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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pplied Utility to Nature Conservation: 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 and the Rise of Developmentalist Conservationism

Jaehwan HYUN1*

1 한양대학교 철학과 Hanyang University

Published: April 2026·Vol. 48, No. 1·pp. 29-62

DOI: https://doi.org/10.36092/KJHS.2026.48.1.29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evolution of 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 (KSAZ) from 1957 to 1962, focusing on its pivotal role in developing a distinctive developmentalist conservationism in postwar South Korea. Established under Kim Hon-kyu’s leadership, KSAZ explicitly distanced itself from ‘pure’ biology to prioritize the ‘request of the times’—specifically, increasing agricultural productivity and resolving public health crises through the control of pests and rodents. Supported by continuous funding from the Asia Foundation, KSAZ conducted extensive academic expeditions to Jeju Island, Mt. Seorak, and Mt. Jiri, frequently collaborating with U.S. military entomologists to study disease vectors in post-conflict environments. A significant shift occurred after the 1960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ICBP) meeting in Tokyo. Figures such as Won Pyong-oh reframed bird protection not as a sentimental endeavor but as a scientific method of resource management and biological control against forest pests like the pine moth. This utilitarian logic allowed conservation to be seamlessly integrated into the Park Chung-hee regime’s developmentalist agenda, leading to the designation of Mt. Jiri as the nation’s first national park. Ultimately, KSAZ provided the epistemic foundation for the state-led nature protection movements of the 1970s.

Keywords: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Nature ConservationDevelopmentalismThe Asia FoundationKim Hon-kyuWon Pyong-oh

이 논문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분야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2S1A5A8051333).

1. 머리말

최근 1970년대 전후 한국에서 과학자들의 주도로 전개된 자연보호 운동에 대해 연구자들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공해가 사회문제화되고 각종 공해 “재난”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반공해 운동을 벌이면서 유신 정권이 새로운 공해 대책을 강구하던 시기였지만,1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학자들이 한국자연보존협회(韓國自然保存協會)를 중심으로 유신 정권과 결탁하여 그간 꾸준히 벌여 오던 대중 계몽 사업을 국가 주도의 전국적 자연보호 운동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때이기도 했다.2 선행 연구들은 한국자연보존협회를 중심으로 한 생물학자들의 자연보호 운동이 1970년대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63년 국제자연보전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IUCN)의 지원 아래 국립공원 후보지 조사 및 국립공원 제정 운동을 펼치기 위해 수립된 “한국 자연 및 자연자원 보존 학술조사 위원회” 활동에 기원한 것임을 보여주었다.3 또 이 위원회 조직을 주도한 생물학자들이 해방 이후 “국토보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가운데 한국산악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국토구명사업과 산림녹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산악회 및 대학 산악부와 연계해 학술 현지조사를 진행하던 도중에 1960년대 초 정부의 천연기념물 관리 행정에 연루되면서 “자연 보존”을 독자적으로 개념화하고 이와 관련된 자연 보존 캠페인을 학술조사 위원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펼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4

국내 자연보호 운동의 역사에서 생물학자들의 역할을 검토한 선행 연구 중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맥락이 존재한다. 특히 1950년대 한국산악회 활동이나 초기 천연기념물 관리 행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특정 학자들의 행적이 그러하다. 이들은 1960년대 국립공원 설립 운동과 1970년대 한국자연보전협회의 활동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 교수 김헌규(金憲奎)와 1956년부터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하다 1961년부터 경희대학교(구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근무한 원병오(元炳旿), 1959년까지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근무하다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원병휘(元炳徽), 그리고 임업시험장에서 퇴직 때까지 자리를 지킨 우한정(禹漢貞)을 들 수 있다. 김헌규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지리산 지역 개발 조사의 일환으로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관련 연구 조사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국립공원 행정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다.5 다른 한편 원병오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조류 보전 생물학의 성장과 조류 보호와 관련한 다양한 입법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6 이들은 공통적으로 임업시험장에서 유해조수를 관리하는 등의 직업에 종사하거나 대학에서 해충 및 전염병 매개 설치류의 구제와 같은 “응용적” 생물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이런 이유로 농학박사를 받은 인물들이다.7 또 이들은 1960년대 이후 모두 조류학적 조사나 조류 보호 캠페인을 벌였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학자들은 모두 1957년에 설립되어 1960년대 초까지 존속한 한국응용동물학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가 주로 ‘순수’ 생물학자들의 궤적에 집중했다면, 이 글은 이 ‘응용’ 생물학자들이 한국응용동물학회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독자적인 담론을 형성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해당 학회와 이들의 자연 보존 논의의 연관성을 탐구한다.8

본 연구가 분석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19세기 말부터 전개된 보전(conservation) 담론의 역사를 이론적 참조점으로 삼되, 이것이 한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미국 환경사에서는 존 뮤어(John Muir)가 주장하던 원형 그대로의 보존(preservation)과 기퍼드 핀초(Gifford Pinchot)의 자원의 합리적 이용을 뜻하는 보전(conservation)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던 것으로 논의된다.9 그러나 식민지 해방과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1950년대 한국에서 이 두 개념은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선행 연구들이 밝히듯, 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심의 ‘순수’ 생물학자들이 주도한 국토구명사업과 천연기념물 보존 운동은 이미 그 자체로 식민의 상흔을 씻고 상실된 국토를 되찾으려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국가 재건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10 나아가 최근의 연구는 이들 ‘순수’ 생물학자들이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국가 주도의 자연보호 운동에 편입되며 경제 개발의 논리와 타협하는 양상을 규명한 바 있다.11

필자는 이러한 1970년대 타협 논리의 한 기원을 1950년대 후반 한국응용동물학회의 활동에서 찾는다. 전후 복구와 빈곤 타파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김헌규와 원병오 등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단순한 학술적 진리 탐구를 넘어 국가 재건과 실생활의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 지향은 농업 생산성 향상, 전염병 매개체 방제와 같은 ‘응용’ 과학의 구체적 방법론을 통해 구현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자연을 관조의 대상이나 민족의 징표로 삼았던 ‘순수’ 생물학계의 흐름과 대립하기보다는, 자연을 농림업 경영과 빈곤 타파를 위해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수익을 창출해야 할 철저한 자원 관리형 보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들의 담론은 서구처럼 사적 자본의 남용을 견제하려는 개혁 운동이 아니라, 조국 근대화를 지상 과제로 삼은 국가 권력의 개발 논리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결합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처럼 자연을 과학적으로 통제 가능한 실용적 경제 자원으로 재규정하는 보존 논리를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이라 명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담론을 선구적으로 가시화해 나갔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며, 본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응용동물학회의 구체적인 활동과 네트워크를 추적한다.

1957년 7월 김헌규의 주도로 창립된 응용동물학회는 1961년까지 활발히 운영되었으며,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을 비롯한 미국의 연구 지원 기관들은 조직의 ‘실용적인’ 성격에 주목해 지속적으로 원조를 제공했다. 이에 더해 미군 응용 곤충학자들이 방향성이 같은 응용동물학회의 학술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당시 국내 생물학 분야 학회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가시적으로 두드러진 조직이 되었다. 이 가운데 1960년대 초 응용동물학회는 당시 아시아 지부를 설립하려던 국제조류보존회의(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ICBP)의 한국 파트너로 선택되었고, 이는 다시금 ICBP와 IUCN 양쪽에서 활동하던 미국 보전주의자들이 김헌규와 원병오를 한국의 국립공원 운동과 조류 보호 운동의 주요 인물로 후원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응용동물학회의 인사들은 ‘순수’ 생물학자들의 자연 보존론과는 차별화되는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을 발전시켰다. 이런 시각은 이후 한국의 자연 보전 관련 법제화 과정과 초기 자연보호 운동의 형성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검토를 통해 이 글은 한국응용동물학회의 비교적 단기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과학자 주도의 자연보호 운동의 일부로서 조류 보호가 포함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보일 것이다.

