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al Biography of Wood and Late Joseon Architectural Technology: Focusing on the Changdeokgung Yeonggeon Dogam Uigwe (1834)
1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강사 Seoul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191
Abstract
This study explores late Joseon architectural technology through the "cultural biography" of wood, focusing on the 1834 reconstruction of Daejojeon (大造殿) Hall in Changdeokgung (昌德宮) Palace. By tracing timber's journey from forest to palace, it illuminates complex socio-technical networks involving central administration, forestry policies (Songjeong, 松政), and naval logistics (Suyeong, 水營). Crucially, the study analyzes how the ecological constraints of the main beam (daedeulbo, 大樑) functioned as active "material resistance." The inability to procure ideal timber was not a procurement failure, but a catalyst that forcefully expanded the state's logistical network to the Tongjeyong (統制營, Naval Headquarters) in the south. The material ultimately imposed its own physical conditions, actively reconfiguring the royal architecture's scale from 45 to 36 bays. Finally, this research highlights the discrepancy between this physical reality and its idealized depiction in the Uigwe (儀軌, Royal Protocols). Rather than merely documenting dimensions, the Uigwe recorded the successful mobilization of a nationwide network condensed within the daedeulbo. Thus, the "life of wood" demonstrates how a natural entity acted as an active agent in reshaping royal space, transforming an architectural member into a symbolic monument.
머리말
순조 30년(1830) 창경궁의 침전을 중심으로 400여 칸이 소실되는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였다.1 이때 소실된 전각의 개건 논의는 이듬해 7월에 임금이 호조에 재건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극심한 흉년과 천재지변에 따른 열악한 재정 상황으로 공역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순조 33년(1833) 창덕궁에 한 차례 더 불이 났으니, 이번 화재로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은 물론, 징광로(澄光樓)ㆍ옥화당(玉華堂)ㆍ양심합(養心閤)까지 화재가 번졌다.2
1833년 화재 피해 지역은 사실상 정궁(正宮) 역할을 하던 침전과 편전 영역이었다.3 순조는 당시 경희궁(慶熙宮)으로 거처를 옮긴 상황이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자신의 생활 공간이자 정무 공간인 이곳의 재건 계획을 서둘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앞서 화재가 발생했던 창경궁과 함께 두 궁궐의 화재 영역을 동시에 재건할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흉년으로 민심이 좋지 않을뿐더러, 중앙 재정도 열악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 시행은 상당히 난감한 것이었다. 영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공사 기간 단축은 필수적이었다.4 공기(工期) 단축을 위해 영건도감(營建都監)은 낭비 없는 지출을 위해 계획을 철저히 해야만 했다.
도감의 계획에 따라 다종의 건축 자재는 나름대로 해결되었으나, 문제는 나무였다. 17세기 이후 산림의 황폐화가 가속하는 가운데,5 대규모 목재 건축물을 짓기 위해 요구되는 수많은 나무를 단기간에 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칫덩어리는 대조전에 들어갈 대들보용 나무였다. 순조는 불이 난 전각을 옛터에 그대로 중건하면서도 규모와 구조가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유지하고자 했던 대조전의 규모는 45칸으로 상당했고, 그 규모에 부합하려면 대들보는 “길이 30자[尺] 밑동 지름 3자[尺]”는 되어야 했다. 적격한 나무를 찾는 것도 문제였으나, 찾은 나무를 공사 현장까지 운송하는 데까지는 다시 수많은 인력과 수송 인프라가 필요했다. 기실, 이 나무를 구하는 기술이야말로 전근대 중앙의 권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건축기술이었다.
조선후기 관영 건축 공사 과정에 대한 논의는 건축학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어왔다. 특히 『화성성역의궤』를 중심으로 자재 조달 방식과 공정 전반에 대한 분석이 일찍부터 축적되었다.6 이 분야에서 김왕직은 현존하는 영건의궤를 전수 조사하여 조선후기 관영 건축을 건축경제사라는 학문 영역으로 정립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그는 재료의 수급 경로, 고용 노동의 변화, 예산 운영 체계를 거시적으로 분석하였다.7 그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영건의궤연구회의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이 출간되면서 조선후기 관영 공사의 과정, 건축기술, 도면 그리고 건축 용어를 망라한 종합적인 이해의 토대가 마련되었다.8
다만, 기존 연구는 건축물을 주로 “완성된 결과물”로 설정하고 그 통계적 수치를 구조화하는 데 주력한 측면이 있다. 즉, 성공을 거두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복잡한 작업 과정, 그 과정에서 형성된 여러 행위자의 연결고리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2001)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과학적 사실이나 기술이 성공을 거두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복잡한 작업 과정을 보지 않은 채, “블랙박스화(Blackboxing)”된 최종 결과물만 조명한 것과 같다.9 그 결과 자연적인 조건 또는 물질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여러 행위자의 목소리는 조명되지 못했다.
『영건의궤』는 중앙의 도감이 기록한 것이기에 중앙의 관점에서 물량의 조달과 예산의 수입지출이 작성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건축자재 조달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애로 속에서 다양한 층위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최단기간에 공사를 마쳐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적 조건 및 물질의 저항은 공정 일자를 계획하고, 인력과 재원을 마련하며,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무를 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 상당한 개입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의 대응이야말로 중앙은 물론 지방의 축적된 건축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축기술이란 비단 궁궐 영역에서 중앙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본고에서는 “완성품”으로서 궁궐이 아닌 “과정”으로서 영건에 주목하며, 왕실 건축물의 목재가 되는 “나무의 생애”10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나무에 주목한 이유는 영건 과정에서 이 “나무 구하기”가 가장 난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순조 34년 창덕궁 영건 과정에서 대조전 대들보용 목재의 부재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느슨한 연결망을 강력하게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자연 상태의 “나무”가 왕실 건축물의 “목재”로 가치를 획득해 가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그에 연계된 다층적 연결망을 통해 조선후기 건축기술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게 본 연구의 목표이다.11
