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에서 한국 근현대 과학사 전시하기
Exhibiting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Science in Korea at the Science Museum
1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KRISTaC, Jeonbuk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63
Abstract
In the 1970s, Korean historians of science sought to raise public interest in traditional science by emphasizing scientific cultural heritage and “national science”. Thi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Science Museum in 1990, which marked the beginning of a large-scale exhibition of Korean science and technology. However, as the museum prioritized its exhibits and sought to differentiate itself from the cultural heritage covered by other museums, it developed the concept of “Gyeore science”, widening the gap between itself and historians of science and technology. Since the 2000s, amid the development of Korean society and the growing body of research on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science, there has been a growing call for an independent institution capable of showcasing the growth of modern Korean science and technology, though this has yet to materialize. However, science museums must demonstrate the role that science has played in modern Korean society through special exhibitions on diverse themes related to science and technology. To this end, a Korean S&T Archive Center dedicated to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produced in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science and technology is essential.
1. 머리말
과학기술과 대중이 만나는 공간인 과학관은 과학기술이 가져온 성취를 보여주고, 과학이 지니는 다양한 가치들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하여 관람객들, 특히 청소년들이 과학기술자의 꿈을 키울 수 있게 하는 장소이다. 한국의 “과학관의 설립ㆍ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약칭: 과학관법)”에 의하면, 과학관은 과학기술 자료를 수집ㆍ조사ㆍ연구하여 이를 보존ㆍ전시하며,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하여 과학기술지식을 보급하는 시설을 말한다. 이는 과학관이 첨단 과학을 소개하는 과학센터(science center) 외에도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의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해 준다.1 하지만 현실적으로 과학관은 역사나 문화보다 여전히 지식 전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과학관은 비형식적 교육 공간으로서 사회에서 과학이 수행하는 역할을 성찰하게 하는 현장이며, 큐레이터는 전시물과 서사를 통해 관람객이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2 즉,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다양한 가치와 경험을 전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 그룹과의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센터와 과학박물관의 구분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 과학관이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박물관과 차별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더 중요하게 작용해왔다는 지적이 존재한다.3 즉, 역사나 문화를 강조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과학의 가치와 지식을 전달하는 과학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항상 강조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의견이다. 이 의견에 동의하며, 이 논문의 4절에서 다루는 “겨레과학”의 등장 배경에 이러한 상황이 있음을 뒤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관법에는 과학센터와 과학박물관의 기능이 함께 명시되어 있고, 이는 과학관의 역할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발전에 따라 우리가 겪어온 근현대 역사에 관해 관심이 커지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원칙적으로 50년이 넘은 건축물, 교량, 물품, 시설, 기록, 장비 등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량이나 전자제품 등 소위 산업과 관련된 유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대량생산과 관련된 산업 제품이나 생산 시설은 희소성을 기본으로 하는 문화유산과는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최근 근대화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폐산업시설을 근대화의 기억을 보여주는 ‘산업유산’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과 학자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4 다만 이러한 정책적 노력은 물리적 시설이 존재하는 특정한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학관의 전시 활동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단기간에 양적 성장을 계속해 현재 과학기술 인프라나 연구개발 투자에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현재 많은 개발도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역사에서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중고생들이 알고 있는 과학자는 대부분 서양의 인물이다. 그 이유는 중등교육에서 과학 지식의 근본 개념을 강조하면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생산한 과학자만을 소개하기에 한국인이나 한국 사회가 등장할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5 한국 학생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높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호감도나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결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6 과학기술이 한국의 문화라기보다 서구의 과학 지식과 기술을 이식한 결과물이라는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체로 한국의 과학기술이 형성되는 과정보다는 정답을 찾는 데 주된 관심을 두게 된다.