1.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응용’을 기치로

“純粹 動物學도 아직 初步의 領域을 걷고 있는 우리나라의 現實에서 應用動物學이 앞서게 된 것은 動物學을 爲한 動物學에서 一步前進하여 動物과 人生과의 關係를 硏究함으로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는 經濟, 保健, 厚生 問題 등을 우리 손으로 解決해야 할 時代의 要請이 切實하게 된 까닭이다.”12

1957년 여름에 한국응용동물학회는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시급한 과제를 해결한다는 실용주의적 기치 하에 설립되었다. 1958년 2월 28일에 출판된 『응용동물학잡지』창간호의 발간사에서 학회 창립을 주도한 김헌규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의 동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한국생물학회에서의 동물학 연구를 “순수 동물학”으로 정의하고, 응용동물학을 이와 같은 “동물학을 위한 동물학”과 달리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분야라고 소개했다.13

여기서 “시대의 요청”이란 1948년에 설립된 신생국이자 이제 막 한국전쟁의 참화를 벗어난 농업 중심 국가인 한국의 농업 생산성의 증대와 공중 보건 문제의 해결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응용동물학은 “농림, 축산과 관계된 경제동물과 사람의 생명과 관계있는 질병을 전파, 매개하는 위생동물들의 분류, 분포 및 그 생활사를 밝히며 그 방제책을 강구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었다.14

학회의 실용주의적 기치는 학회 개최 장소와 구성원의 면면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1957년 7월 18일에 열린 창립총회는 보건사회부의 회의실에서 개최되었고, 이후로도 대다수의 회의가 국립김포공항검역소에서 진행되었다. 1959년 4월을 기준으로 62명의 회원 중 소속이 분명한 구성원은 37명이었고, 이 가운데 25명이 농학, 농생물학, 의용곤충학, 기생충학, 축산학 등 ‘경제동물’과 ‘위생동물’을 관리하는 데 종사하는 전문가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소속이 4명, 임업시험장, 농교국, 조림과, 잠업시험장 등 농림부 농사원 소속이 8명, 국립김포공항검역소 소속이 5명,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의용곤충학교실 소속이 3명, 동국대학교 농과대학 소속 2명,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소속 1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소속 1명, 서울시립농업대학 축산학교실 1명이었다. 비한국인으로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클래런스 미켈(Clarence E. Mickel)은 미네소타대학 곤충학 및 경제동물학과 교수였고, 체스터 펜넬(Chester M. Fennell)은 미8군 소속으로 활동하던 조류학자이자 곤충학자였다(표 1).

표 1 1959년 1월 기준 한국응용동물학회 회원 목록. [출처: ”회원 명부”, 『응용동물학잡지』 제2권 1호 (1959), 75-76쪽]

성명 소속 비고
강희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강면희 서울시립농업대학 축산학교실 *교수
권영탁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구충석 농림부 농교국
김헌규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의용곤충학교실 *교수
김충흠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교실
김찬일 신흥생물표본제작소
김영변 농림부 경기도 농사원
김영기 김포공항검역소
김희찬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김윤산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1962년 농림대학으로 학과 소속 변경
미승우 과학세계사
박세욱 농림부 농사원 임업시험장 *임업시험장 보호과장
박봉일 김포공항검역소
백갑용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문리대로 오기
백운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교수
소진탁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
우한정 농림부 농사원 임업시험장
원병오 농림부 농사원 임업시험장
원병휘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교수 *1962년 농림대학으로 학과 소속 변경
윤재호 농림부 산림국 조림과 *산림국 조림과장
윤용임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
이용직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이상식 동국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
이승우 동국대학교 농림대학 농과 *교수
이용빈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이재흥 김포공항검역소
이종교 농림부 농사원 시험과
이석주 김포공항검역소
박창익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1962년 농림대학으로 학과 소속 변경
이정순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
전대용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최요한 배재고등학교
최은자 농림부 농사원 잠업시험장
황종현 김포공항검역소 *김포공항검역소장
Clarence E. Mickel 미네소타대학교 곤충학 및 경제동물학과 학과장
Chester M. Fennell 주한미군 미8군 사령부 부관처 민간인 인사과

‘순수’ 생물학과에 소속된 인물들 역시 대부분 ‘응용’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자들이었다. 대표적으로 1959년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에 부임한 원병휘는 농학사 출신으로 설치류의 생태가 페스트 전파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진력해 온 연구자였으며, 응용동물학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본인이 일제강점기 동안 수행한 해당 연구를 막 국문으로 출판하던 때였다.15 참고로 그가 소속한 생물학과는 1962년에 농림대학으로 소속이 변경되고 응용생물학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학회의 핵심 인물들의 이력은 이런 실용주의적 기풍을 잘 보여준다. 학회의 창립 인사이자 1959년 7월에 이루어진 인사 개편 당시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인물로는 김헌규(회장), 백운하(부회장), 황종현(부회장), 백갑용(운영위원), 원병휘(운영위원), 원병오(간사)를 들 수 있다. 회장 김헌규는 1930년 사리원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전문학교 농학과에 입학해 1934년에 졸업했다. 1937년에 홋카이도 제국 대학 농학부 농업생물학교실에서 곤충학을 전공한 뒤, 1940년에 코넬대학교 농과대학에서 곤충학을 공부하다 태평양 전쟁으로 장학금이 중단되어 귀국했다. 이런 까닭에 코넬대에서의 농학석사학위는 해방 이후 코넬대에 재방문할 기회가 생긴 1954년이 되어서야 받게 되었다. 그는 1945년 9월 18일에 미군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4군단 기술고문과 군정청 공보처 번역과장으로, 1948년부터는 경제협조처(ECA) 식량농림부 상담역으로, 1951년부터 1952년까지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 농림진흥국 상담역으로, 1953년에는 FAO 농업사절단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그의 주요 업무는 한국의 농림부가 요청하는 원조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실무 집행에 자문을 제공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농림부의 사과나무 병충해 예방을 위한 유황 원조 요청과 관련해 과학기술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일을 맡았다.16 김헌규는 1954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에 부임해 1975년까지 교수로 근무하면서도 해충 구제에 관한 곤충학적 연구를 놓지 않았고, 박사학위 또한 1960년에 홋카이도대학 농과대학에 이미 출판한 논문들을 제출하여 학위를 받는 구제박사의 형식으로 농학박사를 수여받았다.17

부회장 백운하는 1934년에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에 수원농림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후 2년간 경상남도 농사시험장에서 산업기사로 근무하다 진주공립중학교와 진명여자중학교의 교사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8년부터는 춘천농과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으로 이듬해 경남 진주농과대학 조교수로 부임했다가 최종적으로 1952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에 부임해 1982년까지 근무했다. 1955년부터 1년간 서울대의 의대와 공대 및 농대를 중심으로 교원 재교육을 지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네소타대학 곤충학과에서 1년간 수학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곤충학 가운데에서도 농림해충학 분야에 진력했다.18

부회장 황종현은 1955년 11월에 김포공항검역소장에 취임한 이래 쥐와 같은 위생동물의 구제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19 학계 인사가 아니라 약력 등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공중보건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설치류 구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응용동물학회에 함께 가입해 있던 연세의대 기생충학교실의 소진탁과 함께 1958년 11월에 한국위생동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하는 데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20

운영위원 백갑용은 1941년 미야자키고등농림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후 오하라농업연구소 곤충부 조수로 잠시 근무하다 배재중학교, 남산고등여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수원농과대학 조교수로 부임하여 1946년에는 대구농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후 결핵으로 인해 1948년부터 1957년 여름까지 요양 생활을 하다 1957년 9월부터 경북대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는 대구농과대학이 1952년에 경북대에 통합된 결과였다. 다만 백갑용은 농학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거미류에 관한 분류학적 연구에 천착했으며 1964년 경북대학교에서 이를 기반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1

운영위원 원병휘는 1926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한 후, 1935년에 숭실전문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모리 다메조(森為三)의 주선으로 정가둔 페스트조사소 위생동물연구실에 취직하여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며 만주의 설치류에 대한 생태학적 조사를 진행했다. 해방 이후에는 평양 전염병연구소 페스트 부장이 되어 1950년까지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가운데 월남하여 1951년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해 여러 중등 교육 기관에서 교사로 일했다. 마침내 1956년 4월에 신흥대학교의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했다가 1959년 3월에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이후 농림대학 응용생물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1963년에는 규슈대학 농학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간사 원병오는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교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해 단과대학으로 분리된 원산농업대학을 1950년 7월에 졸업하고 북한군으로 징집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맏형 원병휘와 함께 월남해 한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1956년까지 복무했다. 대위로 예편한 직후에는 바로 농림부 중앙임업시험장에 취직하였고, 1957년에는 원병휘가 교수로 근무하던 신흥대학교 생물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60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에는 홋카이도대학 농학부에서 구제박사 형식으로 논문들을 제출해 농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신흥대학교의 생물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해 1994년에 퇴임할 때까지 근무했다.

이처럼 김헌규를 위시한 의용곤충학 관련 연구자들, 황종현과 원병휘 중심의 위생동물학 연구 및 실무자들, 백운하와 백갑용으로 대표되는 농업곤충학 분야의 인사들, 원병오를 비롯해 산림 해충 및 조수 관리를 실무로 하는 임업시험장 인사들은 모두 이학으로서의 동물학과는 거리가 있는, 해충 구제와 전염병 매개체 관리, 농업 및 임업 생산성 향상이라는 실용적 목표를 공유한 가운데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추진하는 이들이었다.

