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논문
파라켈수스의 신비주의적 지식관: 경험적 자연 연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발행: 1995년 1월 · 17권 · pp. 13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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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우주선은 20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등장한 새로운 물리학의 연구 분야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 풀리지 않고 있던 우주선 분야의 주요 문제는 바로 우주선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두가지 가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우주선이 감마선과 같은 광자라는 가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주선이 전자와 같은 대전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중 광자설이 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미국의 밀리칸은 광자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30년경까지 이 두 주장은 모두 가설에 머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컴프톤은 우주선연구에 뛰어들어 광자설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증거를 찾아내었다. 1932년부터 약 18개월 동안 전세계 물리학자 60여명을 동원해 지구 전역에서 실시한 '대세계 우주선조사'를 통해 컴프톤은 지구자기 위도가 변함에 따라 우주선의 강도가 달라지는 현상을 아주 뚜렷하게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대전입자의 운동만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위도효과의 발견은 우주선의 본질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1927년에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클레이가 위도효과를 처음으로 측정했었지만 그의 측정값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오차로 치부되었다. 위도효과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고 하전입자설을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 일조한 사람은 바로 컴프톤이었다.
그러나 컴프톤의 결과가 과학자들과 대중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밀리칸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리칸 역시 이전에 같은 실험을 했었지만 그는 위도효과를 측정하지 못하였다. 밀리칸은 자신의 데이타가 옳고 컴프톤의 것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반대로 컴프톤은 밀리칸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결과가 옳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두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들 사이에서 위도효과의 존재 여부를 놓고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논문은 왜 컴프톤이 그와 같이 위험한 대조사를 시작했으며 밀리칸과의 논쟁은 어떻게 촉발되었고 그 논쟁과 컴프톤의 1933년 이후 연구와의 관련성은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있다. 컴프톤과 밀리칸은 우주선의 본질에 관해 대립하고 있던 두 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그들이 각자 실험에 사용했던 기구나 그것들의 오차의 원천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소들, 그리고 데이타를 모으고 결과를 분석하는 방법 등에서 완전히 달랐다. 위도효과의 측정을 두고 컴프톤과 밀리칸이 얻어낸 전혀 다른 결과는 바로 이러한 실체적인 차이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 컴프톤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자신보다 더 인기있던 밀리칸과 같은 거물급 과학자를 상대로 싸움을 넘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컴프톤은 우주선연구에 뛰어들어 광자설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증거를 찾아내었다. 1932년부터 약 18개월 동안 전세계 물리학자 60여명을 동원해 지구 전역에서 실시한 '대세계 우주선조사'를 통해 컴프톤은 지구자기 위도가 변함에 따라 우주선의 강도가 달라지는 현상을 아주 뚜렷하게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대전입자의 운동만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위도효과의 발견은 우주선의 본질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1927년에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클레이가 위도효과를 처음으로 측정했었지만 그의 측정값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오차로 치부되었다. 위도효과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고 하전입자설을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 일조한 사람은 바로 컴프톤이었다.
그러나 컴프톤의 결과가 과학자들과 대중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밀리칸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리칸 역시 이전에 같은 실험을 했었지만 그는 위도효과를 측정하지 못하였다. 밀리칸은 자신의 데이타가 옳고 컴프톤의 것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반대로 컴프톤은 밀리칸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결과가 옳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두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들 사이에서 위도효과의 존재 여부를 놓고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논문은 왜 컴프톤이 그와 같이 위험한 대조사를 시작했으며 밀리칸과의 논쟁은 어떻게 촉발되었고 그 논쟁과 컴프톤의 1933년 이후 연구와의 관련성은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있다. 컴프톤과 밀리칸은 우주선의 본질에 관해 대립하고 있던 두 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그들이 각자 실험에 사용했던 기구나 그것들의 오차의 원천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소들, 그리고 데이타를 모으고 결과를 분석하는 방법 등에서 완전히 달랐다. 위도효과의 측정을 두고 컴프톤과 밀리칸이 얻어낸 전혀 다른 결과는 바로 이러한 실체적인 차이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 컴프톤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자신보다 더 인기있던 밀리칸과 같은 거물급 과학자를 상대로 싸움을 넘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