이러한 한국의 과학문화 지형도에서 학교 밖에서 과학을 만날 수 있는 대표적 공간인 과학관은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과학기술이 거둔 여러 성취와 그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2026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167개 과학관이 있다.7 이중 국립과학관으로 불리는 종합과학관은 5곳이며, 3곳이 한국 과학기술사를 상설로 전시하고 있다. 국립과천과학관은 한국과학문명관을, 국립대구과학관은 과학기술문명사관을, 국립중앙과학관은 한국과학기술사관을 운영하고 있다.8 이들 기관은 대체로 전근대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한국 과학사를 전시하면서 근현대사는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이 논문은 한국의 과학관이 한국 사회에서 근현대 과학기술이 자리 잡고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룸으로써 과학이 지니는 다양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 과학관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한국 과학사 연구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추적하고, 특히 한국 근현대 과학사와 관련된 전시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과학관의 전시는 대중들에게 과학적 사실만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역할 이외에도 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역할과 기여에 대한 “사회문화적 상상”을 보여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공공기관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립과학관은 정부의 정책 지향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따라서 국립과학관의 전시는 정치적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는 시기적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때와 가까우며 특정 시점의 이해관계나 역사적 시각이 현재와도 얽혀 있기 때문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최형섭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여러 전시관에 대한 리뷰를 통해 근현대 한국사에 대한 해석과 이를 보여주는 전시가 첨예한 정치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9
국립과학관에서 한국 근현대 과학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행위는 현실적으로 과학관이 과학기술 개발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활약했던 중요 인물들의 활동을 제시함으로써 여러 과학기술의 사회문화적 함의와 정책적 지향, 그리고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기본적으로 국가나 공공기관이 세운 과학관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과학을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본 인물이나 집단의 영향력이 작용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과학박물관은 단순한 전시기관이 아니라 국가와 대중 사이를 매개하면서 대중에게 과학이 무엇인가를 알리면서 동시에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이 국가 목표와 관련이 있음을 보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10 이는 과학관이 단순히 과학기술 연구 성과를 제시하거나 과학의 개념만을 소개하는 곳만이 아니고, 정부의 정책적 의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과학관은 외부 전문가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이에 대한 균형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학관에서 이루어지는 과학기술사 전시는 관련 연구에 기반할 필요가 있다. 2024년 일본 과학사학회가 펴내는 학술지 『과학사연구(科学史研究)』는 “박물관에서 과학기술사 자료의 전시를 둘러싸고”라는 제목 아래 다섯 편의 글을 실었다.11 이 글들은 과학박물관의 실제 전시 사례를 토대로 지식이나 개념보다 역사적 흐름 혹은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관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중요하다. 샤론 맥도날드(Sharon Macdonald)는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민족지 방식으로 추적하면서 전시가 단순히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제약 속에서 큐레이터가 다양한 조건들과 협상하면서 구성하는 공공 문화임을 주장했다.12 이를 고려한다면 한국의 과학관에서 한국 근현대 과학사를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실제 전시를 제안, 설계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사회문화적 함의와 정책적 지향, 그리고 정치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한국 과학관의 등장과 한국 과학사
20세기 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에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1922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동양에는 과학과 산업주의가 없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은 당시 중국이 서양에 고전하는 이유는 과학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의 이광수도 1918년 유교의 영향으로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사상, 사회에는 과학이 없다면서 새로운 생활이 필요함을 강조했다.13 이후 최남선은 1931년 『조선역사』에서 첨성대, 금속활자, 고려청자, 한글, 측우기, 거북선, 비차 등을 들면서 조선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과학기술적 성취를 찾고자 했다. 이에 대해 과학사학자 박성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 민족의 창조성이나 과학기술상의 자랑거리란 바로 이런 연유로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했다.14
이런 상황에서 1927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과학관인 은사기념과학관은 전통시대의 과학에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다. 은사(恩賜)라는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이 기관은 천황이 식민지 조선에 “하사한” 17만 엔의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기관으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과시하고, 일본의 앞선 과학문명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15 그런 만큼 은사기념과학관은 한국의 과학전통에는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국 과학사의 형성을 살핀 신동원ㆍ김태호의 논문은 1920년대 이후 전문적인 천문학자, 기상학자 등이 가세함으로써 한국의 전통과학이 서구 독자들에게 알려졌고, 이를 통해 한국 전통과학의 성과가 굳건하게 인식되어 이후의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주장했다.16 실제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를 추적하는 연구는 일제강점기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Royal Asiatic Society-Korean Branch)가 펴낸 기관지 Transactions of the Kore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이하 Transactions)에서 찾을 수 있다. Transactions은 한국에 관한 전문적 연구를 최초로 시도한 학술지로 20세기 전반기에 한국에 관한 학술 연구가 국내외로 전파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특히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Will Carl Rufus)는 1913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1936년 그간의 연구를 종합해 “Astronomy in Korea”를 발표했는데, 이는 이후 한국 천문학사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7 그 밖에도 Transactions에는 거북선, 한의학 등 전통과학기술에 관한 연구가 여럿 게재되어 한국학의 대상에 과학기술이 포함되었음을 보여주었다.18 하지만 Transactions의 연구는 그 일부라도 은사기념과학관에 반영될 수 없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은사기념과학관은 국립과학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초대 관장 조복성을 비롯해 상당수 과학박물관의 핵심 인물들이 생물학자로 이루어져 과학박물관은 자연사박물관과 높은 친연성을 보였다. 국립과학박물관은 1947년 국립과학관이 되었고, 이는 현재 한국 국립과학관의 실질적 원조가 되었다. 비록 한글 이름은 과학박물관에서 과학관으로 달라졌지만, 영문 기관명은 National Science Museum으로 동일했으며, 현재도 모든 한국의 국립과학관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19 하지만 국립과학관은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불에 타면서 그에 맞는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홍이섭은 1942년 잡지 『조광』에 한글로 연재하던 『조선과학사』를 1944년 일본어로 재구상하여 출판했고, 해방 이후 이를 다시 국문으로 고쳐 펴냈다. 이 책은 한국의 과학을 시대순으로 개설한 최초의 통사로, 한국 과학사 연구의 학문적 출범을 의미한다.20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면서도 맑시즘의 사회경제사 시대 구분론을 수용한 그의 연구는 과학관 전시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60년이 되어 한국과학사학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관련 연구자도 별로 없었기에 학회는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의 학풍을 계승한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가 1966년 출판되면서 한국 과학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사를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립한 한국 최초의 학자”로 평가받는 전상운은 한국 전통과학기술의 의미를 찾고 실제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21 그가 1966년 발표한 저작 『한국과학기술사』에 대해 홍이섭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연과학 분야의 전공학인에 의해” 한국 과학사가 새로운 인식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22
한국전쟁 이후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국립과학관은 1962년 서울 와룡동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국립과학관은 언론으로부터 “간판뿐인 국립과학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3 1966년에 이르러 미국과학관협회 회장 조셉 패터슨(Joseph Allen Patterson)을 비롯해 미국의 과학관 전문가가 방한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게 되었다. 특히 패터슨은 제대로 된 국립과학관(The Korean National Science-Cultural Center)을 세우기 위해 1969년 여름까지 한국에서 머물며 노력했지만 결국 구체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해 패터슨은 한국 정부 고위층의 부패가 국립과학관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라고 주장했다.24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통해 동양 최대 규모의 과학관을 세우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패터슨의 구상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았다.