이들 핵심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농학 전공자이거나 농사시험장, 페스트 조사소, 임업시험장, 공항검역소 등 방역과 생산을 담당하는 실무 기관 출신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국내외 농림 학교에서의 수학 경험과 농업 진흥 및 위생 관리를 목적으로 한 관변 연구기관에서의 실무 훈련은 이들에게 자연을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공중 보건을 지키기 위해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내면화하도록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이 학문적 훈련과 실무 과정에서 체득한 ‘응용과 관리를 위한 과학’은 전후 한국의 경제 재건이라는 시대적 목표와 자연스럽게 맞물렸고, 이는 훗날 이들이 훗날 개발독재 국가의 정책적 요구에 큰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사상적 밑거름으로 작용했다.22

학회 초기에는 이 같은 철저한 실용주의적 지향 외에도 회장 김헌규의 사적 네트워크가 일부 반영되었지만, ‘동물학의 응용’이라는 공통점이 없는 경우 지속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1957년 창립 총회 당시 인선에서는 김헌규가 졸업한 숭실전문 학맥이 크게 두드러졌다. 학회의 초대 명예회장으로 김호식, 부회장으로 이근태, 생리생태부 부장 김호식, 수산동물부 부장 정문기, 척추동물부 부장 원병휘, 위생동물부 부장 황종현, 곤충부 부장 백운하가 선출되었다.23 이 가운데 정문기와 황종현은 각각 중앙수산검사소장과 국립김포공항방역소장이고, 백운하는 당시 국내의 유일한 농업 해충 구제 전문가라는 전문성이 고려되어 선출되었지만, 김호식과 이근태는 과거 숭실전문학교 농학과 교수였으며, 원병휘 또한 김헌규의 동학과의 후배라는 점이 고려된 인선이었다. 하지만 숭실전문 학맥 중에서 학회 활동과 크게 관련이 없는 농화학자 김호식의 경우 별다른 학술적 기여 없이 학회 활동을 중단했고, 이근태는 첫해에 제주도 학술 현지조사에 참여해 제주산 진드기에 관한 연구에 관한 논문을 출판한 이후로는 학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종현과 백운하 등 학맥 바깥의 인사가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1959년 인사 개편 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24

2. 아시아재단의 지원과 현지조사 중심의 학회 활동

신생 학회인 한국응용동물학회는 당시 ‘순수’ 동물학을 추구하던 한국동물학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의 전국 단위 현지조사를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꾸준히 전개했다. 신생 학회가 이 같은 대규모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동력은 미국 재단의 후원 덕분이었다. 1959년에 한국지역사회학술조사기구가 조직해 서울대의 인문, 사회, 자연 분야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한 제주도 종합 학술조사가 시행되기 이전까지 응용동물학회는 국내 과학 분야 학회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얻어낸 학술 조직이었다.25

사실 1950년대 아시아재단이 한국에서 전개한 원조의 주된 대상은 인문·사회 과학 및 문화예술 분야였다. 예컨대 1956년 아시아재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설립된 사회과학연구도서관(이후 한국연구원)을 비롯해, 국제펜클럽(PEN) 한국본부,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활동 등이 대표적인 수혜 사례였다. 재단은 이들 기관을 통해 서구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지식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족문화유산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심리전의 도구로 활용하는 등 냉전기 문화 공보 외교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26 이러한 원조 지형을 고려할 때, 자연과학 단체인 한국응용동물학회에 대한 지속적인 자금 지원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재단은 한국동물학회를 이끌던 서울대 동물학과의 강영선이 1954년 한국 인구에 대한 유전학적 연구 명목으로 연구비를 요청했을 때, 설문조사용 종이만 지급했을 뿐 자금 지원은 거절하기도 했다.27

아시아재단의 유례없는 지원의 배경에는 먼저 회장 김헌규의 로비 역량과 국제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45년부터 미군정, ECA, UNKRA 등에서 활동했던 김헌규는 전후 한국에서 미국 원조 기관의 생리를 파악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생물학자였다.28 역사학자 리사 브래디(Lisa Brady)의 분석처럼, 김헌규는 UNKURA와 ECA 농업식량국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농업 원조 분야에서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며 미국과의 충분한 인적 네트워크를 이미 발전시킨 상태였다.29 바꿔 말해, 아시아재단의 지원은 한국응용동물학회라는 신생 학회에 대한 새로운 지원이라기보다는 김헌규라는 한국의 농업 근대화에 관여해 온 검증된 현지 파트너에 대한 투자의 성격이 강했다.

이에 더해 김헌규는 학술조사를 냉전기 아시아재단의 공보 및 문화 교류 목표에 부합하도록 재구성했다. 1957년 제주도 현지조사단 구성에 당시 연세대 초빙교수로 체류 중이던 언어학자 프레드 루코프(Fred Lukoff)와 미네소타 대학 응용동물학과의 미국인 곤충학자 클래런스 미켈(Clearance E. Mickel)을 포함시킨 것이 대표적이다.30 이러한 학제간 융합 기획은 재단의 인문사회 지원 논리에 부합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의 신뢰도를 크게 높였다. 당시 아시아재단 한국 대표 로렌스 톰슨(Laurence G. Thompson)은 이 조사가 “한국인에 의해 수행되는 최초의 중요 학술조사”라며 극찬했고, 참가자들에게 “귀중한 현장 연구 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적 가치를 들어 50만 환의 보조금을 신속히 승인했다.31

아시아재단의 후원을 바탕으로 첫 번째 현지조사는 1957년 8월 2일부터 20일까지 19일간 26명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원정 대장 김헌규를 필두로 포유류반(원병휘), 조류반(원병오), 곤충반(백운하), 기생충학반(이근태), 식물반(이영노), 언어 및 민속반(프레드 루코프)이 꾸려졌다. 이들은 제주 전역을 누비며 입체적인 조사를 벌였는데, 백운하와 이영노 팀은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횡단하며 채집을 진행했고, 원병휘ㆍ병오 형제는 1,200m 지대에서 일주일간 체류하며 수집에 몰두했으며, 루코프는 제주 시내와 서귀포에서 전통 민요 30곡과 주민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성과를 남겼다.32

자연과학 사업의 학술적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역량이 부족했던 아시아재단이 제주도 현지조사 이후로도 응용동물학회에 지속적인 지원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학회 활동이 갖는 대중 공보 효과가 있었다.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은 한국연구원이 엘리트 지식인들을 위한 학술 인프라 구축에 집중했다면, 응용동물학회는 현지조사에서 수집한 동식물 표본을 대규모 대중 전시회로 기획하고 일선 교사들을 교육하는 데 주력했다. 김헌규는 8월 17일에 제주 시내 USIS 갤러리에서 개최한 전시회와 강연회에 천 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고, 10월 21일부터 덕수궁에서 진행한 표본 전시 역시 그 교육적 효용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관의 표창을 받았다고 재단에 보고했다.33

김헌규는 이러한 공보적 성공을 지렛대로 삼아 연구 성과를 능숙하게 포장했다. 1957년 8월 31일 한국응용동물학회 회장 명의로 톰슨에게 보낸 서신에서 김헌규는 재단의 후원으로 “조류 표본 200점, 설치류 표본 200점, 곤충 표본 1,000점” 등 “엄청난” 성과를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포유류 목록,” “한국나비 도감”, “한국조류 도감” 등 3권의 학술 보고서를 저술 및 출판할 계획이라며 인쇄용 종이를 추가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34 실제 수집 결과가 포유류 28종 130개체, 곤충 100종 2,000개체 수준이었고 신종이나 신아종 발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과장된 보고였다. 다만 당시 원병휘ㆍ병오 형제가 독자적인 조수 목록을 준비하던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프로젝트에 필요한 물자 확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내용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높다.35

이러한 학술적 실상에도 불구하고 응용동물학회가 문화 원조를 통해 얻고자 했던 대중적 가시성과 계몽적 성과를 충족시켜 주었기에 재단은 크게 만족했다. 같은 해 12월 23일에 토마스 콜라한(Thomas S. Colahan) 한국 부대표는 원병휘의 제주도 겨울철새 표본 수집을 위한 추가 보조금을 승인했고, 한국응용동물학회는 아시아재단의 이례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을 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36 1958년 7월 1일에 콜라한 부대표는 “작년 여름 제주도에서의 성공”을 치하하며 응용동물학회의 설악산 학술조사 비용 60만 환을 승인했다.37 설악산 현지조사는 8월 4일부터 12일까지 9일간 27명의 참여로 진행되었으며, 포유류반, 설치류반, 조류반, 곤충반, 응용곤충반, 식물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전해와 마찬가지로 원병휘, 황종현, 원병오, 백운하 등이 각 반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치류반과 응용곤충반은 설악산 남쪽 기슭의 신흥사에 주둔하며 채집 활동을 진행했고, 조류반과 포유류반은 첫 5일 동안은 백담사에, 나머지 4일은 신흥사에 체류하며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이외에 곤충반 및 식물반은 대청봉까지 등반하며 채집 활동을 벌였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악인 2명이 현지조사에 동참한 것과 육군 제1야전군이 교통 편의 및 경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38 이는 아직 한국전쟁 휴전이 몇 년 되지 않아 산속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무장공비에 대한 우려가 만연해 있던 상황을 반영한다.39

