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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Jörg Rheinberger, Split and Splice: A Phenomenology of Experiment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3), 256 pp.

고경빈1

1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Reviewed work: Hans-Jörg Rheinberger, Split and Splice: A Phenomenology of Experiment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3, 256

Published: April 2026·Vol. 48, No. 1·pp. 271-279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271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Hans-Jörg Rheinberger)의 『쪼개고 이어 붙이기(Split and Splice)』1는 20세기 분자생물학의 역사를 추적하며 과학 지식이 “실험”이라는 창의적인 실천으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 책은 실험이 현실 세계의 일부를 “쪼개서(split)” 제한된 조건 속에 놓고, 물질적 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것의 의미 있는 “흔적(traces)”을 남긴 뒤, 다시 그 흔적들을 “이어 붙이기(splice)”하여 맥락화하는 과정임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저자의 의도가 단순히 이러한 과정을 기술하는 데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찾아본 글과 영상에서 라인베르거가 오랜기간 고민했던 역사적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1980년대의 라인베르거는 베를린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분자생물학 실험을 하던 과학자였다. 그는 계속 실험 과학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석사과정까지 공부했던 철학의 길로 다시 돌아갈지 고민을 하던 중 1989-1990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연구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라인베르거는 자신의 연구 분야였던 단백질 합성의 초기 역사를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집중을 하며, 20세기에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의 종양학자 폴 자메츠닉(Paul Zamecnik)을 중심으로 한 연구팀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았다.2 자메츠닉 연구팀은 오늘날 transfer RNA(tRNA)의 기능 규명과 분자생물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라인베르거는 194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작성된 이들의 자료를 시간 순서대로 읽으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메츠닉 연구팀의 초기 연구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tRNA나 분자생물학적 개념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은 사실 병원에서 암 연구의 일환으로 세포의 비정상적 성장, 즉 악성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는 처음 질문과 점점 멀어졌고, 연구의 중간 단계에서 연구진들은 생화학적 문제에 천착하다가, 1960년대 초에는 놀랍게도 유전 암호 해독이라는 분자생물학의 핵심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라인베르거는 과거 자메츠닉 연구팀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의 연구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암 연구에서 시작했던 연구가 어떻게 분자생물학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4

자메츠닉 연구팀의 이야기는 『쪼개고 이어 붙이기』의 핵심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인베르거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독자적인 과학사 방법론을 발전시킨 배경이 되었다. 라인베르거는 자메츠닉 연구팀의 사례가 거시사(macrohistory)의 관점에서 시대를 거쳐 작동하는 관념의 흐름을 추적하는 관념사(history of ideas)나 여러 학문 분야 속에서 분자생물학이라는 특정 분야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분야사(history of disciplines)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148). 이러한 접근들로는 자메츠닉 연구팀의 연구처럼 아직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 즉 tRNA와 같은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불확정적인 상황에서 탐구 대상의 출현과 그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 과정을 추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조지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인식론적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과학사의 중요한 과제로 보았다. 그는 17-18세기에 “reflex(반사)”와 같은 과학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이 서로 다른 탐구 영역들 속에서 방랑하고, 구체화되며, 지식으로서 자리 잡는 과정을 추적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인식론적 변화를 단절과 재구성을 통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과학사학자는 이러한 역동성을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0). 라인베르거는 과학이 변화의 역동성과 단절을 통해 전개된다는 캉길렘의 관점을 계승한다.하면서도, 그러나 캉길렘이 개념이 역사적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단절과 재구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었다면, 라인베르거는 그러한 단절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구체적인 실험이라는 실천 속에서 추적하고자 한다.

따라서 라인베르거의 연구는 개념이나 학문 분야에서 시작하지 않고, 탐구 대상이 처음으로 예상치 못하게 “흔적(traces)”을 남기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즉 새로움(novelty)이 출현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메츠닉 연구팀이 어떠한 물질이 특정 RNA와 결합하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처음 관찰한 순간을 예로 들 수 있다. 발견의 순간, 혹은 우연한 발견(serendipity)은 기존 학자들이 잘 다루어 오지 않은 영역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라인베르거의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인 기여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라인베르거가 썼듯이, “과학철학에서는 오랫동안 발견의 사건(events of discovery)을 직관(intuition)으로, 따라서 심리학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정당화(justification)의 절차만을 인식론에 남겨두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144).” 즉 기존 연구는 정당화의 단계만을 인식론의 대상으로 삼으며, 발견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는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인베르거는 새로움이 출현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연구의 행위자인 과학자와 그들이 탐구하는 “인식론적 대상(epistemic thing)”5 사이의 미시적인 공간으로서 “infra-experimental” 영역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이 영역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subduction”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하며 이를 매우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 이 개념은 기존 인식론의 범주인 귀납(induction), 연역(deduction), 가추(abduction)로 포착될 수 없는 과학적 지식 생성의 고유한 논리로서(11), 실험을 하는 과학자, 탐구 대상, 그리고 장치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이 의도치 않게 등장하는 과정이다. 라인베르거는 실험의 특정 물질적 조건 속에서 기존의 지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인식론적 대상이 출현함으로써 과거의 지식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 재구성되는 과정을 인식론적 “사건(event)”이라고 개념화한다(14; 137).