1967년 과학기술처의 설치 이후 그동안 문교부가 관장했던 국립과학관은 1969년 과학기술처로 이관되었고, 이때부터 정부의 과학기술 및 산업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것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1970년 과학기술처는 『과학관 전시를 중심으로 한 한국 주요 산업품의 전시회』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립과학관이 “사업체와의 유대사업”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했다. 즉, 산업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과학기술이 국가 경제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생활의 과학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25 실제 국립과학관은 1970년대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현 한국과학창의재단)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함께 전국민 과학화 운동을 이끄는 3대 핵심 기관으로 활동했다.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했지만, 이러한 연구는 1970년대까지 국립과학관의 전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당시까지 과학관은 경제적 성장을 최우선시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과학센터의 역할이 중심이었기에 전통과학이나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까지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3. 과학문화재와 민족과학
1979년에 이르러 국립과학관은 “산업기술관”을 개관하여 당시 정부가 적극 추진하던 중화학공업화의 성과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공간이 되었다. 동시에 당시 정부가 주도적으로 구성한 전통문화 혹은 한국 전통에 대한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언급이 늘어나면서 한국 사회의 전통과학에 관한 관심도 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 헌법 선포 이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옷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고, 그 뿌리를 한국의 전통과 민족성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전통을 재발명하고, 애국선열들의 사당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국가 주도로 한국학 연구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전통 창출의 맥락 속에서 전통과학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26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민족처럼 슬기롭고 과학적 두뇌가 뛰어난 민족도 드물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과학적 발명품과 업적은 적지 않다. 신라의 첨성대, 고려의 주조활자발명, 세종대왕의 측우기, 이순신장군의 철갑 거북선 등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과학적 업적이었다. 하나 그 과학의 전통을 올바로 이어받지 못하고 과학을 경시함으로써 그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27
이는 일제강점기 최남선이 우리 민족의 과학적 창조성을 강조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상운에 이어 박성래를 비롯한 전문적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자들은 1970년대 후반 전통과학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면서도 전근대 한국 사회의 과학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그것의 과학사적 의미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과학사학회는 1979년부터 『한국과학사학회지』를 발간하면서 과학사 분야의 논의를 주도했으며, 이후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에서 다루는 연구 대상이 더욱 다양화되는 한편 연구의 전문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전통과학을 향한 관심의 배경에는 또한 당시 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이 연이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단순히 현 젊은이의 우수성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슬기로운 기능이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조상들의 과학적 업적 찾기를 국가적으로 전개하고, 국내외에 공인받을 수 있는 과학기술사를 편찬하는 한편 전통과학 자료들을 보관하고 이를 교육하는 과학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28 1978년 7월 4일 한국과학사학회가 주최한 “과학사와 과학박물관”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은 문화유산의 이해를 위해 풍부한 자료의 보관 및 해석, 과학박물관 설립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29
1980년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박익수를 비롯해 전상운, 유경로, 나일성, 이은성, 송상용 등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사료들을 문화재로 지정해 정부가 보호하고 최종적으로 과학박물관을 세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들 사료들을 정리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전상운은 “우리나라가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현대 과학기술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조상들의 슬기를 갈고닦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을 통해 한국적 민족 산업으로 육성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박성래도 “조상들의 슬기를 다듬는 전통과학연구는 종합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되어야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기관은 국가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31 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유사한 전통과학 연구기관을 세워서 국가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과학사학자들의 주장은 국립과학관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졌다. 1981년 새로운 국립과학관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고서에 의하면, 국립과학관은 국가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찬란한 과학민족으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기관이어야 했다.32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국립과학관이 아닌 새로운 종합과학관이 필요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종합과학관은 기존 과학관이 수행하던 역할에 더해 한국 과학기술사를 전시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이를 구체화한 이듬해의 보고서는 한국 과학기술 전시의 목적을 한국의 전통적 과학기술 유산의 수집 보존을 통한 전시사업을 통해 청소년과 국민 모두에게 우리의 과학적 창조성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고,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과학기술과 문화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즉, 국가의 과학기술력을 보여주는 공간인 과학관이 “민족과학기술의 자료를 발굴, 조사, 연구, 보전 전시”하는 한국 과학기술사를 포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당시 언론도 과학기술박물관의 필요성을 크게 보도했다.33