설악산 현지조사는 제주도 조사와 비교해 볼 때 조류와 포유류 채집이 매우 빈약했고, 지원 금액은 늘어난 반면 체류 기간은 오히려 짧았다. 대신 나비 45종 154개체, 딱정벌레와 벌 250종 3,700개체 채집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활용해 10월 22일부터 11월 10일 사이에 덕수궁에서 표본 및 사진 전시를 하는 공보 활동에 보다 집중한 듯하다.40 실제로 김헌규는 설악산 현지 조사에 앞서 “세계의 곤충” 전시회를 주최하고 콜라한 부대표를 초청했는데, 콜라한은 재단 총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서울에서 본 전시회 중 최고 수준”이며 학생들에게 “과학 표본을 올바르게 고정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공보적, 교육적 가치가 높은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41 이러한 이유로 상대적으로 빈약한 채집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재단은 10월 22일에 설악산 학술조사 결과물 출판을 위해 67만 환의 보조금을 추가로 승인했다.42

아시아재단 한국 지부는 김헌규를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같은 해 10월에 콜라한은 싱가포르 대표에게 메모를 보내 12월에 말라야 대학에서 개최될 “월리스-다윈 심포지엄”에 김헌규 교수의 참석 지원을 요청했다. 이 메모에서 그는 김 교수를 “연구 과학자이자 실용적인 교사”인 “귀한 인물(rara avis)”이라 칭하며, 그가 이미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과 표본을 교환할 정도로 국제적 역량을 갖춘 학자라고 강조했다.43 이에 앞서 8월 19에는 한국 지부에서 대만 지부 대표로 전보된 톰슨이 직접 김헌규와 국립대만박물관 간의 “한국산 나비 표본 교환”을 주선하기도 했다.44

아시아재단의 지원은 1959년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6월 2일에 톰슨 대신 한국 대표로 부임한 존 (잭) E. 제임스(John “Jack” E. James)는 한국응용동물학회의 지리산을 대상으로 한 제3차 현지조사에 100만 환을 지원하는 것을 승인했다.45 7월 24일 서울사무소가 재단 본부에 보낸 서신은 지금까지 아시아재단이 응용동물학회에 지원한 학술 조사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탐사가 될 것”이라며 “보조금 지원 요청을 강력히 승인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서울사무소는 응용동물학회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훌륭한 현장 경험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 나라의 과학 지식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데 헌신하는 역동적인 조직”일뿐만 아니라, 이전 현지조사들이 “가치 있는 표본 수집”을 바탕으로 한 “인상적인 대중 전시회”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46

1959년도 지리산 조사는 8월 3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총 36명이 참가한 학회 최다 규모의 활동이었다. 원정 대장으로 김헌규, 곤충반 리더로 백운하, 조류반 리더로 배재고 생물교사이자 학회 운영위원으로 새로 임명된 최요한, 포유류반 리더로 원병휘, 외국인 곤충학 연구자로 미 육군 도쿄 406 의학연구소 곤충학과장 머독(Wallace P. Murdoch) 대위와 미8군 제37예방의학중대 존스턴(Larry Johnston) 소위 또한 현지조사에 참여했다. 원정대는 지리산이 경상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점을 고려해 각기 다른 등반 경로로 이동하며 채집 조사를 진행했다. 곤충반은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거쳐서, 조류팀은 함양에서 천왕봉으로, 포유류 팀은 화개에서 세석평정을 지나 천왕봉으로 향했다. 2차 설악산 조사와 마찬가지로 무장공비나 빨치산에 대한 우려 때문에 구례 경찰서장의 협조 하에 무장 경찰 경호를 받았다.47 이전 조사들과 마찬가지로, 지리산 조사에서 수집된 채집 표본을 바탕으로 11월 11일부터 30일까지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과학전람회의 일부로 전시회를 진행했다.48 아시아재단은 9월 2일에 현지조사 결과에 대한 학회지 출판을 명목으로 24만 3,350환을 추가로 지원했다.49

3차 조사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군과의 공식적인 협력이었다. 아시아재단은 미 육군 406 의학연구소 소속 머독 대위가 자비로 3차 조사에 합류한 일을 미 육군이 그간 아시아재단이 지원해 온 응용동물학회의 “현지조사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이해했다.50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네소타 대학의 응용동물학자 클래런스 미켈이나 미8군의 군사 곤충학자 펜넬도 응용동물학회의 현지조사에 참여하거나 학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회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지리산 조사는 학회의 미군 군사 곤충학과의 교류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51

특히 응용동물학회의 현지조사가 미군 군사 곤충학자들과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은 이들의 보존 논리가 냉전기 전염병 방제라는 군사적ㆍ보건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머독은 지리산 조사의 참여 성과를 『응용동물학잡지』에 기고했는데, 소의 피를 흡혈하는 등에 목록을 작성한 그의 연구는 위생동물 분포를 파악하려는 학회의 응용적 목표와 군사 곤충학의 이해가 어떻게 맞물릴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52 실제로 <표 2>가 보여주는 것처럼 나비나 포유류 및 조류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응용’ 동물학회답게 조사는 쥐나 모기, 응애, 진드기, 파리, 송림 해충 등 구제가 필요한 의료 동물들이 주요 연구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학회의 성격 덕분에 의료 방역에 관심이 있는 군사 곤충학자들과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다.

표 2 『응용동물학잡지』 1958년 1호~1960년 3호 논문 목록. [출처: 『응용동물학잡지』 각 호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작성]

구분 제목 저자(소속) 비고
제1권 제1호 (1958년 2월 28일 발행)
1. 학술조사 보고 The Joint Scientific Expedition to Quelpart Island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영문 보고
제주도의 포유류 원병오, 우한정 (임업시험장)
제주도산 쥐와 그 체외기생충(Studies on Rats in Cheju Province and their Ectoparasites) 황종현(국립김포공항검역소)
제주도 귤해충 문제(Citrus Insect Problem in Quelpart Island) 백운하(서울대학교)
제주도산 진드기에 관한 연구 (예보) (A Study on Ticks on Cheju Island (Preliminary Report)) 이근태(안양가축위생시험소)
2. 연구 보고 고자리파리 (Hylemyia antiqua Meigen)의 생활사와 방제법에 관한 연구(Studies on Life History and Control Method of Onion Maggot (Hylemyia antiqua Meigen)) 백운하(서울대학교)
덕적군도의 곤충상 (제2보) (The Insect-fauna of Dukchok Islands)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제2권 제1호 (1959년 4월 25일 발행)
The Second Scientific Expedition to Solak Mountain 편집부 영문 보고
1. 학술조사 보고 설악산산 접류의 수직적 분포(A Vertical Distribution of Butterflies from Solak Mountain)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설악산의 조류와 포유류(Notes on the Birds and Mammals from Mt. Solak in Summer) 원병휘(신흥대학교), 원병오, 우한정 (임업시험장)
설악산산 진딧물(A List of Aphidae (Hemiptera) of Mt. Solak) 백운하(서울대학교)
설악산의 모기(Notes on the Mosquito from Solak Mountain) 황종현(국립김포공항검역소), 염용진(수도의과대학)
2. 연구 보고 오대산산 접류 (제1보) (Butterflies from Mt. Odae)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사과의 응애류(Spider Mites on Apple in Korea) 백운하(서울대학교)
한국산 서류의 연구 (제1보) (Studies on the Murine-Rodents of Korea) 황종현(국립김포공항검역소)
Centenary and Bicentenary Congress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다윈-월리스 100주년 심포지엄 후기 (말라야 대학) 아시아재단 싱가포르 지부 후원
제3권 제1호 (1960년 9월 25일 발행)
1. 학술조사 보고 The Third Scientific Expedition to Jiri Mountain 편집부 영문 보고
지리산의 다족류(On the Myriapoda of Mt. Jiri) 백갑용(경북대학교)
Aphids from the Mt. Jiri 백운하(서울대학교) 영문 보고
A List of Tabanidae Collected in the Jiri Mountain Korea 월리스 P. 머독(미 육군 406 의학연구소) 영문 보고
2. 연구 보고 설악산 곤충 목록(Insect List of Solak Mountain)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한국산 수종 조류 채집표본에 대하여(Notes on Some Birds Collection of Korea) 원병오(임업시험장)
파리 Population 조사 (덕적도) (Fly Population Survey in Dukchuk-Do, Korea) 황종현
덕유산의 접류(Butterflies from Dok-Yu (1508m) Mountain)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신예향 (서울여자사범대학)
울릉도산 애급쥐에 대하여(On the Roof-Rat of Dagelet Island) 원병오, 우한정(임업시험장)
Insect Pest Control in Korea 클라렌스 E. 미켈(미네소타대학교) 영문 보고
Bird Protection in Korea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원병오 (임업시험장) 영문 보고, 12회 ICBP 총회 제출 보고서
전주지방 송림해충조사를 마치고 (Forest-Insect Surveys in Chonju Area) 김헌규(이화여자대학교)

이상에서 살핀 것과 같이 아시아재단의 지원에 따른 현지조사가 학회 활동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학술지 또한 그를 반영한 보고 체계를 갖추었다. 『응용동물학잡지』의 각 호별로 게재된 논문들을 살펴볼 경우 개별 연구 보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간 발간된 학회지의 핵심적인 내용은 재단이 후원한 3대 현지조사의 결과 보고였다(표 2).