이러한 관점은 과학 지식이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인지에 대한 오래된 인식론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라인베르거의 “infra-experimental” 영역과 그 속에서 작동하는 “subduction”의 논리는 구성주의와 실재론 사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인식론적 대상이 실험자의 개입 없이는 드러날 수 없다는 점에서 구성주의적 측면을 가지는 동시에, 그 대상이 연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 지식 형성 과정에서 “사건”이나 “새로움”의 출현은 순수하게 인간의 정신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도 아니며, 반대로 자연이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도 아니다.6 이러한 점에서 과학적 지식 형성 과정을 보다 미시적인 물질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라인베르거의 방법론은 기존의 서술 방식으로는 포착되기 어려웠던 새로움의 출현과 그 우연적이며 불확정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과학 지식을 인간의 구성물이나 자연의 실재적인 반영으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연구자만이 아니라 물질도 행위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실험실 생활(Laboratory Life)』의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스티브 울거(Steven Woolgar)의 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들의 주장처럼 TRF(H)는 특정 기록하기 장치 없이는 인식론적 대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실험의 대상이 되는 분자의 존재는 특정 실험 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었다.7 그런데 『실험실 생활』과 『쪼개고 이어 붙이기』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라인베르거는 단순히 기록하기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넘어서, 특정한 “실험 시스템(experimental system)”8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식론적 대상이 출현할 수 있는 우연성(contingency)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우연성은 특정한 실험 시스템, 즉 물질적 기술 장치와 절차, 그리고 실험을 반복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한 장 속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한다. 라인베르거는 실험 시스템이 열어 놓은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우연성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채널화된 우연성(channeled contingency)”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자메츠닉 연구팀은 단백질 합성 과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방사성 동위원소 추적 기술과 세포 추출물 시스템을 결합하였고, 그 결과 아미노산이 단백질로 직접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RNA 분자와 먼저 결합한다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라인베르거는 자메츠닉 연구팀의 사례에 대해 처음에 제기되었던 의문―암 연구에서 출발한 연구가 어떻게 분자생물학의 핵심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는가―이 자메츠닉 연구실 과학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순수한 자연에서 발견된 것도, 또는 순수한 우연도 아닌, 물질적 조건과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난 채널화된 우연성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논하는 STS의 접근과 구별된다는 점이다.9 라인베르거는 기술적(technical) 요소와 인식론적(epistemic) 요소가 실험 과정 어떠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대상을 생성하는가를 질문하는데, 이때 이 둘을 분리해서 논의하지 않으면 이들의 상호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플라크(plaque) 기술은 처음에는 바이러스를 가시화하기 위한 “기술적” 도구였는데, 실험을 반복하면서 플라크의 형태 자체가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플라크의 크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도록 조건을 바꾸자 새로운 돌연변이체가 발견되었고, 이 실험 과정 속에서 유전적 재조합이라는 예상치 못한 “인식론적” 대상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다시 기술을 변형시켜 유전자 지도를 만드는 “기술적” 도구로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기술적 요소와 인식론적 요소는 서로를 반복적으로 변형시키며 공진화(co-evolve)한다. 이러한 점에서 라인베르거의 “infra-experimental”한 차원에서 “기술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을 분리하여 추적하는 접근은 양자가 어떻게 서로 얽히며 변형되는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과학 지식이 형성되는지 분석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서 책에서 “실험”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 과학 지식이 물질적·인식론적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분석 단위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tRNA 기능의 발견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중요한 연구들은 자메츠닉 연구팀이 구축한 실험 시스템 내부에서 이루어졌지만, 라인베르거는 이를 연구자 개인의 통찰이나 개별 실험의 성과로 환원하지 않는다. 실험 시스템은 연구자, 물질, 장치가 서로 얽혀 작동하는 하나의 장으로서, 그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이 출현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작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또 다른 맥락으로 어떻게 이동하는가? 라인베르거는 개별 실험 시스템이 고립된 단위가 아니라, 더 넓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실험 시스템들과의 연결되며,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식론적 대상들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실험 시스템들이 다양한 기술적·인식론적 요소를 공유하며 연결되고, 때로는 융합되거나 붕괴하면서 더 넓은 “실험 문화(experimental culture)”10를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자메츠닉 연구팀의 실험 시스템은 20세기 생명과학에서 형성된 시험관 내(in vitro) 실험 문화 속에 위치해 있었다. 자메츠닉 팀의 연구는 암 조직과 정상 조직 사이의 단백질 합성을 밝히는 데서 출발하였지만, 방사선 추적 기술을 사용한 결과 유의미한 차이가 보이지 않아 연구의 초점을 변경하게 된다. 이 전환은 당시 시험관 내 실험 문화의 기술적ㆍ인식론적 변화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초원심분리기를 통한 세포 분획과 방사성 표지가 결합된 새로운 실험 체계는 세포 전체를 다루는 대신, 분리된 구성 요소들 간 상호작용과 그 과정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대상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이끌었다. 그 결과 단백질 합성은 조직 간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분자적 결합 메커니즘의 문제로 재정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RNA 분획이 드러났고, 훗날 tRNA로 개념화되는 인식론적 대상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상은 특정 연구실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하며 점차 안정화되었고, 결국 유전 암호 해독이라는 분자생물학의 핵심 문제로 이어졌다(134, 135). 이러한 점에서 자메츠닉 연구는 균질액, 초원심분리기, 방사성 표지와 같은 기술이 결합된 시험관 내 실험 문화라는 앙상블 속에서, 새로운 대상이 출현하고 이동하며 안정화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가면, 과학의 역사는 서로 다른 실험 시스템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연결되고 재구성되며 형성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운동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곳곳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단절을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구조를 지닌다. 즉 서로 다른 실험 문화 속에서 물질적ㆍ인식론적 요소들이 얽히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식론적 사건들이 발생하고, 이 사건들은 새로운 대상을 출현시키는 동시에 이전의 지식 체계를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게 만든다. 그 결과 과거의 지식은 새로운 맥락 속에서 다시 의미를 획득하며 재구성된다. 이러한 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향한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실험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차이(difference)”를 생성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회귀적(regressive)”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역사적 “구조”에 주목했던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와도 흥미로운 비교가 될 수 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나 뉴턴 역학 같은 다양한 과학사적 사례들을 바탕으로, 과학의 역사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 위기(crisis), 그리고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구조를 통해 설명한다. 그의 관심은 과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존의 지식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체계로 이행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다. 이때 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기본적인 문제 설정과 개념 체계,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며, 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11