기왕의 선행연구와 크게 다음 두 가지 지점에서 차별성을 갖고자 한다. 첫째, 물자 조달의 절차를 밝히는 데에서 나아가 그와 같은 특수한 네트워크가 형성된 맥락을 검토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산림 황폐화라는 위기 속에서 서남해 수영(水營)이 봉산(封山) 관리의 주체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 주목한다. 둘째, 물질의 저항이 지닌 기술적 함의를 고찰한다. 대조전 중건에 필요한 “지름 3자”의 대들보 부재는 물자 조달 연결망을 전국적으로 확장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초기 영건 계획을 변경하여 영건 위상을 재구성하도록 강제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다층위 행위자들의 목소리도 더불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무의 생애사”의 추적이 단순히 물자 조달 경로 추적을 넘어 조선 왕실이 어떻게 위급 상황 속에서 유연하게 행정적ㆍ재정적 기능을 확장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렌즈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대들보의 不在가 개입한 營建 계획
순조 33년(1833) 10월의 화재 직후, 열악한 재정 상황 탓에 기약 없이 미뤄지던 창경궁 중건이 창덕궁 영건과 함께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이는 새로 소실된 구역이 왕실의 최고 권위와 직결된 국왕의 침전과 편전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왕의 일상적 거처인 대조전이 지니는 상징적 위상은 재정적 한계를 넘어 대규모 공사가 즉각 시행되도록 하는 명분이 되었다. 순조가 곧바로 호조에게 대조전에 대하여 옛터에 그대로 중건하되 규모와 구조를 바꾸지 말도록 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12 인조 25년(1647) 작성된 『창덕궁수리도감의궤』를 참조하면, 기존 대조전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총 45칸이었다.13 이는 같은 시기 화재가 발생한 희정당(15칸), 징광루(20칸)와 비교해도 상당한 규모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규모의 공사를 강행하기에 민심은 좋지 못했다. 1832년 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극심한 흉년의 여파로 쌀값은 2배가 폭등할 정도였으며, 쌀가게 상인들까지 횡포를 부려 수만 집의 허다한 사람들이 굶주리는 지경이 되었다.14 서울에는 도적이 횡행할 뿐 아니라 평안도 지역에서는 천재지변이 심하게 일어나 민심을 고려해 창경궁 화재 복구 공역마저 중단된 상황이었다.15
민간뿐 아니라 중앙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았다. 당시 호조의 수입은 1년의 지출조차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선혜청(宣惠廳)까지 텅 비었고,16 군영(軍營)들의 자급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본래 호조는 전세(田稅)를 주 수입원으로 운영되었으나, 조선 후기 호조의 재원이 만성적으로 부족해지기 시작하면서 호조는 타관서의 재원을 일부 활용하기 시작하였다.17 이때 선혜청과 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 등 군문(軍門)이 호조의 만성적 재정 부족 재원을 메우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데,18 그마저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강행된 궁궐 영건 사업은 지출을 최소화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계획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영건 계획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산안을 짜야 한다. 이에 순조가 먼저 나서서 당시의 상황을 ‘천겸지시(荐歉之時)’ㆍ‘겸황지시(歉荒之時)’라고 말하며 어공(御供)을 줄여 영건 비용에 보탤 것을 명했다. 이어서 영남(嶺南)과 관동(關東) 두 지역의 공물인 인삼의 양을 권감(權減)하여 그만큼을 영건 비용으로 충당(①ㆍ②)하고, 사도(四都)의 갑옷과 투구에 쓰일 쌀값(③) 그리고 내국(內局)의 연무(燕貿)19 절반 값(④)을 영건 비용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이것만으로는 예산이 부족하여 비변사에서 추가적인 예산안을 올렸으니, 그 내용에는 선혜청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되어야 할 치선(雉鮮) 등의 공물(⑤), 지난해 관동 지역에서 인삼 공물을 감면해주면서 발생한 잉여분(⑥), 영남의 조운(漕運)에서 남은 돈[漕餘錢](⑦) 등을 우선 옮겨 사용할 것이 포함되었다. 나아가 금군(禁軍)과 어영(御營) 두 군영(軍營)의 번차(番次)를 조정하여 군포(軍布)를 줄이는 동시에 군사 인력을 영건 현장에 투입해 모군(募軍) 고용 비용을 절감하자는 제안(⑧ㆍ⑨)도 함께 제기되었다.20 19세기에 이르면 조선 정부는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위영과 어영청의 정번(停番)을 정례화하고 또 국가적 수요가 있을 때 추가 정번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21 이번 영건 공사에서도 부족한 공사비용 충당을 위해 정번을 단행하여 부족한 예산에 보충한 것이다.
표 1 營建物力區劃數 (초기 예산안)
| 항목 | 연번 | 세부항목 | 錢 |
|---|---|---|---|
| 임금의 特劃 | ① | 嶺南 貢蔘 | 38,400냥 |
| ② | 關東 貢蔘 | 46,080냥 | |
| ③ | 四都 甲冑 | 17,876냥 4전 | |
| ④ | 內局 燕貿 | 11,229냥 4전 2푼 | |
| 비변사 제안 | ⑤ | 日下 雉鮮 減貢 | 26,630냥 4전 |
| ⑥ | 關東 減蔘 贏餘 減貢蔘 | 29,465냥 8전 | |
| ⑦ | 嶺南 漕餘 | 10,000냥 | |
| ⑧ | 禁衛營 停番 | 65,217냥 | |
| ⑨ | 御營廳 停番 | 65,184냥 | |
| 총액 | 310,083냥 2푼 | ||
이렇게 여러 관서의 남는 재원을 최대한 끌어모은 중앙 정부는 창덕궁 영건 비용으로 약 31만 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예산안은 <표 1>의 『창덕궁의궤』의 「물력구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기에 계획된 예산과 조달된 자원이 실제 공사 진행에 맞춰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22 궁궐 영건의 예산 계획은 국가의 재정 동원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예산안이 마련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공역 전반에 대한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18세기 이후 공역의 전반적인 계획은 영건도감에서 주도했다.23 이번에도 영건도감에서는 낭비 없는 공사비용의 지출과 공사 기한 준수를 위해 필요한 물량을 정하고 자재의 규모 및 공사 현장까지 운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다.
도감에서는 먼저 자재 조달 일정을 조율해야 했는데, 육로 운송보다 하천과 연해 항로를 통한 선운 활동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시기에 결빙기는 공정 계획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변수였다. 특히 재목의 경우 강을 통해 운송되기에 한강의 수심이 얕아지거나 동결되는 결빙기에는 뗏목 방류가 어려워진다. 창덕궁 화재가 발생한 시점은 음력 10월 17일이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강은 평균적으로 음력 12월 초부터 결빙되기 시작했으며, 대체로 음력 2월 초가 해빙의 하한선이었다.24 즉, 공사가 시작된 시점부터 강이 본격적으로 얼기 전까지 약 1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사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 기간에 상당 부분의 자재 조달은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에 영건도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필요한 각종 건축 자재를 끌어모았다. 붓을 만들기 위한 돼지털[家猪毛]은 평안감영과 개성부, 아교(阿膠)에 필요한 소가죽[牛皮]은 수원부ㆍ개성부ㆍ광주부, 단청[丹雘]에 쓰일 기름[油]과 끈으로 사용될 생갈(生葛)은 강원감영, 질기고 단단한 종이[扇子紙]는 전라감영과 경상감영, 기와와 벽돌[瓦甎]은 중앙의 와서(瓦署)와 황해감영에 할당되었다. 공사에 필요한 각종 철물은 주로 황해감영에 할당되었는데, 해당 읍에서 실물 마련이 어려우면 돈으로 대납(代納)하도록 하였다.25 그 상납된 동전을 삼군영(三軍營) 즉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에 지불하면, 그곳에서 실물을 조달하였을 것이다.26
모든 건축 자재 중에서도 목재 마련 계획은 유독 까다로웠다. 일단, 조선의 궁궐이 목조 건축물인 만큼 영건 공사에 필요한 수많은 건축 자재 중에서도 목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사실은 「실입」 하단의 “영건도감장료급실입잡물절가수(營建都監匠料及實入雜物折價數)” 즉, 소요된 장인 품삯 및 자재 비용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인 품삯[匠料錢](71,980냥)을 제외하면, 목재 마련 비용[木物價錢]이 24,760냥으로 압도적이다.