전상운은 새로 건립되는 과학관은 한국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이 쌓아놓은 오랜 과학 문명의 전통을 이어주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전 승화시켜 나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래서 새 종합과학관에는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적 현장을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전시관을 마련하는 계획이 세워지고, 그 적극적인 방향이 연구되기에 이르렀다.34
전상운은 이러한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사를 비롯해 여러 분야 연구자의 공동연구 체계가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정부는 신설되는 종합과학관에 과학기술사박물관을 포함하기로 확정했다. 당초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할 때 그곳에 과학기술사박물관 설립을 검토했지만, 신설 과학관이 한국과학기술사를 전시하게 됨으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공간에는 민속박물관이 들어서게 되었다.35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사학자들은 경회루의 과학유적을 복원하자거나 과학유산을 재평가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전통과학기술사물을 발굴ㆍ수집ㆍ연구ㆍ전시해야 함을 강조했다.36
1985년 정부는 전통과학과 과학유물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전상운을 비롯한 과학사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해 과학문화재라는 개념 아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물시계 자격루, 그리고 17세기의 천문학자 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를 국보로 지정했고, 측우기 등 16점을 보물로 지정했다.37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된 첨성대가 1952년 국보가 된 이후 과학과 관련된 유물이 국가적인 자산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추가로 과학문화재를 국보ㆍ보물로 지정하면서 과학문화재라는 개념을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전상운은 1960년대부터 과학문화재의 보존과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20여 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면서, 과학기술박물관의 설립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만족과 기대를 드러냈다.38
보편타당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공간이지만 한편으로 과학관이 한국 과학기술의 고유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 이벤트를 앞두고 당시 한국 사회가 “한국적 가치”를 강조했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선진국을 목표로 빠르게 따라잡는 데 집중했던 한국은 한국 과학기술사의 연구와 한국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한국의 전통 성과를 강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는 올림픽 직후인 1989년부터 정부가 민속의 날 대신 설이라는 이름으로 사흘 연휴를 결정했고, 경복궁의 복원과 자격루 복원이 가시화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39
오랫동안 한국 전통과학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 박성래는 서양 위주 과학사 기술에서 벗어나야 하며, 과학기술 용어를 일본식으로 오역하는 문제가 심각하다며, 민족과학 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민족과학은 국수적인 과학과는 다르며, “우리에게 더 잘 맞는, 그리고 우리 전통에 더 잘 어울리는, 그런 과학기술 체제 일체”를 의미한다고 밝혔다.40 이를 위해 과학기술을 단순히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인식해야 함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우리 역사에 바탕을 둔 과학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민족과학은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용어를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민족과학은 우리 문화 속에서 우리 과학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고, 어떠한 가치를 지녔으며, 당시에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파악해서 현재의 과학교육에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를 배움으로써 학생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우리 문화와 조화 없이 도입되었다는 현실을 깨닫고, 한편으로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도 과학을 찾을 수 있음을 파악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이는 우리 과학 전통에 대해 자부심을 기를 필요도 있지만, 과장됐던 부분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과학기술이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민족과학의 목적인 셈이었다.41 민족과학의 건설 없이는 한국 과학기술은 한국의 자생적 발전과는 무관한 뿌리 없는 외국 문화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즉, 그가 주장한 민족과학은 기존 과학과는 다른 새로운 위상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한국 역사에 기반을 둔 효과적인 과학교육을 위한 방법론적 목표 아래 형성된 개념이었다.
4. 국립중앙과학관의 설립과 겨레과학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1990년 대덕연구단지에 국립중앙과학관이 설립되면서 한국 과학기술사의 과학관 전시가 현실화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은 기관명에 중앙을 포함했지만, 영문명은 여전히 National Science Museum을 고수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의 등장에 따라 그동안 국립과학관으로 불렸던 와룡동의 기관은 국립서울과학관으로 되어 수도권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42