응용동물학회의 현지조사를 당시 아시아재단 관계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가장 독창적이고, 국내의 유일한 생물학 관련 학술 조사 활동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 대규모의 학제간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현지조사나 군 지원을 활용하고, 현지조사 결과물을 바탕으로 대중 교육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은 사실 해방 직후부터 ‘순수’ 생물학자들이 한국산악회에 참여하며 추진했던 국토구명사업과 각 대학 산악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아카데믹 알피니즘 활동의 전형적인 패턴을 모방한 것이었다.53 더구나 이들이 현지조사 대상으로 삼은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모두 한국전쟁 이후 한국산악회 및 대학 산악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여러 학술조사단의 현지조사 활동에 의해 어느 정도 답사 루트가 알려져 있던 상태였다. 한국응용동물학회는 이런 확립된 아카데믹 알피니즘과 이들의 답사 루트를 모델로 차용하되, 학술의 자리에 응용을 놓고, 국토구명이라는 구호 대신에 경제와 공중보건 기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아가 기존 학술 산악 활동에 종사하던 생물학자들이 얻지 못하던 아시아재단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심의 ‘순수’ 생물학계 외부에서 1950년대 후반 동안 학술 현지조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김헌규와 원병휘, 그리고 원병오 등 응용동물학회의 핵심 인사들은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은 학회의 현지조사 활동을 개인의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61년 홋카이도 대학 박사학위 수여를 위해 제출된 논문 가운데 한 편이었던 “설악산 나비의 수직적 분포”(1959)는 김헌규 자신이 학술단장으로서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수행한 1958년 응용동물학회의 설악산 현지조사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원병오 역시 홋카이도 대학에서 농학박사를 수여받을 때 제출한 13편의 참고 논문 가운데 5편이 『응용동물학잡지』에 출판한 논문들이었다.54 또 원병휘ㆍ병오 형제는 2차 설악산 조사 추가 현지조사 명목으로 겨울철새 조사 연구비를, 김헌규는 “전라북도 내 주요 산림의 해충 피해 조사”(1959)나 ICBP에 출품할 “한국의 겨울새” 필름 촬영을 위한 현지 활동(1962) 연구비를 아시아재단으로부터 후원받았다.55

이처럼 학회 활동과 학회지 출판이 전적으로 아시아재단에 의존했으므로, 재단의 학회 후원이 학회의 존속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재단 내부 문서에 따르면 1962년 ICBP에 홍보할 생태 필름 촬영 지원이 재단이 응용동물학회를 후원한 마지막 사례이다. 비록 1970년에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소속 산하단체로 응용동물학회가 등록되어 있고 학회 활동을 보고하고 있으나,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김헌규 개인이 단독으로 운영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6 또 1958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한국응용동물학회에서 활발히 활동한 백운하의 응용동물학회 임원 임기가 1961년 10월로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 학회 활동 이력이 없는 것을 고려해 보면 1961년 말~1962년 초 사이에 재단의 현지 조사 및 학회지 출판 비용 지원 중단과 함께 학회 활동이 정지된 듯하다.

아시아재단이 왜 “귀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던 김헌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 국립공원 설립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IUCN 회장 해럴드 제퍼슨 쿨리지(Harold J. Coolidge)가 1968년에 김헌규가 미국 국립공원협회 인사들에게 접촉하려 할 때 보낸 협회에 보낸 경고 서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서한에 따르면, “아시아재단 한국 지부는 그에게 단단히 질려” 버렸고, 김헌규는 “해외 자금”을 받아 조류에 관한 “여러 필름을 제작했으나 그 필름들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7 정황상 김헌규가 1962년도 생태 필름 제작 후원과 관련해 재단이 가장 중시하던 가시적인 공보 성과물을 끝내 제출하지 못하면서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학회의 존속이 재단의 자금력과 김헌규 개인의 섭외 역량에 의존하고 있던 구조적 한계 탓에 아시아재단의 후원 중단은 곧 한국응용동물학회의 급격한 활동 위축과 사실상의 기능 정지로 이어지고 말았다.

3. 응용의 기치에서 자연 보존으로

학회의 존속은 아시아재단의 후원과 김헌규 개인의 역량에 의존한 탓에 5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그쳤으나, 응용동물학회 인사들이 제시한 자연 보존론은 ‘순수’ 생물학자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궤적을 그리며 제도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순수’ 생물학자들이 1950년대 중반 이후 산악 활동을 매개로 천연기념물 보호와 국토 수복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존론을 전개했다면,58 농학계 중심의 응용동물학회는 자연을 농업 증산과 같은 실생활의 “실용적 쓸모”를 위한 관리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보존론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원병오와 김헌규의 조류 보호론이다. 특히 원병오는 학회 창립 전인 1950년대 중반부터 “조수 보호의 긴급성”을 주창해 왔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조류학의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학회의 지향점인 “경제적ㆍ실용적 보존”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구적인 논의였다.59 원병오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 부친 원홍구 및 일본 조류학자들의 논의를 이어받은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회의 실용적 지향점이 보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예견하는 주장이기도 했다.60

실제로 원병오가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집필한 1956년의 저술 『조수보호』에서 원병오는 조류 보호를 단순한 애호 활동이나 학술적 탐구의 영역에서 탈피시켜 “국가적 경제상 농림업 경영상” 필수적인 요소로 재정의했다.61 그는 서문에서부터 야생 조류가 농림업에 미치는 “유익과 피해”를 “세밀히 조사 연구”해야 함을 역설하며, 조수 보호가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한 과학적 관리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원병오는 한국의 조류가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격감 일로”에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방치할 경우 “국가적 손실”이 막대할 것임을 경고했다.62 이는 당시 전후 복구와 식량 증산이 지상 과제였던 한국 사회에서 조류 보호를 정당화하는 실용주의적 주장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원병오는 박새, 곤줄박이 등 산림 조류의 위 소화 내용물 분석 데이터를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도표를 통해 이들 조류가 섭취하는 먹이의 65%에서 94%가량이 송충이를 비롯한 해충임을 드러냈다. 즉, 대다수의 조류는 농림업의 해충을 구제하는 “유익조(益鳥)”이며, 이들의 감소는 곧 해충의 대발생과 산림 피해로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원병오의 조류 보호론은 해충 구제라는 응용의 기치 하에 제안된 것으로, 그는 자연계의 “유해동물 증가”를 막기 위한 생물학적 제어 장치로서 새의 기능을 부각했다.63

나아가 그는 조류 보호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인공 소상(새집) 설치를 통한 유익조의 “인공 증식”을 제시했다. 원병오는 1956년부터 임업시험장 연구의 일환으로 서울 청량리 임업시험장 시험림에 인공 소상을 설치하여 박새, 찌르레기 등 해충을 포식하는 조류의 번식 생태를 연구하고 개체수를 늘리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보호 캠페인을 넘어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개량하고 관리하려는 응용적 시각이 조류 보호 주장에 적용된 사례였다. 그는 소상의 규격, 설치 방향, 높이 등을 상세히 도해와 함께 설명하며 이를 통해 삼림 해충을 방제하는 저비용 고효율의 기술로서 유익조의 증식 기술을 보급하고자 했다.64

이러한 해충 방제로서의 조류 보호 논리가 구체성을 띠고 실제 정책 제안 목소리를 낼 만큼 힘을 얻게 된 것은 1960년 5월 24~29일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12회 ICBP 총회에 참석하면서부터이다. 이미 1959년에 한국응용동물학회는 새로이 개설되는 ICBP 한국 지부(Korean National Section)로 인가를 받고 공식 초청을 받아 회장 김헌규와 간사 원병오가 한국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65 이처럼 ICBP 한국 지부 창설에 한국동물학회가 아니라 한국응용동물학회가 지명된 것은 한국에 단기 체류하거나 미8군에서 활동하던 군사 곤충학자들과 이들의 네트워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 김헌규와 원병오는 단순한 참관인이 아니었다. 5월 26일에 ICBP 의장인 스미소니언 협회의 시드니 딜런 리플리(Sidney Dillon Ripley)는 “한국, 말라야, 포르투갈, 소련, 벨기에령 콩고에서 5개의 새로운 국가 지부가 결성되었다”고 보고하며, 회의에 참석한 “한국 지부의 두 회원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이 회의에서 “아시아 대륙 섹션(Asian Continental Section)”의 공식 창립 또한 선포되었는데, 김헌규는 이 아시아 섹션의 부의장으로 인도 지부의 조류학자 살림 알리(Salim Ali)와 함께 선출되었다.66