표 2 實入雜物折價數 (자재 조달 회계 내역)
단위: 兩
| 품목 | 비용 (%) |
|---|---|
| 匠料錢 | 71,980 (50.26) |
| 木物價錢 | 24,760 (17.29) |
| 石子價錢 | 5,460 (3.81) |
| 鐵物價錢 | 10,830 (7.56) |
| 彩色漆物價錢 | 8,500 (2.64) |
| 瓦甎價錢 | 7,640 (5.33) |
| 窓戶價錢 | 3,780 (2.00) |
| 紙席價錢 | 2,690 (1.88) |
| 車馬運價錢 | 8,500 (5.94) |
| 雜物價錢 | 4,700 (3.28) |
| 합계 | 143,210 |
더 큰 문제는 17세기 이래 조선이 심각한 산림 황폐화 문제를 겪고 있던 사실에서 비롯됐다.27 일찍이 조선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산림 보호 정책을 시행하면서 의송지(宜松地; 封山), 즉 국용 보호림을 지정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635곳의 봉산이 지정되기에 이르고,28 또 사양산(私養山)의 민간 벌채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어 이제 사양산에서 벌채할 때조차 반드시 관에서 발급하는 첩문(帖文)을 받도록 조치하였다.29 그러나 여전히 조선 후기 내내 소나무 부족 문제는 ‘대정(大政)’ 중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 심각했다.30 따라서 단기간에 다종ㆍ다량의 나무를 구하기 위해 도감에서는, 중앙에 축적된 전국 단위의 산림 정보를 총동원하여 조달처를 전략적으로 안배해야 했다.
본래 궁궐 영건과 같은 국가적 대규모 공역에 소요되는 목재는 원칙적으로 국용 보호림인 봉산에서 충당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대규모 공사에 필요한 막대한 물량을 오직 봉산에서만 구하기란 어려웠을뿐더러,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인근 봉산 벌목 강행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봉산에서의 벌목은 백성들의 강제 부역이 필연적이기에 이는 봉산 인근 주민들의 상당한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18세기부터는 민간 목재상이 등장하면서 그들을 통한 민간 목재 공급망이 활성화되고 있었다.31 이에 이번 영건도감에서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재목은 패장(牌將)을 파견하여 사양산에서 매입해 오도록 하고, 체대목(體大木) 정도의 재목은 봉산에서 벌목하기로 계획하였다. 전자는 강원도 양천(狼川)ㆍ인제(麟蹄)ㆍ영월(寧越)ㆍ금성(金城)의 사양산이, 후자는 충청도 안면도의 봉산이 지정되었다.
이와 같은 도감의 체계적인 계획하에 재목은 순차적으로 공사 현장에 도착하였고, 그 덕택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약 1개월 뒤인 12월 초4일 대조전ㆍ희정당ㆍ징광루의 상량식이 거행되었다.32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현장에 도달한 그 어떤 재목도 대조전 대들보로 쓰기에 규격이 작았기 때문이다.
(가) 癸巳(1833) 12월 □일 三道水軍統制使가 牒報를 올리오니, 곧 監關 내로 부치십시오. 이번 영건 시 상량할 날짜가 다급한데, 마땅한 대들보를 갑자기 구하기 어려워 우선 다른 곳의 들보를 옮겨 가져다 썼으나 결국 크기가 작아 부족합니다. 내년 봄 영건 시에는 체대목을 대들보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안면도 및 호남의 섬들의 나무는 길이가 30자 밑동 지름 3치에 적합하다 칭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통영 관할 내 체대목이 예로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입춘 전에 취할 대들보용 나무 네 그루를 봄에 운반해 올 뜻을 비변사에 보고하여 결재를 받았으니, 지금 이것을 발관합니다.33
대들보의 규격은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인 경간(徑間)을 늘릴수록 보에 가해지는 구조적 부담은 커지며, 이를 안전하게 지탱하기 위해서는 보의 단면, 특히 부재의 높이(춤) 또한 이에 비례하여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기술로 구할 수 있는 가장 길고 단단한 나무는 건축의 규격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인으로 기능하였다. 순조는 대조전이 지닌 상징성을 고려하여 그 규모와 구조가 이전과 다름없기를 바랐으며, 그러하기에 대들보용 나무의 확보는 그만큼 중요했다. 즉, 대들보는 단순히 하나의 건축 부재를 넘어, 왕실 건축물의 권위와 그 격을 증명하는 가치를 지녔다.
1833년 12월 초4일에 거행될 상량식 준비 과정에서 현장에서 소지하고 있던 재목은 모두 그 가치에 부합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건물의 대들보까지 임시로 가져다 사용한 것인데, 그마저 크기가 부족하고 또 안면도 및 호남에서도 기존 대조전 영건 계획에 적격한 나무를 찾지 못하니 통영으로까지 수색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통영이었을까? 즉, 영건도감은 어떠한 건축 지식을 배경으로 통영에서 대조전 대들보용 나무를 구할 계획을 했을까? 다시 강조하듯, 1833년 극심한 재정난과 흉흉한 민심 속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영건 공사는 비용 절감과 공기 단축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도 공사 현장에서 가장 먼 서남해 끝자락에서 재목을 구하는 방안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도출된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앙 정부가 축적하고 있던 산림 지식과 자재 조달 네트워크를 복합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중앙의 어떠한 건축적ㆍ생태적 지식이 자연 상태의 “나무”를 “재목감”으로 선정하게 하였는지, 그 벌채된 “재목”들이 어떠한 조달 경로를 거쳐 공사 현장에 도착해 전각의 “목재”가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나무”가 만들어낸 물자 조달 네트워크
1) “나무”에서 “재목감”으로: 중앙의 건축 지식, 松政
앞서 언급하였듯, 영건도감은 통제영에 대조전 대들보용 나무의 수색 임무를 위임하기 전에 강원도 양천ㆍ인제ㆍ영월ㆍ금성 그리고 충청도 안면도에서 재목을 구하도록 계획하였다. 안면도와 강원도가 재목 조달 지역의 최우선으로 선정된 이유는 우선 지리적 요건을 고려한 그간의 영건 경험의 축적 결과였다.