국립중앙과학관의 한국 과학기술사 분야는 상설전시관 3층 1,410㎡의 전시면적에 총 1,900여 점의 전시품들이 43개의 항목에 따라 실물을 위주로 전시되는 방식을 택했다. 전시의 주요주제는 조상의 슬기와 창조력을 바탕으로 한국 과학기술사 정립을 통한 과학정신의 체득에 주안점을 주었다. 전시는 의ㆍ식ㆍ주, 가공, 하늘과 땅의 과학, 과학기술과 도구 등 4개의 코너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국립과학관이 전통과학의 전시에서 과학문화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과학문화재가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되면 이를 관장하는 정부 부처는 문화부의 국립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이 되며, 중요한 과학문화재는 이미 대부분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문화부는 우리 과학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국내 학계의 연구성과와 사료들을 번역해 지속적으로 외국 학계에 제공하고, 세계 과학사에서 한국 과학문화가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알리기 위한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43
이 때문에 국립중앙과학관의 과학기술사연구실은 전통과학기술의 개념과 의미를 더 넓게 잡아야 했다. 이를 위해 1993년부터 의식주, 농기구, 가공, 인쇄기술, 흙의 예술, 특산물, 국악기, 천문ㆍ지리, 군사기술, 한의학 등 각 분야에 대한 선조들의 과학슬기를 밝히고, 전통과학기술에 대한 조사ㆍ연구를 통해 보존과 전시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 시리즈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93년 1월부터 국립중앙과학관은 과학기술문화의 보급과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목표로 “전통과학기술문화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연구회는 전통과학기술 문화를 현대과학기술에 비추어 그 과학성을 밝혀 우리 민족이 독특한 과학정신을 가진 민족임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고고학, 역사학, 민속학, 금속공학, 건축공학, 재료학 등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참여하여, 1994년 3월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통과학기술에 대하여 한 주제씩 집중하여 한국과학기술사를 강의하는 한편, 문화유적을 찾아가는 문화재 탐방 등이 포함된 전통과학대학을 운영하기 시작했다.44
흥미롭게 과학기술사연구실은 전통과학을 강조하면서 “겨레과학”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겨레는 민족의 순우리말로, 영어나 한자로 번역하면 박성래가 먼저 주장했던 민족과학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앙과학관이 염두에 두었던 겨레과학은 일상생활 속에서 조상의 과학적 슬기를 찾아내겠다는 것으로, 교육에 대한 함의가 컸던 민족과학과는 달랐다. 과학관은 1994년 김장독, 의식주, 인쇄기술, 천문지리 등 13개 분야에 걸친 102개 주제의 전통 과학기술에 대해 70여 장의 전통 유물 사진과 함께 해설을 붙인 『겨레과학의 발자취』라는 책을 펴냈다.45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그간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라는 제목으로 발간되던 시리즈는 이후 『겨레과학기술 조사보고』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부도 겨레과학 연구에 대해 “전통 기술의 현대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통기술을 현대의 첨단 생산기술과 접목시켜 전통고유기술을 개발하는 데 매년 30억씩 5년간 지원하기로 했다.46 과학관은 이런 배경 속에서 단순 유물 전시에서 벗어나, 실제로 옹기를 굽거나 화차를 발사하는 복원 및 재현 실험 중심의 연구를 강조해 나갔다.
겨레과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과학기술사연구실의 정동찬은 유물에 기반을 둔 문화유산을 강조했다.
겨레과학기술이란 우리 겨레가 유구한 시간 동안 축적해 온 과학기술의 총체로서, 새로운 원천기술의 보고로 활용하여 현재 또는 미래의 생활양식을 한층 발전시키고 세계 과학기술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우리 겨레의 과학기술체계이다. 기존의 천문, 지리, 군사기술에서 폭을 넓혀 의식주, 공예, 놀이, 종교에까지 시간상으로는 선사시대부터 미래까지 아우르는 우리 겨레의 모든 물질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다.47
그는 겨레과학기술에 대한 맥을 찾고 그에 담긴 우리 겨레의 독특한 과학슬기, 즉 과학정신을 찾아내기 위해서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여러 자료를 한곳에 모아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우리 겨레의 모든 문화유산의 바탕에 과학기술이 깔려 있다면서 과학문화재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문헌에 집착한 나머지 유물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문화재 지정에 큰 오류를 범할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는 주장이었다.48
이처럼 국립중앙과학관이 한국과학기술사를 전시하면서 겨레과학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우선, 과학관의 전시에는 가시적인 전시품이 매우 중요해서 유물을 강조하는 접근법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문헌을 중시하는 과학사학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과학관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과학문화재 혹은 박물관의 전시와 구분되는 정체성을 위해 겨레과학을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과학문화재는 기본적으로 문화부가 일차적인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당시의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문화부 산하의 문화재위원회가 국가지정문화재 후보에 대해 심의하고, 이를 문화부장관이 지정하도록 되어 있었다.49 따라서 후발 주자인 과학관이 동일한 의미의 과학문화재 개념으로는 분명한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전통과학기술을 현대적으로 재발견해 산업에 활용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겨레과학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전상운이 1960년대 후반부터 제안했지만,50 구체적인 정부의 정책으로 반영되어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이 시기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국립중앙과학관에서 겨레과학에 대한 강조가 커지면서 기존 한국 과학기술사를 외쳤던 목소리는 과학관에서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초기에 전상운, 박성래 등 과학기술사학자들이 학술적 엄밀성을 기하고 정확한 고증을 위해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지만, 점차 이들의 역할은 제한적으로 되었다. 대신 무형문화재 및 장인 등 실제 제작 기술을 지닌 기능보유자들이 기술 자문 및 협력으로 꾸준히 참여폭을 넓혀 갔다. 겨레과학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복원과 실험 위주의 방법론이 주축이 된 셈이었다.