반면 라인베르거의 분석은 20세기 분자생물학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별 실험과 실험 시스템의 작동을 따라가며 보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과학의 변화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념과 대상이 완전히 폐기되는 방식으로 포착되기보다, 서로 다른 실험 시스템들이 시공간 속에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로 나타난다. “soluble RNA”라는 과거의 인식론적 대상이 이후 “tRNA”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좋은 예시이다. 또한 라인베르거의 분석은 개별 실험에서 생성되는 흔적(traces)의 수준에서 출발하여, 실험 시스템, 나아가 실험 문화로 확장되는 체계적이면서 다층적인 구조를 취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역사를 미시적 분석과 거시적 구조를 함께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쿤과 라인베르거는 모두 과학의 변화를 선형적 축적이 아닌 단절로 인한 구조적 변형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전자가 패러다임 간의 단절과 공약불가능성을 중심으로 과학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후자는 실험적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ㆍ인식론적 상호작용을 추적함으로써 과학 지식의 형성을 보다 연속적이고 다층적인 운동으로 파악한다.

이는 과학의 발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과거의 지식을 재구성하게 만드는 “사건”으로서의 새로움(novelty)의 출현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라인베르거의 작업이 주는 통찰은, 우리가 과학에서 “발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특정 개인의 통찰이나 선택의 결과로, 혹은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낸 결과로 환원하는 설명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과학자는 실험 시스템과 문화가 열어 놓은 가능성의 장의 어떤 시공간의 좌표 위에 위치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그 장이 이끄는 방향을 더듬어 나가는 행위자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과학적 발견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할 역사적 질문은 “누가 발견했는가”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과 물질적 요소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가, 그러한 관계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환경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과학자는 그 속 어떠한 위치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유하고 탐색하였는가일 것이다.

