적으로 확인하려는 지금까지의 작업은 두가지 중요한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星湖의 계열에 속하는 학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西學에 반대한 사람들의 입장이 원만하게 설명되지 못한 점이고 다른 하나는 茶山을 비롯한 몇몇 중요한 인물들의 신앙에 대한 태도가 석연하게 이해되지 못한 점이다. 이 연구는 이 두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星湖와 茶山, 그리고 星湖의 제자로서 가장 뚜렷하게 反西學의 태도를 보인 河濱 愼後聃, 세 사람의 논설을 검토하여 하나의 學統 안에서 같은 주제에 대해 보여진 여러가지 태도를 일관성있게 해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星湖가 보인 조심스러운 수용자세에서 茶山과 그 주변인물들이 기독교의 교리까지 받아들이려 하는 단계 사이에는 반세기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星湖가 보였던 개혁정신이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星湖가 각별히 그 재주를 아꼈던 제자 河濱의 경우 극단적인 西學비판에 유별나게 열을 올렸던 것은 河濱이 얼마나 西學에 큰 기대를 걸고 짧은 동안이나마 정성껏 공부하였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星湖 이래 자취를 감췄던 西學이 1779년의 走魚寺 강학회에서 나타난 것은 끊어졌던 흐름이 어느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기보다는 보이지 않게 숨어서 흐르던 伏流가 1785년의 秋曹摘發로 드러난 뒤에 이 강학회 무렵까지가 거슬러 밝혀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언저리에서 신앙운동의 성립을 위해 절대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지는 李蘗의 경우도, 강학회 이전의 원래 흐름을 가리기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茶山을 비롯한 星湖계열 정통학자들의 동기에 주목하는 것이 이 단계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더욱 긴요한 일로 떠오른다. 茶山의 언론·저술 가운데 신앙문제를 직접 다룬 대목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다른 여러가지 주제를 다룬 茶山의 글 속에서 유일신의 개념에 접근한 '天'에 대한 인식, '理'의 근원성·보편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비롯해서 中國에서 활동한 예수회 補儒論者들의 입장이 많이 비쳐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星湖의 학통을 이어받은 茶山과 그 주변의 학자들은 實學을 추구한 것과 같은 동기, 즉 위기에 빠진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반적인 개혁의 선도적인 위치에서 학풍을 쇄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西學에 접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경향이 1780년대 중반까지 西學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신앙을 절대시하는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어 두 경향이 엇갈리는 가운데 1791년의 珍山사건을 겪으면서 원래의 학구적인 경향이 교회에서 물러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