과학사학자들은 사료에 대한 엄밀한 비판을 바탕으로 특정 유물의 과학성에 대한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겨레과학을 주장하는 그룹은 문헌에 없더라도 실제로 제작해서 작동한다면 그것이 과학적 증거라는 공학적 복원에 집중했다. 이들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겨레과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반면 과학사학자들은 겨레과학이 학술적인 개념이기보다는 대중의 취향을 반영해 다분히 국수주의적 뉘앙스를 지닌다고 여겼다. 특히 국립중앙과학관이 주도한 전통 과학유물 복원사업에 대해 학계는 고증 절차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박성래는 한국 전통과학사 서술에 깔린 “오만과 편견”을 지적하며, 전통과학을 애국심의 도구로 삼는 태도를 비판했다.51 과학사학계는 기본적으로 선조들이 자연을 바라보았던 시각, 목적, 의미가 지금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보았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민족주의는 과거의 과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립중앙과학관은 2016년 『겨레과학기술 조사연구 20 옻칠』을 끝으로 더 이상 겨레과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52 여기에는 겨레과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이의 확산을 주도한 정동찬의 은퇴 이후 겨레과학 개념이 다른 국립과학관에서 채택되지 못한 점이 중요했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지방의 여러 국립박물관이 지니는 위계적 구조와 달리 각 국립과학관이 서로 독립적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중앙”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국립중앙과학관이 만든 개념이나 전시가 다른 과학관으로 전파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53 국립중앙박물관과 차별화를 위해서 국립중앙과학관이 겨레과학이라는 개념을 만든 셈이지만 국립박물관과는 다른 국립과학관의 구조가 그 개념의 확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5. 한국 근현대 과학사의 부상과 한국 근현대 과학의 전시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과학기술력, 기술경쟁력, 연구개발비 규모 등에서 확인되는 국제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전시관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한국 현대 과학기술 및 산업의 성취를 보여줄 독립적 기관의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산업자원부 및 울산광역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 사업을 들 수 있다. 이는 1999년 당시 대통령 김대중의 울산방문을 기회로 구체화했다. 1999년 10월 울산광역시는 “울산 공업역사박물관(가칭) 건립 타당성 조사 및 기본구상수립 용역”을 실시했으며, 여기에 국립중앙과학관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은 낮은 경제성 때문에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사업계획 변경을 통해 규모를 대폭 축소했지만, 현재까지 국립산업기술사박물관은 설립되지 못했다.54
예비타당성조사의 성패는 경제성이 좌우하는데, 이는 도시의 인구수에 따라 1,000가구를 대상으로 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세금으로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 또 얼마나 낼 수 있는지 등을 묻는 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전국 인구의 2.3%에 불과한 울산 시민의 긍정적인 의견으로는 편익을 높일 수 없어, 경제성이 낮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신문은 이를 두고 “불합리한 예비타당성 규정의 희생양”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55 이는 학자들이 오랫동안 요구했지만 예비타당성조사의 관문을 넘지 못한 국립자연사박물관과 비슷한 상황이다.
또한 국립중앙과학관은 2008년 “한국 과학기술역사관 건립계획 수립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별도의 기관을 세우고자 했다. 그 배경으로 한국은 높은 과학기술 경쟁력 및 국가 연구개발 예산 규모 수준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기피와 고급두뇌 해외 유출 등의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56 하지만 이 주장도 한국 근현대과학사 전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2015년 기존 전통과학 분야와 동일한 비중의 공간에 한국 근현대과학사 전시를 리모델링하여 설치했고, 기존 한국과학기술사는 겨레과학기술사 분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근현대 전시에서는 에너지ㆍ자원, 전기ㆍ전자, 운송, 우주, 석유화학 및 환경, 반도체와 ICT, 생명공학 등 산업화 이후 당시까지의 최초, 최고, 최대의 과학기술적 성취를 보이고자 했다.
한편으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6대 산업과학기술(반도체, 원자력,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의 발달사를 보여줄 수 있는 과학역사관 조성을 건의했고, 이에 국립중앙과학관은 2023년부터 “한국산업기술사관 조성”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산업기술 발전사와 성과물을 수집ㆍ보존ㆍ연구ㆍ전시함으로써 산업기술 강국으로서의 이미지 제고, 국민적 자긍심 고취, 산업기술 미래를 예측해 보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57 하지만 역시 낮은 경제성과 6대 산업과학기술와 관련된 과학기술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판단에 의해 신규전시관 건립 대신 기존 미래기술관의 리모델링으로 결론이 났다.
비록 국립중앙과학관이 겨레과학을 중시하면서 과학사학자들과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2000년대 들어와 수도권에 국립과천과학관 설립이 추진되면서 과학사학자들이 다시 한번 본격 참여하였다. 전상운, 박성래, 김영식 등 다수의 과학사 연구자가 이에 참여했으며, 신설 과천과학관에 과학기술사료관을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58 비록 실제 과천과학관의 과학기술사료관은 과학사학계의 기대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신설 국립과학관은 과학기술사 전공자를 학예사로 선발하면서 과학사 학계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 연구가 크게 늘어난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1996년 일제강점기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의 성장을 다룬 첫 박사학위 논문이 나온 이후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면모를 보이는 연구가 꾸준히 생산되었다.59 이는 국립과학관이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의 성과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전근대 과학기술의 주요 성취 상당 부분이 국가유산청의 관할 아래 있는 상황에서, 과학관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성과가 축적되고 국립박물관의 접근이 제한적인 근현대 과학기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실제 미국, 독일, 프랑스와 같은 주요 선진국은 산업강국 도약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종합적 규모의 산업기술 박물관을 건립해 자국의 산업 정체성을 확보하는 한편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래 산업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산업기술 박물관의 목적과 기능은 국가의 산업기술 발전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전시하는 것이며, 사라져 가고 있는 산업기술 유물들을 수집ㆍ보전하기 위한 공간이자 자연과학 및 기술 교육의 장으로 정의된다. 즉, 자국의 산업 정체성을 세우고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목적으로 대표적인 전시관들을 운영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근현대 과학사를 전문적으로 보여주는 독립적인 과학관이나 박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경제발전전시관 등에서 한국 근현대 역사 및 경제사의 일환으로 시대별 산업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안산산업역사박물관, 울산박물관 등은 지역의 산업발전사와 연계하여 한국 공업화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포스코역사박물관처럼 기업의 역사와 연계하여 특정 분야를 전시하기도 한다. 또한 석탄박물관, 철박물관 등 특정 산업기술을 특화해서 다루는 특수 박물관도 존재하지만, 아직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의 역사적 전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독립적 전시관은 없는 셈이다.