김헌규는 국내 조수 보호 실무에 밝은 원병오의 지적 지원 가운데 적극적으로 조류 보호 의제를 주도했다. 위기종 보고 세션에서 그는 한국 중부에서 황새(Ciconia ciconia boyciana) 둥지 한 곳이 발견되었으나 “총에 맞아 죽었다”고 보고하며, “문교부에 황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또한, 야마시나 박사가 범태평양 조류 이동 연구 및 보호 협약을 위한 국제 조류 가락지 기구 설립을 제안했을 때 김헌규는 “한국 지부는 이 제안을 100% 지지한다”고 발언하며 한국 정부에 미국과 유사한 “야생동물 관리국 설립을 추진”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조류 보호 교육 세션에서는 “한국에 조류, 식물, 포유류 전시 및 조류 보존 분과를 갖춘 ‘청소년 박물관’을 설립할 계획”이며, “매일 학생들을 위한 영화 상영”을 구상 중이라고 발표했다.

실제로 김헌규가 1961년 겨울에 아시아재단에 생태 필름 촬영 지원 관련 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런 ICBP에서의 한국 지부 계획을 구현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헌규는 재단에 “한국응용동물학회(ICBP 한국 지부)”의 명의로 “한국의 겨울새” 15분짜리 필름을 제작해 뉴욕에서 열릴 제13회 ICBP 총회에서 상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67 해당 후원 가운데 촬영을 진행하며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김헌규는 이 생태 필름 촬영 활동을 공보부 영화제작소와 함께 학생들의 조류 보호 인식 제고를 위한 “기록 교육 영화”를 촬영하는 공적 사업으로 규정했다. 이 칼럼에서 김헌규는 일본 홋카이도의 “단정학 자연공원” 사례와 한국에서의 열악한 보호 실태와 무분별한 수렵 상황을 비교하며 하루 속히 부산 “하단에서 다대포 사이 일대를 백조 도래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설정하고 보호”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68

도쿄 ICBP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헌규와 원병오는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한 『참석 보고』에서, 국제 회의의 주요 결의 사항으로 “살충제 및 제초제가 조류와 인간에게 미치는 위험”을 가장 먼저 보고했다.69 이들은 보고서에서 “매년 막대한 양의 살충제가 수입되어 살포되고 있으나 해충 피해를 부분적으로밖에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화학적 방제의 한계를 생물학적 방제인 조류 보호로 보완해야 한다는 ICBP의 입장을 국내에 소개했다. 이는 미군정 시절부터 농약 도입에 관여해 온 김헌규가 살충제의 부작용을 공식적으로 거론하며, 자연보호를 선진국형 농업 및 보건 정책의 일환으로 격상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70

또한 이 보고서는 “야생조류 및 자연의 천적이 감소”함에 따라 “해충 및 해수[쥐]의 대번성”을 초래하여 “농작물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진단하며, 조류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행정 조직의 개편과 상업적 남획의 근절을 강력히 요청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미국이나 일본의 사례를 들어 정부직할의 “야생동물관리청”과 같은 전문 연구 기관의 설립을 제안했으며, 서울의 시장이나 거리에서 버젓이 자행되던 “금지된 조류의 사체와 박제, 깃털의 매매”를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시장에서는 보호조류가 식용이나 장식용으로 무분별하게 거래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를 문명국으로서 “수치스러운 일”로 규정하고 강력한 법적 통제를 요구했다.71 이는 조류 보호를 국가가 관리해야 할 “자원 관리”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였으며, 밀렵과 불법 거래를 방치하는 행정 관행을 타파하고 법적ㆍ제도적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근대화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학회가 발간한 『한국응용동물학회지』의 지면 구성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1960년 9월 발간된 학회지 제3권 제1호에는 앞서 언급한 「한국의 조류 보호」 보고서와 함께 김헌규의 「전주지방 송림해충 조사를 마치고」라는 논문이 나란히 실려 있다. 김헌규가 송충 피해의 심각성을 보고한 지면에 이어 원병오와 김헌규의 조류 보호 보고서가 배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학회가 “해충 피해의 실태” 보고와 “해결책으로서의 조류 보호”가 하나의 맥락으로 묶여 있다는 이해를 보여준다. 당시 응용동물학회 회원들에게 송충 대발생은 살충제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난제였고,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천적인 조류의 보호와 증식이었다.

김헌규의 1961년 보고는 1960년 7월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주지방 송림 해충 조사를 실시한 결과로, 전주, 완주 지역의 소나무 숲을 황폐화시킨 송충, 즉 솔나방 유충(Dendrolimus spectabilis)의 극심한 피해 실태를 상세히 소개했다. 같은 호에 실린 미네소타 대학의 클래렌스 미켈의 「한국의 해충방제」라는 기고문 또한 송충으로 인한 “산림의 전면적인 황폐화”에 대한 관찰과 이와 관련된 전문적인 방제 대책의 부재를 지적했다.72

이렇게 심각한 송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헌규는 기존의 해충 구제 대책인 “유충을 손으로 잡아 없이 하는 것, D.D.T를 비행기로 살포하는 것”의 낮은 경제적 효용성을 지적하며 “항구적인 대책”으로 “송충을 포식하는 뻐구기, 벙어리뻐구기, 두견새 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제시했다. 이어서 김헌규는 송충과 같은 해충 구제라는 실용적인 목적 하에 조류 보호에 힘쓰는 국제 기구 및 국가 차원의 학술 및 대중 활동과 규제가 이미 선진국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음을 소개했다.73 이는 1960년에 ICBP에 원병오와 함께 제출한 한국 지부 보고서의 결론에서 “유익조의 보호가 해로운 곤충의 자연적 제어(natural control)에 상당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단언한 시각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74 이처럼 김헌규와 원병오에게 조류 보호는 국토보존이나 천연기념물 보존과 같은 민족주의적 자연관과 연동되어 달성해야 할 의제라기보다는 응용동물학이라는 틀 안에서 산림 녹화와 해충 방제라는 실용적 목표를 위해 요구되는 자원 관리 정책이었다.

다만 응용동물학회가 주창한 자연의 자원화 논리를 단일한 성격의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으로 환원하기에는 구성원들의 접근 방식에 미세한 층위의 차이가 존재했다. 원병오가 주창한 경제조류학적 보호론은 당대 무분별한 야생조류 남획과 애완용 포획이 횡행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기된 것이었다.75 따라서 그의 논리는 산림 보전(해충 방제)과 조류 보호를 양립시키기 위한 생태적 순환담론의 성격을 보였다. 반면에 김헌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을 관광 수익 창출과 외화 획득을 위한 자본주의적 자원으로 적극 개발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요컨대 김헌규의 시각은 원병오에 비해 국가 주도의 상업적 경제 개발 논리와 보다 직접적으로 결합하며 이른바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의 전형을 가시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헌규는 송충 문제 해결을 위해 조류 보호를 주장하면서 그 수단으로 선진국을 모방해 “특별한 자연공원을 설립하고 정부예산을 지출”할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와 같은 비전은 그와 다른 학회원들이 지리산 지역에 대한 국가 주도 개발 계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현실화될 가능성을 얻었다.76 역사지리학자 김지영의 지적처럼 박정희 정권의 재건국민운동본부 주도로 설립된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가 1963년에 진행한 지리산 조사는 1967년에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로 지정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는 사업이었다.77

김헌규는 이 위원회의 부위원장이자 국립공원 분과 및 동물 분과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12회 ICBP 회의에 참여한 직후부터 국립공원 설립 관여에 관심을 보였던 김헌규는 1962년 시애틀에서 열린 제1차 세계국립공원회의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국립공원 의제를 선점하려고 노력했고, 이런 맥락에서 그가 국립공원 분과를 이끌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78 또 국립공원 분과에는 간사 원병오뿐만 아니라 우한정, 미승우 등 응용동물학회 회원들이 전문위원으로 합류했다. 또 부회장 백운하 역시 해충분과 위원으로 참여했다.79 1959년 한국응용동물학회의 지리산 학술 조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 회원들에게 지리산이 완전히 처음부터 현지 조사를 시작해야 할 곳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의 부위원장이자 국립공원 분과 위원으로서 김헌규가 작성한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의 「국립공원」 편은 응용동물학회의 자연 관리 철학이 어떻게 국토 개발 계획 속에 구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보고서에서 김헌규는 지리산이 웅장한 산세와 원시림, 그리고 사향노루와 같은 특산 동물의 서식지로서 국립공원의 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했다.80 중요한 점은 그가 국립공원 지정을 단순히 자연에 인간의 개입을 차단하는 차원(preservation)이 아니라, 국민에게 영감과 휴양을 제공하고 관광객을 유치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적극적인 개발의 일환으로 정의했다는 사실이다.81 이는 앞서 원병오와 김헌규가 ICBP 보고서에서 조류 보호를 농림업 경영을 위한 필수 요소로 재정의했던 실용주의적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러한 실용적 접근은 김헌규가 제안한 구체적인 시설 계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국립공원 내에 “자연박물관”과 “야생동물원”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학술적 목적뿐만 아니라 관광 산업적 목표를 담고 있었다. 김헌규는 일본 국립공원의 사례를 들며 박물관과 동물원이 “외화 획득의 한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특히 헐리우드나 케냐의 사례처럼 야생 상태 그대로의 동물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에게 스릴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82 야생 상태 그대로의 동물원에서 동식물을 보호하자는 그의 주장은 낭만주의나 보호 그 자체의 목적보다는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했다.