강원도 낭천, 금성 등 지역은 모두 북한강 상류 지역으로 서울의 한강과 연결되는 강변에 자리하였다. 이와 같은 수운(水運)의 편의성으로 이 인근은 일찍부터 자주 목재 공급처로 이용되었는데, 실제로 화성건설 시에도 낭천ㆍ금성 등지 강원도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34
한편, 충청도의 안면도는 일찍이 ‘안면송(安眠松)’이라 불릴 정도로 품질이 우수한 소나무가 많이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해상 운송의 유리한 점이 있어 예로부터 한양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의 주 공급지였다. 그만큼 봉산도 많았는데, 1873년(고종 10) 『충청수영소관송전성책(忠淸水營所管松田成冊)』을 보면 안면도에만 의송산이 71곳이나 있었음이 확인된다.35
그런데, 양자는 나무 관리의 주체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강원도의 경우 감영이 관리하는 한편, 안면도의 경우 성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영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재목 조달의 과정에서 서남해 지역 수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수영이 나무 관리의 핵심 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단순히 해상 운송의 편의성을 위해 해안에 위치한 수영이 이를 담당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기에 수영이 산림 관리를 본격적으로 독점하기 시작한 기점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서남해 지역의 나무 관리는 주로 지방 수령이나 관찰사와 같은 민정 계통이 주도하거나 해운판관(海運判官) 등 특정 관직이 담당하였다.36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재목 특히 선박 건조에 필요한 소나무 부족에 대한 공포가 증대하면서 서ㆍ남해의 연해 지역에 국가 차원의 산림이 확대되었는데, 이때 핵심 집행 기구로 수군진(水軍鎭)이 대두하였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으면서 군사제도가 국가 산림 행정의 핵심 주체로 부상한 것이다.37 이와 같은 흐름은 이후에도 이어져, 각 도 수영이 산림보호를 맡게 되었다.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만기요람』에서 확인되는 수영 속읍에 설치된 봉산의 비율이다. 삼남지역 561곳의 봉산 중 수영 속읍에 설치된 것이 무려 432곳이니 이는 전체의 77%에 해당한다.38 군현 단위에서 송정 감독은 대부분 수사(水使)가 행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정에 대한 정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체계화되었다. 정조 12년(1788)에 제정된 『제도송금사목(諸道松禁事目)』39은 소나무 보호를 위해 전방위적이고 엄격한 통제 및 관리를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각 읍 수령의 권한은 물론 섬과 해안 지역의 소나무 책임 주체로서 변장(邊將)의 역할, 나아가 최고 말단에서 봉산을 관리하는 자들인 산지기[山直]와 감관(監官)에 관한 규정까지 세세하게 적혀있다. 특히 각 수영에게는 재목의 수급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장부를 만들어 수시로 비변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각 읍에서는 작은 소나무라도 벌채하기 전에 비변사로부터 허가를 받은 낙인을 받아야만 했고, 이 낙인은 통제영ㆍ수영에서 파견한 초관(哨官)이 동행해 수행을 확인한 후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무―수영 간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그리고 각 수영에서는 자체적으로 관할 봉산의 소나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기재하고, 수시로 중앙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40
여기에서 대조전 대들보용 나무를 강원도ㆍ안면도에서 구하지 못하자, 서남해 끝인 통제영에서 구하도록 계획한 이유가 드러난다. 통제영은 수영 중에서도 경상ㆍ충청ㆍ전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부였다. 조선 후기 군영 기능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통제영 역시 군사 지휘에 그 역할이 국한되지 않고 국가의 군수용품을 관리하고 생산하는 기구로 기능하였는데,41 그중에서도 군선 건조와 관리는 단연 통제영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통제사에게 군선 건조를 대비하여 상시로 소나무를 관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그 결과 통제사는 중앙으로부터 양송처 관리의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소나무 현황을 기록하는 장부인 『송안(松案)』을 작성하고 관리하며, 때로는 직접 군관을 파견해 불법 벌채 등을 단속하였다. 실제로 통제영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송처를 관리하는 관청 중 하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충청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경도 5도에 총 635개의 양송처가 있었는데, 그중 통제영이 관리하는 경상우도에만 229처가 있었다. 이는 전국 양송처의 33% 비중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특히 거제도에는 전국의 1/6에 해당하는 126개 처가 있었다.42
흥미롭게도 현존하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남해의 관영 건물이 유독 큰 대들보를 사용했다. [표 4]는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중 대들보 크기를 기준으로 내림차순 한 것이다. 두 개의 보를 겹쳐 사용한 희정당을 제외하면 단일 부재 기준 가장 큰 대들보를 사용한 건축물은 여수 진남관이다. 사찰 건물을 제외하면 대체로 남해 지역 수영의 중심 전각이 상위에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통영의 세병관도 포함되어 있다. 영건도감에서 근거리에서 더 수색을 이어나가기보다 땅끝의 남해 통영에서 대들보용 재목을 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표 3 주요 목조 건축물의 대들보 핵심 치수 내림차순 [구성준 (서울대 건축사연구실) 제작ㆍ제공]
(단위: mm)
| 연번 | 이름 | 세기 | 유형 | 길이 | 춤 | 너비 |
|---|---|---|---|---|---|---|
| 1 | 창덕궁 희정당 | 20세기 | 궁궐 | 8,803 | 1,054 | 555 |
| 2 | 여수 진남관 | 18세기 | 관영 | 8,895 | 895 | 802 |
| 3 | 밀양 영남루 | 19세기 | 누정 | 7,244 | 852 | 678 |
| 4 | 대구 동화사 대웅전 | 18세기 | 불교 | 8,630 | 750 | 600 |
| 5 | 하동 쌍계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10,306 | 745 | 745 |
| 6 | 김천 직지사 대웅전 | 18세기 | 불교 | 8,843 | 743 | 673 |
| 7 |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 18세기 | 불교 | 6,113 | 742 | 590 |
| 8 | 구례 화엄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10,419 | 730 | 730 |
| 9 | 통영 세병관 | 17세기 | 관영 | 11,309 | 726 | 702 |
| 10 | 부산 범어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9,654 | 720 | 550 |
| 11 | 부안 개암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9,403 | 720 | 720 |
| 12 | 논산 쌍계사 대웅전 | 18세기 | 불교 | 10,274 | 708 | 542 |
| 13 | 고흥 능가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9,507 | 680 | 556 |
| 14 | 영광 불갑사 대웅전 | 18세기 | 불교 | 3,709 | 678 | 484 |
| 15 | 고창 선운사 만세루 | 18세기 | 불교 | 7,920 | 671 | 643 |
| 16 | 강화 전등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7,402 | 658 | 650 |
| 17 |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 17세기 | 학교 | 8,424 | 656 | 625 |
| 18 | 기장 장안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5,679 | 646 | 545 |
| 19 | 나주 금성관 정청 | 17세기 | 관영 | 8,675 | 642 | 546 |
| 20 | 덕수궁 중화전 | 20세기 | 궁궐 | 8,621 | 642 | 607 |
| 21 | 고창 선운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7,057 | 633 | 516 |
| 22 | 전주 풍패지관 정청 | 17세기 | 관영 | 9,644 | 630 | 600 |
| 23 |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5,551 | 619 | 480 |
| 24 |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 17세기 | 불교 | 8,350 | 614 | 689 |
| 25 | 완주 화암사 극락전 | 17세기 | 불교 | 6,239 | 609 | 569 |
| 26 | 전주 경기전 정전 본전 | 17세기 | 제사 | 6,677 | 603 | 543 |
| 27 | 종묘 영녕전 | 19세기 | 제사 | 6,363 | 602 | 465 |
| 28 | 거제 기성관 | 17세기 | 관영 | 6,570 | 600 | 480 |
| 29 | 경주 불국사 대웅전 | 18세기 | 불교 | 8,832 | 600 | 472 |
| 30 | 완주 송광사 대웅전 | 17세기 | 불교 | 7,588 | 600 | 600 |
다시 말해, 자연 상태의 ‘나무’가 ‘재목감’으로 선정된 데는 단순히 지리적 요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산림 황폐화 속에서 조선 정부가 수백 년간 구축해 온 송정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는 궁궐 영건이라는 대규모 관영 공사에 있어서, 건축물의 규모와 한계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건축 지식 중 하나로 작동하였다.