비록 독립적인 기관이나 상설전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금까지 과학관에서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시하는 방식은 몇 가지 경향을 보였다. 우선 특정한 주제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한 특별전의 형태로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을 다루는 방식을 들 수 있다. 2019년 국립중앙과학관의 “과학한국 끝없는 도전” 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과학기술적 과제를 시대별로 재구성하여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를 하나의 통합된 서사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60 또한 2025년 국립과천과학관의 “과학 조선” 전시는 과학기술자와 독립운동을 연결함으로써, 과학기술을 기존의 역사 서술과 접목시키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61 이러한 사례는 과학관이 특정한 주제나 맥락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기획전시를 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과학관은 관람객에게 역사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서사는 과학기술의 성취를 중심으로 한 선택과 배열을 통해 구성되며, 그 과정에서 국가 발전이나 미래 지향적 가치와 결합한 특정한 역사 인식을 형성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산업기술발전사』, 『꿈이 만든 나라: 대한민국 산업기술 100장면』, 『과학기술 50년사』와 같은 연구는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분야별로 구조화하여 제시함으로써, 과학관 전시가 과학기술을 분류하고 서사화하는 방식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공학한림원이 2025년 간행한 『기술, 삶이 되다: 산업기술유산 80선』은 시기와 분야를 결합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을 재구성한 것으로, 이 활용을 통해 역사적 의미가 재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62 이는 기본적으로 연도순에 따른 선정을 따르지만, 한편으로 분야별 안배를 통해 여러 분야를 다루고자 했다. 물론 큐레이터는 이러한 성공의 기억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그림자에 대한 고려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63
아울러 후발국의 과학기술(자)를 평가할 때는 단순히 연구 성과의 뛰어남이 아닌,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다양한 평가 기준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전근대 과학 유물 전시에서 최초나 최고, 독창성이나 수월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측우기, 자격루, 금속활자, 한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현대 과학의 경우 연구 성과를 넘어서 시대마다 어떠한 주된 과제가 해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를 과학기술자들이 어떻게 풀어 갔는가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 현대사를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2024년 새롭게 설립된 중국과학자박물관(中國科學家博物館)은 한국과학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기관은 중국 원로 과학자 674명을 대상으로 그들과 관련된 학술전시, 신중국 건설을 위해 귀국한 해외유학파들의 귀국 이야기, 양탄일성(兩彈一星) 개발의 공로자들을 소개하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표 과학자들의 일생을 다룬 기획전을 통해 현대 중국을 건설한 과학자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64 이 기관은 인물을 중심으로 중국의 현대과학만을 다룸으로써 과학과 과학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박물관이 지나친 국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기억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평면적인 해석을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를 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중국과학자박물관은 단순한 전시기관이 아니라 연구, 아카이브, 교육 기능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현재 한국에는 과학기술자와 관련되거나 과학기술 연구활동에서 생산되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ㆍ정리하는 공공기관이 없다. 국립과학관은 공간과 인력의 한계로 현재 계속 생산되고 있는 자료, 특히 대형 연구 관련 사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뾰족한 방안이 없다. 따라서 과학관에서 한국의 현대 과학기술사를 전시하기 위해서는 관련 자료를 담당하는 아카이브 설치도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는 연구 과정에서 생산되는 대형 과학기술 산물의 수집 및 보관이라는 문제와도 관련이 된다. 즉, 전시의 아이템을 확보한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 과학기술 활동을 축적하는 공간으로서 아카이브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적으로 산출되는 과학기술 유산만을 전담할 별도의 기관 설립 필요성이 크다는 주장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65
사실 슈퍼컴퓨터, 자기부상열차, 나로호, 하나로, K-star 등 한국 현대 과학기술의 중요한 성취를 보여주는 대형 사물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가속기 특별전을 기획했던 아리가 노부미치(有賀暢迪)는 거대한 가속기를 전시장 안에 놓을 수 없다는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속기 터널을 걸어서 일주하는 영상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영상 옆에는 실제 가속기에서 사용하는 이동용 자전거를 설치해 가속기 시설의 거대함을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66 이처럼 전시는 거대 과학기술 시설을 영상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연구에 활용되지 않는 기자재를 어떻게 소장할 것인가는 과학관이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해결이 필요한 과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관은 과학관법에 명시된 것처럼 과학센터와 과학박물관의 두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과학기술 발전과 그것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관한 여러 연구를 반영해서 현재 과학문화 함양과 차세대 과학기술 인력 양성과 같은 정책적 목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능을 더욱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과학관은 단순히 첨단 과학을 만나고 관련 지식을 익히는 공간을 넘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과학기술이 지니는 다양한 가치를 깨닫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6. 맺음말
한국의 과학관이 한국 과학기술을 본격적으로 전시하게 된 것은 1990년 대덕에 국립중앙과학관이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여기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한국 과학사학자들의 주장과 1980년대를 거치면서 민족문화, 한국의 문화유산 등에 관한 관심의 제고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했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1985년부터 과학문화재를 지정하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전시물이 중요하고, 동시에 박물관에서 다루는 문화유산과의 차별성이 필요했던 국립중앙과학관이 겨레과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과학기술사학자와의 거리는 멀어져 갔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과 근현대 과학사 연구 성과의 증대 속에서 한국의 현대 산업, 과학기술 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독립적인 과학박물관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현실화하지 못한 상황이다.