『쪼개고 이어 붙이기』는 라인베르거가 과거에 1980년대 후반 자메츠닉 연구팀의 자료를 분석하며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장기적인 탐구의 결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연구자의 의도나 자연의 필연성으로 환원하는 대신, 실험 시스템 내부의 물질적 조건과 상호작용,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을 통해 과학에서 새로운 지식이 출현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이 책은 과학 지식이 이미 확립된 개념이나 이론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일련의 인식론적 대상들의 재구성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라인베르거가 자메츠닉 연구팀의 자료를 살펴보게 되면서 마주한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과학 지식 형성의 과정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만들었고, 하나의 중요한 과학사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Notes

  1. 1“Split”는 쪼개는 움직임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결과를 의미한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analysis”라는 단어가 명확한 구분과 깔끔한 결과를 의미하기에 사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split”은 탐색적 움직임과 직관의 영역을 가리킨다. “splicing”은 서로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부분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을 뜻한다. 여기서도 의도적으로 “synthesis”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결합을 통해 부분들이 사라지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splicing”은 결합의 흔적을 남기며 필요하면 다시 해체될 수 있는 연결이다. 서론 참고.
  2. 2ISPF - CNR, “Historical Epistemology: European perspectives - 14 novembre 2022”, https://www.youtube.com/watch?v=qEnwgxKQhq0 (2026년 4월 12일 접속).
  3. 3Nicole Kresge, Robert D. Simoni, and Robert L. Hill, “The Discovery of tRNA by Paul C. Zamecnik,” Journal of Biological Chemistry 280, no. 40 (2005): e37–e39.
  4. 4HKW 100 Years of Now, “Speaking from the Laboratory | Mark B. N. Hansen & Jans-Jörg Rheinberger”, https://www.youtube.com/watch?v=JEtVZyhXXYI (2026년 4월 12일 접속).
  5. 5라인베르거의 인식론적 대상(epistemic thing)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연구의 탐구 대상(object of knowledge)”이지만 아직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대상이다. “thing”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확정적이고 아직 심판 중인 것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다(105). 다른 하나는 기술적 매개, 즉 특정 실험 장치, 도구, 환경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형성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태와 존재가 변화 가능하고 일시적이다. 또한 이때 “실험”이란 이전에는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었던 것이 실험 장치와 절차를 통해 특정한 인식론적 대상으로 가시화(manifestation)되어 출현하는 과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1장과 6장, 그리고 1997년 출판된 Hans-Jörg Rheinberger, Toward a History of Epistemic Things: Synthesizing Proteins in the Test Tub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의 2장 참고.
  6. 6라인베르거는 사회구성주의적 관점과 실재론 관점의 이분법을 넘어 제3의 길로서 이러한 “실천적(praxeological)” 관점을 제안한다. 자세한 내용은 8장 참고.
  7. 7Bruno Latour and Steve Woolgar, Laboratory Life: The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8. 8실험 시스템(experimental system)이란 특정한 기술적 장치와 절차가 결합된 역동적인 연구의 장으로서,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되며 그 내부에서 다양한 변화와 이동을 겪는다. 또한 독립적으로 발전한 시스템들은 서로 융합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복잡해진 시스템은 분화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책 전반에 걸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보다 자세한 정의는 6장 참고.
  9. 9Bruno Latour, Science in Action: How to Follow Scientists and Engineers Through Societ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10. 10라인베르거가 영감을 받은 미술사가 조지 쿠블러(George Kubler)의 은유를 빌리면, 과학의 흐름 형상은 하나의 “섬유 다발(fibrous bundles)”의 형태로 상상할 수 있는데, 이 섬유 다발은 다양한 길이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섬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섬유 다발의 이미지는 구조적 차원과 연쇄 형태를 동시에 포괄한다. 하나의 섬유는 개별의 실험 시스템(experimental system)이고, 여러 실험 시스템들이 기술적ㆍ물질적ㆍ사회적 요소를 공유하며 형성하는 실험 문화(experimental culture)는 섬유 다발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실험 문화란 단일한 실험이나 특정 연구 집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실험 시스템들이 공통된 기술적·물질적 기반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하나의 앙상블로 해석된다. 6장과 7장 참고.
  11. 11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50th anniversary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