2) “재목감”에서 “재목”으로: 水營의 木物 조달 인프라
자연 상태의 나무가 중앙의 축적된 산림 지식과 조응하여 재목감으로 선정되었다면, 이제 그에 준하여 재목으로 획득하는 구체적인 실행 단계가 뒤따라야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도감에서는 비교적 규격이 작은 부재는 패장을 통해 강원도 사양산에서 매입해 오도록 하는 한편, 체대목의 벌목은 충청수영 그리고 통제영의 지휘망에 전적으로 위임되었다. 수영 관할의 연해민들은 특정 지역에 편중된 부역에 불만의 목소리는 없었을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일단, 강원도 사양산으로 파견된 패장 오필현(吳弼賢), 김익룡(金翼龍), 이인득(李仁得)은 도감으로부터 발급받은 첩문을 가지고 현장에 가 둘레 길이와 척도를 측정해 수량만큼 벌채를 감독하였다. 이때 각 읍의 수령이 매입 및 벌목 과정에서 사상(私商)들의 폐단이 발생하지 않고, 패장의 지시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해주었다.43
강원도 사양산에서의 목재 조달이 수령의 중재와 패장의 실무적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수영 관할 봉산에서의 체대목 확보는 수사의 지휘 아래 군사 소속 장교들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차이는 현장의 파견 인력과 감독 방식에서도 드러나는데, 강원도에는 도감 산하 실무자인 패장을 파견하는 한편 안면도에는 계사(計士)와 목수 각 2인만을 파견하고, 그보다 충청수사(忠淸水使)가 직접 수영 소속의 영비(營裨)와 장교(將校)에게 계사ㆍ목사의 재목 선별 및 낙인 과정을 직접 감독하도록 하였다.44 이때 파견된 영비와 장교는 ‘나무의 품질에 정통한 자[熟諳木品者]’들로, 수영에서 상시로 관할 봉산의 소나무를 점검하게 되면서 이처럼 나무에 정통한 자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안면도에서 초기 계획분 체대목 200그루와 함께 추가 할당된 박달나무[朴橽木] 및 참나무[眞木] 각 150그루가 조달될 재목으로 결정되었다.
사양산 매입과 안면도 봉산에서 재목 확보는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나, 역시나 문제는 대조전 대들보용 나무였다. “길이 30자 밑동 지름 3치”에 달하는 나무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임무를 받은 통제사는 적격한 재목을 찾기 위해 거제부사 이현성, 남해현령 유상표를 파견하여 수색을 명하고 또 감독하였음에도, 끝내 지름 3자에 준하는 재목은 구할 수 없었다.
(나) 三道水軍統制使가 牒報를 올립니다. 監關 내 대들보용 재목 네 그루를 널리 구하고자 한 연유는 전에 이미 보고한 바 있습니다. 즉시 정통한 褊裨, 잘 아는 營校 그리고 나무의 품종을 잘 아는 자들을 정하여, 통제영 소관의 봉산에 나누어 보내 사방을 두루 다니며 빠짐없이 찾고 탐색하게 한즉, 길이가 30자가 되는 소나무는 간혹 있었으나 지름이 표준 척수에 맞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45
이에 거제부사 이현성은 다시 예운(曳運) 차사원(差使員)인 율표(栗浦) 권관(權管) 및 감작(監斫) 영비(營裨)ㆍ영교(營校) 그리고 목수와, 남해현령 유상표는 영비와 팀을 꾸려 대들보용 나무를 수색하였다. 거제의 경우 가배량(加背梁)의 구망산(舊望山), 율포진(栗浦鎭)의 망포산(網浦山), 지세포(知世浦)의 대동산(大洞山)이, 남해의 경우 미조항진(彌助項鎭)과 삼중산(三重山)이 그 수색 대상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규격에 맞더라도, 막상 벌목하고 나니 구멍이 뚫려 있거나 비와 눈이 쌓여 썩어서 쓸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여, 벌목하고 다시 수색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통제영ㆍ거제ㆍ남해 위치 [배경지도: 대동여지도]](/journal/xml/KERD_3BA3997D3/images/F2.jpg)
제한된 기한에서 결국, 거제부사와 남해현령은 나무 각 두 그루씩을 통제영에 올려보냈다. 그러나 나무를 받은 통제영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이 보고한 치수와 실제 보낸 치수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제와 남해에서 운송된 나무들은 모두 영비ㆍ영교의 보고와 달랐고, 어떤 것은 밑동 지름이 2자 5치 5푼에 불과하였다. 이에 통제사는 자신이 사용한 척도를 직접 그려 중앙에 올려보내면서, 해당 척도로는 도저히 규격에 맞는 재목을 구하기 어려움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건도감은 밑동 지름 기준을 하향 조정해주기에 이른다.