나아가 김헌규는 농지 개발 및 관리 방안에서도 영세 농가의 무분별한 입식을 반대하고 대규모 기업 영농을 주장하면서 자연 보존과 경제적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연의 관리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83 그는 영세 농민들이 입식할 경우 생활고로 인해 도벌을 일삼아 자연 풍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며 개발공사를 조직하여 대단위 기업 영농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84 그는 자연을 파괴하는 비효율적인 전통적 농업 방식 대신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근대적 관리를 통해 자연을 보호하면서도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김헌규의 개발주의와 유연하게 결합된 자연 보존론은 “조국 근대화”와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박정희 정권의 이해와 부합했다. 김헌규의 ‘응용’적 배경은 ‘순수’ 생물학자들이 가질 수 없는 유연성을 부여했고, 이는 그가 1960년대 이후 국립공원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국가 주도의 자연보호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원동력이자 동시에 그의 자연보존 논의의 결정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헌규와 원병오 등 한국응용동물학회 주요 인사들은 1960년대 초반에 해충 방제라는 미시적인 응용의 차원을 넘어 국립공원이라는 거시적인 국토 관리의 영역으로 진입하며 조류 보호를 포함한 자연 보존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로 나아갔으나, 실용적 목표를 가진 자연 보존론은 그대로 유지했다. 1950년대 응용동물학회 주요 인사들에게 자연 보존은 순수 학술적 탐구의 대상을 수호하는 것을 넘어 전후 한국 사회의 시급한 과제였던 식량 증산과 산림 녹화를 달성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이었다. 이들이 주창한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은 자연을 개발의 방해물이 아닌, 국가 재건을 위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해야 할 자원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1960년대 개발주의 정부의 지역개발 활동이나 1970년대에 본격화되는 국가 주도의 자연보호 운동과의 접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비록 응용동물학회 자체는 아시아재단의 지원 중단과 함께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김헌규와 원병오가 다져 놓은 “응용”과 “보존”의 연결고리는 이후 한국자연보존협회를 통해 계승되며 한국의 과학자들 중심의 자연보호 운동이 개발주의에 타협적 태도를 취하며 공존해 나가게 되는 인식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었다.

4. 맺음말

본 연구는 1950년대 후반 “응용”과 “실용”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국응용동물학회의 인사들이 전후 한국 사회의 현실적 과제 해결을 목표로 설립되어 독자적인 경로를 통해 자연 보존 담론을 만들어 나간 과정을 추적했다. 1957년 창립된 한국응용동물학회는 서울대학교 동물학과 중심의 ‘순수’ 동물학과와 선을 그으며 농업 생산성 증대와 방역이라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다는 해결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학회의 주축 멤버들은 농림부 임업시험장이나 보건사회부 산하 기관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고, 이들은 동물을 단순한 분류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닌 경제동물 혹은 위생동물로 파악하고 그 생활사를 밝혀 방제책을 강구하는 것을 학회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지향점과 회장 김헌규의 로비 역량은 냉전기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맞물려 아시아재단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었고, 한국응용동물학회는 이를 기반으로 1957년 제주도, 1958년 설악산, 1959년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학술 현지조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학회의 활동이 미군 군사 곤충학자들과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학회는 미8군 소속의 곤충학자나 미 육군 406 의학연구소 관계자들을 현지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쥐, 모기, 진드기 등 전염병 매개체 조사라는 학회의 목표가 군사 의학적 필요성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충 박멸과 방제의 논리가 1960년 ICBP의 참여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조류 보호 담론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김헌규는 원병오의 조수 보호론을 좇아 송충으로 인한 산림 황폐화가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살충제 살포의 한계를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조류를 해충의 천적이자 유용한 생물학적 제어 수단으로 호출했다. 이들에게 자연 보존은 감상적인 애호 활동이 아니라 농림업 경영과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유익조의 증식과 자원 관리를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응용동물학회의 자연 보존론은 적어도 1960년대 초반에는 ‘순수’ 생물학자들의 보존론과 그 기원과 관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보였다. 1940~50년대 한국산악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리과 대학 소속의 생물학자들은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진 아카데믹 알피니즘을 통해 자연 보존 인식을 형성했다. 이들에게 자연 보존은 ‘국토’의 재발견이자 민족적 상징으로서의 천연기념물을 보존하는 행위였다. 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응용동물학회의 ‘응용’ 학자들에게 자연은 관조와 민족적 애호, 혹은 학술적 탐구 관심의 대상을 넘어, 방제와 증식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산출해야 할 구체적인 자원이자 합리적 관리의 대상이었다. ‘순수’ 생물학자들이 국토 구명과 천연기념물 지정에 몰두할 때 응용동물학회는 해충 방제와 생산성 향상의 논리로 자연에 접근하며 독자적인 자연 보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결론적으로, 한국응용동물학회의 활동은 한국 환경사에서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이 어떻게 국가의 통치 논리와 맞물려 부상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시아재단의 지원 중단과 함께 학회는 비록 단명했지만, 이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한 자원 관리로서의 자연보전 논리는 한국 자연보호의 역사에 중요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다. 서구의 자원 관리형 보전주의가 과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추구했던 것처럼, 응용동물학회 인사들 역시 조류와 곤충을 단순한 생물종이 아닌 국부 창출과 산림 녹화를 위한 필수 경제 자원으로 치환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응용동물학회의 관리 중심적 보전론에 가까운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기존 ‘순수’ 생물학계의 자연 보존론과 큰 파열음 없이 합류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학계 생물학자들이 추구했던 천연기념물 및 국토 보존 역시 근본적으로는 서구의 낭만주의적 생태 보호가 아니라, 전후 황폐해진 국토를 수복하려는 국가 재건의 민족주의적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담론 역시 애초에 철저한 반(反)개발적 성격을 띠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응용동물학회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경제 발전과 병행 가능한 합리적 관리라는 타협적 논리를 비교적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한국자연보존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이 두 그룹의 생물학자들은 국가 주도의 자연보호 운동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자연보존을 “국력 배양”과 “경제 개발”에 기여하는 하위 범주로 적극적으로 재편했다. 1972년 창간된 한국국립공원협회의 회보인 『금수강산』 창간호의 좌담회에 참여한 김헌규가 “무질서한 상행위”나 난개발을 비판하면서도 “숙박시설과 위생시설”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일본 사례와 같은 합리적 계획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85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순수’ 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을 여지가 있었던 이 주장은, 1970년대에 이르러 두 집단 모두에게 “자연보존과 경제개발의 조화”라는 도달해야 할 이상향으로 수용되었다.86 즉, 1970년대 생물학계가 채택한 국가 권력과의 타협 논리는 이미 10여 년 전 한국응용동물학회가 체계화했던 사상적 궤적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응용동물학회가 다져 놓은 이 자원 관리와 개발의 결합 논리는 자연보호가 국가의 경제 성장 프로젝트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인식적 틀을 제공했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의 과학자 주도 자연보호 운동이 개발 독재 국가와 갈등하기보다 관 주도의 운동으로 편입되며 공존의 길을 걷게 된 사상적 기원이자, 서구 환경사의 보전론의 궤적과 구별되는 한국적 개발주의적 자연 보존론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87 다만 이러한 응용동물학회의 실용주의적 논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순수’ 생물학자들의 민족주의적 보존론과 상호작용 및 융합의 과정을 거쳐 1970년대의 주류 담론으로 재편되었는지는 향후에 보다 세밀하게 해명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Acknowledgments

아울러 2022년 12월 22일 <한국 환경 보전과 자원 관리의 과학과 정치> 워크샵 발표 원고를 토대로 내용을 수정·보완하였음을 밝히며, 당시 유익한 논평을 제공해 주신 이종민, 전준, 배상희, 원주영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심사 및 편집 과정에서 건설적인 제안을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들과 편집인께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Notes