국립과학관이 국립박물관과 차별화된 기능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근현대 과학기술사 연구를 적극 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현대 과학사를 과학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함으로써 청소년을 비롯한 대중에게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과학기술이 중요한 요소였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관람객들에게 한국 사회가 겪었던 과학기술과 관련된 이슈나 시대적 요구의 변화를 이해시키고, 동시에 특정 분야의 성과를 제시함으로써 전시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과학관은 상설전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주제의 특별전을 통해 그러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근현대 과학기술사 연구를 적극 활용할 여지가 크다. 동시에 현재 국립중앙과학관이 운영하고 있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등록제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과학기술에 관한 역사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를 지닌 자료들을 등록하여 보존ㆍ관리ㆍ활용함으로써 한국의 다음 세대에게 그 가치를 전승하고자 하는 취지로 2019년부터 시작된 제도이다.67 현재까지 총 92건이 등록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전근대 과학기술 유물이 과학문화재의 틀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는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 관련 자료가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제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현재까지 선정된 중요 자료를 특정한 주제로 재구성해서 이를 특별전 형식으로 전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활발하게 국책적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최신의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은 과학관의 역할 정립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특히 국립중앙과학관은 한국 연구개발의 심장부로 불리는 대덕연구단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 전시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 최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최신 성과들을 해당 기관과 과학관이 공동으로 전시하는 행사가 열렸는데,68 이를 더 공식화해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단순히 외래에서 도입된 결과가 아닌, 한국의 주체적 노력을 통해 형성된 한국의 문화임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형성을 끌어낸 과학기술자를 중요하게 부각하는 방식을 과학관이 수용하면 좋을 것이다. 최근 김근배 등의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을 비롯해 과학기술 인물에 대한 연구가 늘고 있다. 이는 탁월한 연구성과만이 아닌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과학 인물을 다룸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분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국립과천과학관이 기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명예의 전당”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과학기술유공자는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 강화와 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현대 과학기술 인물 중에 선정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 현대사와 접목해서 효과적으로 전시를 할 경우 관람객들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이 우리 과학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를 효과적으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관련 연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크지만, 동시에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에서 생산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아카이브센터가 꼭 필요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특정 과학관이라는 개별 기관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센터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을 먼저 공유해야 하고, 이는 한국 현대 과학사 연구자들과 함께 과학관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과학관은 초기부터 과학센터와 과학박물관의 복합적인 기능을 요구받았지만, 현실적으로 과학센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과학관이 한국 사회와 역사 속에서 과학기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기능했는가를 보여주며 관련 기록을 보관하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의 학교 과학교육이 지식 위주의 인지적 영역에 초점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관은 과학기술의 정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과학기술이 지닌 다양한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과학관이 자신의 역할을 재규정하고 확대하는 데도 의미를 지닌다.
표 1 전상운이 제안한 한국과학기술사 전시 주제(전상운, 『종합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분야 전시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 (국립과학관, 1983), 2-3 정리).
| 주제 | |
|---|---|
| 하늘과 땅의 과학 | 천문도, 해시계와 물시계, 천문관측, 기상 관측, 지도와 지지 |
| 한국의 산업기술 | 인쇄기술, 한국종이, 금속, 도자기와 유리, 도구, 동력과 에너지, 직조, 칠공예, 통신, 선박, 군사기술, 토목, 건축, 한국의 기술서, 한국의 기술자 |
| 사람과 생명의 과학 | 의약학, 농업과 수산, 박물학 |
표 2 1990년 국립중앙과학관 한국 과학기술사 분야 전시(출처: 『과학관지』 3 (1991), 22-23.)
| 코너명 | 전시 내용 |
|---|---|
| 의 · 식 · 주 | 농경의 변천, 한국인의 식생활, 한국인의 의생활, 한국의 가옥과 건축의 미 |
| 가공 | 금속가공과 지혜, 종이와 인쇄, 흙의 예술, 특산물, 국악기 |
| 하늘과 땅의 과학 | 천문과 기상 관측, 지리 |
| 과학기술과 도구 | 도구, 군사기술, 한의 의약학, 한국의 옛 과학자와 과학기술 서적, 옛 과학기술의 교류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