(다) 題辭가 도착하였다. 부쳐서 말하면, 대들보의 수와 척도의 成冊에 작성하여 올린 바, 애당초 “길이 30자, 밑동 3자”라고 한 것은 대개 몸집이 큰 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번에 보고한 네 그루가 만약 지름이 2자 6~7치 이상이라면 모두 準用해도 된다. 다시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고 즉시 베어내어 포구로 내려보내, 얼어붙은 바다를 기다렸다가 배에 실어 보내도록 하고, 3월 내 京口에 도착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재목을 베어내고 운반하는 船價 등 잡비는, 전에 지시한 공문이 있으니 이대로 거행하라.46
보이는 바와 같이, 영건도감은 대조전 대들보의 최소 규격을 “밑동 지름 2.6~2.7자”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전국 최대의 양송처를 관할하던 통제영에서조차 적격한 나무를 구할 수 없던 생태적 한계에서 공사 기한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감은 해빙기가 도래함과 동시에 재목을 즉각 경강으로 수송하기 위해, 통제사가 보고한 미달 규격의 재목 4그루를 허용할 수밖에 없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통제사는 1그루를 제외하고 규격에 맞지 않는 3그루의 재목 그리고 예비용 재목 1그루를 포함해 총 5그루에 ‘답통(踏統)’이라는 낙인을 찍어 운송 준비를 마쳤다. 보고한 재목의 규격과 운송 날짜 모두 맞추지 못한 채 말이다.47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의문은 충청수영과 통제영에서는 그 수많은 체대목과 거목의 벌목 및 운반을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가의 문제이다. 예컨대, 거제에서는 재목마다 2일씩 총 역부 120명이 동원되어 운반해야 했고, 남해에서는 산에서 물가까지 30~40리가 떨어져 있어 군(軍) 100명이 6일간 동원되었다. 이는 수영 관할 연해민들이 편중된 부역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다)에서 보이듯, 도감에서는 “재목을 베어내고 운반하는 선가 등 잡비”는 공문대로 하라고 하였고, 그 내용은 명목상으로 품삯이 주어지는 고군(雇軍)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중앙에서 별도의 품삯을 보낸 것이 아니라, 경상납전(京上納錢) 즉 해당 지역 각 읍이 중앙으로 상납해야 할 세금을 전용(轉用)한 것에 불과하였다.48 이는 실질적으로는 안면도ㆍ통제영 관할 연해민의 노동력을 동원한 것과 다름없다.
기실, 수영의 지휘망 휘하의 연해민들은 수영이 송정을 장악한 이래 목물 운반 역에 수시로 동원되며,49 국가의 필요에 따른 막중한 부역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 아래 있었다. 결국, 중앙은 수영의 지휘 아래 구축된 목물 조달 인프라를 그대로 가동한 것과 다름없다. 안면도의 사례를 보면 1669년(현종 10) 송정이 홍주ㆍ서산ㆍ태안 3군 관할되던 데에서 충청수영으로 일원화된 이래, 충청수영은 220여 년간 안면도의 송정을 군정(軍政)의 일환으로 관리하였다. 이는 충청수영의 전체 격군(格軍)의 60%가 안면도 주민으로 구성된 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수영은 송정을 직접 집행하면서 거목을 베고 운반하는 예운역(曳運役)에 안면도 민들을 수시로 동원하였다.50
이러한 구조는 통제영 관할 연해민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거제와 남해 등 통제영 소속 수군진의 명령을 받는 지역 주민들은 조막역(造幕役)이나 운반역(運搬役) 등으로부터 중첩된 부역 의무 아래 놓여 있었다. 더구나 통제영은 삼도 수군의 군선 건조를 총책임지는 최고 사령부인 만큼, 건조에 필요한 목재, 철물 등 각종 물자와 목수, 야장(冶匠) 등 장인들을 확보하고 관리하는 전 과정을 감독하였다.51 그러한 임무의 특성상 통제영의 휘하의 수군진과 관할 촌락들은 일찍부터 목재 조달에 특화되어 있었다. 예컨대, 거제도의 구조라(舊助羅)ㆍ왜구(倭仇)ㆍ망치(望峙)ㆍ양화(楊花) 네 마을은 정례에 따라 “가룡목물(駕龍木物) 예운역”을 돌아가며 수행[輪回]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부역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 마을끼리 합동하거나, 계방(契房)을 맺어 역부담을 조율하는 등 수영의 지배력 안에서 조직적인 체계를 만들어가며 대응해 나갔다.52 즉, 수영 인근 거주 연해민들이 자생적으로 구축한 협력망은 결과적으로 목물 조달 인프라의 하부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중앙의 건축 지식 아래 재목감이 된 자연 상태의 나무들은 수영의 군사적 지휘망과 지역 사회의 인프라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포구에서 중앙으로 수송될 재목으로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3) “재목”에서 “목재”로: 중앙-연해 軍營의 수송 네트워크
중앙에서 요구된 “재목감”은 비록 그 이상적 규격을 맞추진 못했으나 지난한 절차를 거쳐 “재목”이 되어 중앙 전각의 “목재”가 될 준비를 마쳤다. 낙인된 재목은 중앙의 목재가 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강원도, 안면도 그리고 통영에서 중앙까지 재목을 운송하는 데 수송 네트워크의 작동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재목은 각지 수영 그리고 중앙 군영을 운송 네트워크로 연결되게끔 했다. 이번에는 중앙에서 먼 데부터 가까워지는 흐름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거제ㆍ남해에서 통제영까지의 대들보 운송은 통영 관하 선박으로 조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통영은 일찍부터 선역(船役)이 발달하였기에,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다양한 군선을 보유하였다. 그중에서도 『각선도본(各船圖本)』에서 확인되는 통영 상선(上船)의 규모는 상당했는데, 다른 지역의 선박은 물론 조운선보다도 큰 규모였다.53 그러한 추정은 통제사가 거제ㆍ남해로부터 조달받은 재목을 두 척의 조운선에 나누는 장면에서도 분명해진다.54 통영에서 조달받은 재목은 남해의 노량포구에서 합류하여 출발하도록 하였고, 통제사로부터 파견된 편비는 재목의 그루 수와 길이, 지름의 척도, 끌어 나르는 고용비의 액수, 선박의 자호(字號)를 아울러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냈다. 재목을 실은 조운선의 최종 목적지는 경강 포구였다.
안면도에서는 초기 계획분 체대목 200그루와 함께 추가 할당된 박달나무 및 참나무 각 150그루가 운송되어야 했다. 그 운송의 임무 역시 충청수사에게 주어졌다. 중앙에서는 충청수사에게 지토선(地土船)을 빌려 운송하도록 지시했으나 충청수사는 인근 지역의 지토선이 모두 견고하지 못하고 크기가 작아 운송의 어려움이 있다며 경강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55 이에 비변사는 교동수사(喬桐水使) 소관의 덕전도(德積島)의 선박[德積船] 20척을 사용하도록 하고, 이와 함께 주교사(舟橋司) 관할 경강선 2척을 안면도로 보내 정해진 수량만큼 나누어 싣도록 지시하였다. 『서궐영건도감의궤』(1832)를 참고해 보면, 덕적선은 주로 평안도ㆍ황해도 등 관서 일대부터 서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며 한양으로 세곡을 운송했던 선박이었던 것 같다. 덕적선을 사용했다는 것은, 중앙으로 향하는 기존의 조운망 속에서 적재 공간이 남는 선박을 현장의 수영이 이를 수시로 포착하여 물류 운송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56 안면도에서 출발한 덕적선 그리고 경강선의 최종 목적지 역시 경강이었다.
강원도의 사양산에서 매입한 목재의 경우 『창덕궁영건의궤』에서는 그 구체적 운송 경로가 확인되지 않는데, 화성 성역 사례를 통해 그 경로의 추적이 가능하다. 화성 성역 당시도 강원도 인제ㆍ영월ㆍ금성의 봉산에서 나무를 벌목하였는데, 그 재목은 뗏목을 이용해 양천현의 방현포(芳峴浦)에 집결시킨 후 그곳에서 경강선에 옮겨 경강까지 운송되었다.57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강원도ㆍ안면도ㆍ통영에서의 다종ㆍ다량, 그리고 대규모의 재목 운송 작업은 각지 수영의 협업으로 중앙의 경강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이제 그 나머지의 재목 조달의 임무는 중앙의 군영으로 넘어갔다.
경강으로 들어온 재목들은 먼저 사촌리(沙村里)로 이동되었다. 이곳에서 목적지까지의 육로 운송이 용이하도록 재목들의 1차 가공이 이루어졌다.58 『만기요람』에 따르면 경강의 선박 관리는 송파ㆍ한강ㆍ노량ㆍ영화 등 4진(津)의 별장(別將)이 나누어 맡았는데, 그중 노량진은 금위영 소속 별장이 통제하였다.59 사촌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에 속했으나, 한성 수비 체제상으로는 금위영의 통제 구역 안에 있었다.
![京江 4津 [배경지도: 대동여지도]](/journal/xml/KERD_3BA3997D3/images/F3.jpg)
(라) 큰 규격의 목물[體尺木物]은 비록 수레로 운반하더라도, 그 나머지 서까래[椽木]와 적심과 같은 얇은 목재[飛木]들은 三營門의 짐말[卜馬]과 이를 부리는 인력을 동원한 연후에야 제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이곳에서 감결을 받아서 가오니, 삼영문의 짐말은 소재한 바에 따라 모두 수를 갖추어 대기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다시 본 도감의 감독을 기다리면서, 몇 필씩 개별적으로 할당하여 차례차례 정해 보내는 것을 기한으로 두고, 일을 마치고 운반하는 곳으로 향하겠습니다.60
사촌리에서 육로 운송에 용이하게 1차 가공된 재목들은 사료 (라)에서 확인되듯, 대들보와 같은 거대한 “체척목물”을 운반할 때에만 수레가 제한적으로 활용되는 한편, 다수의 재목은 삼군영의 짐말과 이를 부리는 복마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장에 운반되었다.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은 창설 초반부터 단순한 수도 방어를 넘어 군량과 군기 등 군수품 관리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수품 수송을 전담하는 복마군의 조직적인 운용도 함께 정비되었는데, 이들은 원류군(願留軍)과 함께 도성에 상주하며 장번(長番) 근무를 수행하는 특수 병종이었다. 이들이 영건과 같은 공역에 동원될 경우, 복마군은 말의 사료비 등으로 인해 유지 비용이 일반 군인보다 많이 든다는 점이 고려되어, 여수전(旅需錢)이 별도로 지급되기도 하였다.61
그런데, 사촌리에서 궁궐까지의 재목 운송 비용이 1,757석 5두에 달하자, 도감은 차계(車契)ㆍ마계(馬契) 공인(貢人)에게 값을 주어 운송 업무를 분담할 것을 제안하였다. 마계는 18세기 초 군영의 복마군과 별개로 짐말 부역을 전문으로 하는 공인 조직으로 설립되었다.62 정부는 삼군영을 통해 물자 조달의 실무를 총괄 지휘하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이들 공인계를 활용하여 수레와 말 등 민간의 운송 수단을 최대한으로 확보하여 공기 단축을 꾀한 것으로 생각된다.63
결국, 수천 리 밖의 “나무”가 공사 현장에 도달하여 전각의 “목재”로 완성될 수 있던 것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이 운송 과정의 이면에는 17세기 무렵부터 이어온 군영을 중심으로 한 국가 물품 조달의 체계화, 나아가 18세기 무렵부터 이루어진 공인계와의 협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친 재목들이 드디어 현장의 치목소(治木所)로 옮겨져 장인들에 의해 모듈 원칙에 따라 가공돼 최종적으로 전각의 목재가 되는 것이다.
3. 대들보가 강제한 營建 위상의 재구성
지금까지 자연 상태의 나무가 재목감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고, 다양한 층위의 연결망을 거쳐 현장에 도착하는 여정을 쫓아가 보았다. 그 여정은, 열악한 재정적ㆍ환경적 제약 속에서도 대조전이 지니는 공간적 상징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 “대들보”가 사실상 수정한 초기 영건 계획의 결과였다. 12월 초4일 전각의 골조를 갖추어 상량식이 이루어진 때, 적격한 대들보가 확보되었다면 공사 현장으로부터 가장 먼 땅끝의 남해까지 연결망이 작동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에서는 대조전에 들어갈 대들보용 재목을 찾기 위해 당대 최고의 건축 지식인 산림 정보를 총동원하여 통제영에 수색 지휘를 요구했으며, 거목의 벌목과 운반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수영의 군사적 통제력은 물론이거니와 수영 통제 하에 연해민들이 자생적으로 구축해 둔 목물 조달 인프라가 필연적으로 가동되었다. 여기에 조달과 물류의 거점으로 변모한 조선 후기 군영 기능의 변화, 그리고 부족한 물력을 보완하기 위한 공인계와의 결탁과 맞물리며 대들보를 둘러싼 연결망은 더욱 확장되었다. 이른바, 대들보가 재편한 영건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 “대들보”는 영건의 완성을 결정하는 핵심 부재이자,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던 느슨한 연결망이 강력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 대들보는 자재 조달 계획을 변경하는 것을 넘어, 대조전의 종래 규모를 유지하려던 초기 영건 계획마저 변경하였다. 공사 기한을 더는 늦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대들보의 밑동 지름을 3자에서 2.6~2.7자으로 하향 조정한 것이 그 원인이 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대들보의 규격은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 부재 중 하나였다. 12월 초4일 상량식 때 임시 대들보를 세우면서 “길이 30자 밑동 지름 3자”보다 부족하다고 했음은, 이때 이미 대조전 영건이 “길이 30자 밑동 지름 3자”의 보를 기준으로 계획되었음을 의미한다. 건물의 뼈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전체 규모 즉 정면과 측면의 칸수 및 층수, 지붕 형태 등이 미리 설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대들보용 나무를 하향 조정했음은, 대조전 영건 계획 역시 수정되었음을 뜻한다. 최대 소나무 소재지인 통영에서조차 규격에 맞는 나무가 없다는 보고를 받자, 초기 계획은 필연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실제로 그 계획이 변경되었음을, 고종 연간 후반부에 편찬되었다고 추정되는 『궁궐지(宮闕志)』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궁궐지』에서 묘사하는 대조전은 초기 영건 계획이었던 정면9칸×측면5=45칸이 아닌, 정면9칸×측면4칸=36칸의 규모를 띠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보 방향으로 (가운데) 두 칸은 9자씩이고, 전후 퇴칸은 7자 5치”라고 기록되어 있으니,64 이는 초기 계획보다 얇아진 대들보 규격에 맞춰 건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율된 수치로 읽힌다.
이러한 사실은 『동궐도형(東闕圖形)』(1907, 디지털장서각 소장)65에서 확인되는 대조전 실측과도 일치한다. <그림 4>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대조전은 45칸이 아닌 36칸이며, 칸수, 공포, 지붕, 기둥 간격 등 세부 사실이 『궁궐지』의 기록과 일치한다. 순조는 화재 복구에 있어 기존 규모와 구조를 바꾸지 말도록 하였으나, 적격한 대들보의 부재는 끝내 순조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미루어보면, 상량식 시점까지도 대조전의 초기 규모를 유지하려던 중앙의 의지는, 통제영에서조차 규격에 맞는 나무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들보 규격이 하향 조정되면서 굴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현장의 장인들에게는 이미 투입된 시간과 노력을 폐기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경간이 변하면 가구구조의 구성 및 비례도 변하니, 진행 중이던 치목은 수정된 규격에 맞는 재치목(再治木)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창덕궁의궤』 실입조에는 초기 계획대로 “【대조전】 45칸”으로 기록하며, 이와 함께 대들보 4개를 새로 복정했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6 더욱이 대조전이 초기 계획대로 건설되지 않았음에도, 대들보용 나무가 제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일은 기적과 같은 성과로 기록되었다. 순조는 대들보용 나무가 무사히 도착한 것을 ‘지극히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일’로 평가하며, 운송 감독관인 통제영의 운송 감독관 정준에게 포상을 내릴 것을 독려하였다.67
이와 같은 현실과 기록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다. 첫째, 초기 계획에서 건물 규모의 축소를 인지했음에도 의도적으로 그 변경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창덕궁 화재 이전까지 순조는 창덕궁을 사실상 정궁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대조전은 국왕과 왕비의 침전으로서 국왕의 권위와 직결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이러한 핵심 전각 규모의 축소는 왕실 권위의 실추로 비칠 여지가 다분했다.
둘째, 의궤에서 “실입”조가 영건의 결과가 아닌 계획을 기록했을 가능성이다. 당대인들은 구상 속의 수(계획) 역시 국가의 지향점이나 제도적 이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정보로서 가치를 부여했다. 즉, 이들에게 계획된 수치는 오늘날처럼 달성하지 못한 예상치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기록으로 남겨야 할 또 하나의 결과로 인식되었다.68 『의궤』가 국가 영건 사업의 공식적인 설계 목표와 완결된 규범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둔 기록물이라면, 이 실입조 역시 제도적 이상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 대들보는 단순한 건축 자재의 의미를 넘어 국가의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공을 증명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이 거대한 부재 안에는 당대의 산림 정책과 남해에서 중앙까지 연결된 인적ㆍ물적 기반의 조달 과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의궤가 현실의 물리적 축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적적 성과”로 포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즉, 의궤를 통해 남기고자 했던 것은, 건물의 물리적 치수만큼이나, 대들보 하나에 응축된 국가 연결망의 총동원과 그 성공적인 작동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맺음말
본고는 『창덕궁영건도감의궤』(순조 34, 1834)를 중심으로, “나무의 생애”라는 미시적 물질의 흐름을 추적하여 궁궐 영건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동원된 조선 후기 물자 조달 방식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자연 상태의 “나무”가 규격화된 “재목감”으로, 다시 운송할 만한 품질의 “재목”으로, 최종적으로 궁궐 전각에 들어가는 “목재”가 되는 데까지의 과정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조선 후기 중앙의 축적된 건축 지식, 산림정책, 중앙과 지방의 유연한 행정 시스템, 나아가 군영의 기능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다. 그 과정에서 “밑동 지름 3자”라는 거목의 생태적 한계는 국가의 초기 영건 기획에 개입하여 왕실 건축물의 규모를 재편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순조 33년(1833) 10월의 화재 규모는 상당하였다. 화재가 발생한 일대가 모두 침전과 편전 영역으로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인 만큼, 하루빨리 재건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심각한 흉년의 여파로 민간은 물론 중앙의 재정 상황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실 내부의 자원부터 전국 각지의 세입과 물자에 이르는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목재라는 부재의 특수성은 중앙과 연해 지역의 수영을 유기적으로 연동하였다. 서남해 수영들이 목재 조달의 핵심 주체로 기능할 수 있던 것은, 조선후기 산림 황폐화로 인한 송정의 강화로 서남해 수영들이 각 읍의 봉산 관할 권한과 책임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의 입장에서는 벌목과 운송에 드는 막대한 재원과 노동력을 전국 차원의 군영 조직 도움 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웠다.
화재가 음력 10월에 이루어졌기에, 음력 12월 초 한강의 결빙이 본격화되기 전에 서둘러 목재 조달은 이루어져야 했다. 사양산에서 매입한 비교적 작은 크기의 나무, 그리고 충청수영ㆍ공충수사의 협업으로 안면도 봉산에서 운송된 체대목은 현장에 순차적으로 들어왔고, 그 결과 12월 초4일 건물의 골조를 갖추어 상량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대조전에 들어갈 대들보용 나무였다. 순조는 대조전이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침전인 만큼 기존의 규모와 구조를 바꾸지 않기를 바랐다. 그 규모와 경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길이와 굵기의 대들보가 요구되었으니, ‘길이 30자 밑동 지름 3자’는 되어야 했다. 영건도감에서는 상량식이 이루어질 때까지 강원도나 안면도로부터 적격한 재목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결빙이 이루어질 때까지 해당 규격에 맞는 재목은 확보되지 못했다.
이 대들보의 부재는 공정 일정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 중앙의 영건 프로젝트가 땅끝 남해까지 연결되도록 강제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수군을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부로서 가장 막강한 산림 통제 권한을 쥐고 있던 통제영의 행정력에 위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산림 지식 축적의 결과였다. 그러나 통제영에서조차 지름 3자에 달하는 재목은 찾을 수 없었고, 더는 공사 기한을 늦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규격은 지름 3자에서 2.6~2.7자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조전 측면이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대들보의 부재는 자재 조달 계획을 넘어 순조의 초기 영건 계획까지 변경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대들보의 물질적 저항이 건축물의 물리적 위상을 축소하였음에도, 의궤는 이 부재의 현장 도착을 국가적 차원의 기적적 성과로 기록하며 새로운 상징적 위상을 부여하였다. 이 대들보는 조선 후기 복합적인 건축기술과 물자 조달 인프라가 촘촘히 응축된 핵심 부재이자, 국가적 과제의 성공을 증명하는 기념비였기 때문이다. 결국, 당대인들이 의궤를 통해 남기고자 했던 것은, 건물의 물리적 치수만큼이나 대들보 하나에 응축된 국가 연결망의 총동원과 그 성공적인 작동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Acknowledgments
본고는 2025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BK21 참여대학원생 성과발표회인 “사물과 기술, 장인으로 보는 조선시대사”의 발표문을 수정한 것이다. 논문을 완성하는 데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서울대학교 건축사연구실 구성준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