  1. 11970년대 한국의 공해 문제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고. 고태우, “1970년대 한국의 공해(公害) 상황과 재난 인식”, 『개념과소통』 28 (2021), 7-52; 신재준, “1970년 전후 공해(公害)의 일상화와 환경권 인식의 씨앗”, 『역사문제연구』 45 (2021), 523-555; 원주영, “디젤 자동차 시대의 대기오염 관리: 1960-70년대 한국 정부의 공해차량 단속과 책임의 개인화”, 『ECO』 24:1 (2020), 303-331.
  2. 2한국자연보전협회의 자연보호 운동에 대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고. Manyong Moon, “The Politics of Science in Korean Biology: From the DMZ Ecological Survey to the Nature Conservation Movement,” The Korean Journal of the History of Science 42 (2020), 431-447; 원주영, “1970년대 내수면 개발과 한국자연보존협회의 자연보존 운동”, 『역사비평』 145 (2023), 154-180; 원주영ㆍ현재환, “『자연보존』을 통해 본 1970년대 자연보전 논의의 변화”, 『생태환경과역사』 12 (2024), 73-115. 시기는 제각기 다르지만 과학자들이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각국의 자연보호 운동에서 맡은 역할을 다룬 국외 환경사 연구들로는 다음을 참고. Henny J. van der Windt, “Biologists Bridging Science and the Conservation Movement: The Rise of Nature Conservation and Nature Management in the Netherlands, 1850-1950,” Environment and History 18:2 (2012), 209-236; Stephen Bocking, “Nature on the Home Front: British Ecologists’ Advocacy for Science and Conservation,” Environment and History 18:2 (2012), 261-281; Wilko Hardenberg, Matthew Kelly, Claudia Leal, and Emily Wakild, eds., The Nature State: Rethinking the History of Conservation (London: Routledge, 2017); Richard W. Judd, “A ‘Wonderfull Order and Balance’: Natural History and the Beginnings of Forest Conservation in America, 1730 – 1830,” Environmental History 11:1 (2006), 8-36.
  3. 3국립공원 설립 운동 및 국립공원 설립 과정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고. Jaehwan Hyun, “Negotiating Conservation and Competition: National Parks and ‘Victory-Over-Communism’ Diplomacy in South Korea,”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57:2 (2024), 239-255; 김지영, “자연의 발전주의적 동원-지리산국립공원 생산 과정에 대한 역사지리적 연구”, 『대한지리학회지』 59:2 (2024), 143-162.
  4. 4Jaehwan 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The Transwar Origins of the Korean Nature Conservation Movement, 1926 – 1962,” Korea Journal 62:2 (2022), 79-115.
  5. 5김헌규에 대한 언급으로는 각주 3번의 연구들 및 다음을 참고. Jaeyoung Ha, “Preservation as a Force of Development: Local, National, and Cold War Dynamics in the Making of South Korea’s First National Park,” Korea Journal 64:3 (2024), 39-69.
  6. 6성한아, “한국 자연생태계의 일원이 된 야생동물: 자연환경보전정책의 등장과 보전 조류학 연구, 1956-1999”, 『한국과학사학회지』 43:3 (2021), 601-639.
  7. 7김헌규는 1960년 9월에, 원병오는 1961년 3월에, 원병휘는 1962년 1월에 홋카이도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한정은 1969년 3월에 규슈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乙第789号, 農學博士)를 받았다. 한국 언론 보도에서는 이학박사로 오기되었다. “박사학위(博士學位)”, 『동아일보』, 1969. 2. 22, 5면.
  8. 8여기서 ‘순수’ 및 ‘응용’ 생물학 사이에 대한 구별과 대조는 역사적 행위자들의 분류를 따른 것임을 밝혀둔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고. 김창환, “생물학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한국현대문화사대계』 Ⅲ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7) (2026년 2월 3일 접속);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생물과학협회 50년사』 (서울: 한국생물과학협회, 1996)
  9. 9Donald Worster, Nature‘s Economy: A History of Ecological Idea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이종민, “기포드 핀쇼(Gifford Pinchot)와 미연방 산림청의 성장: ‘미국적’ 산림학과 산림학의 전문직업화, 1889-1908”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10. 10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99-102.
  11. 11원주영, 현재환, 앞 논문, 96-105.
  12. 12김헌규, “‘발간사(發刊辭)”, 『응용동물학잡지』 1:1 (1958).
  13. 13같은 글. 1957년 12월에 한국생물학회가 한국생물과학협회로 개편되면서 협회 산하에 한국동물학회와 한국식물학회가 창립되었다. 또 서울대 생물학과는 1959년에 동물학과와 식물학과로 분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응용동물학회는 동물학이란 이름을 단 최초의 국내 학회로 볼 수 있다.
  14. 14같은 글.
  15. 15원병휘의 이력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 Jaehwan Hyun, “Science as a Family Affair: Won Pyong-Oh and the Transwar Origins of South Korean Ornith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9:1 (2024), 5-55.
  16. 16김헌규, “원로과학기술자의 증언(17)”, 『과학과 기술』14:2 (1981), 50-52; 김헌규, “원로과학기술자의 증언(18)-전공살려 농정에 간여”, 『과학과 기술』14:3 (1981), 43-46; 김헌규, “원로과학기술자의 증언(19)-인간들이 자연과 점점 멀어져 간다”, 『과학과 기술』14:4 (1981), 37-40.
  17. 17金憲奎, “論文目錄” (申請大學名: 北海道大學, 學位種別: 農學博士, 1961) (일본국회도서관 간사이관 소장본).
  18. 18백운하교수회갑기념사업회 편, 『白雲夏敎授論文集』(수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동창회, 1977).
  19. 19“정부인사(政府人事)”, 『평화신문』, 1955. 11. 4; “쥐천마리 연구하는 황종현씨”, 『경향신문』, 1958. 7. 28,
  20. 20한국위생동물협회는 1964년에 발전적 해체를 통해 한국기생충박멸협회로 거듭났다. 한국건강관리협회, 『한국건강관리협회 50년사』(한국건강관리협회, 2014), 49-54.
  21. 21여강백갑용박사회갑기념논문집준비위원회 편, 『白甲鏞博士回甲紀念論文集』(대구: 여강백갑용박사회갑기념논문집준비위원회, 1974).
  22. 22개발독재 시기로 박정희 시대에 관한 과학사 연구들을 종설한 연구로 다음을 참고. 김태호, “한국 근현대 과학사 연구의 최근 동향”, 『역사학보』(2014), 223, 351-370.
  23. 23“응용동물학회창립(應用動物學會創立)”, 『동아일보』, 1957. 7. 27, 4면. 해당 기사에는 “金浩직”이라 표기되어 있어 영양학자 김호직(金浩稙)과 혼동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틀 뒤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사에서는 “金浩植”이라고 명기하였으므로 본고는 이를 근거로 김호식이라고 기재한다. “응용동물학회창립(應用動物學會創立)”, 『조선일보』, 1957. 7. 29, 4면.
  24. 24“응용동물학회(應用動物學會)”, 『조선일보』, 1959. 7. 10, 4면.
  25. 25제주도종합학술조사에 대한 간략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고. 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105-106.
  26. 26정종현, 「아시아재단의 “Korean Research Center(KRC)” 지원 연구: 사회과학연구도서관(1956)/한국연구도서관(1958)/한국연구원(1964)으로의 전개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40 (2016), 57-108; 정종현, 「1950년대 아시아재단의 민족문화유산 지원 연구: 국립중앙박물관 지원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52 (2019), 131-156; 박연희, 「1950년대 한국 펜클럽과 아시아재단의 문화원조: 세계작가회의 참관기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40 (2016), 109-138.
  27. 27하곡강영선박사정년퇴임기념사업회 편, 『(霞谷)姜永善博士停年退任紀念文集』 (서울대학교, 1982).
  28. 28김헌규, “원로과학기술자의 증언(18).”
  29. 29Lisa M. Brady, “Sowing War, Reaping Peace: United Nations Resource Development Programs in the Republic of Korea, 1950-1953,”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7:2 (2018), 351-363.
  30. 30“The Joint Scientific Expedition to Quelpart Island”, 『응용동물학잡지』 1:1 (1958), 3쪽; Laurence G. Thompson, “Expedition to Cheju Island” (July 2, 1957), The Asia Foundation Records (이하 ARF), Box 3201, Hoover Institution Library and Archives.
  31. 31Laurence G. Thompson, “Memorandum to The President: Expedition to Cheju Island” (July 2, 1957), ARF, Box 3201; Laurence G. Thompson, “Letter of Agreement to Professor Kim Hon-Kyu” (July 12, 1957), ARF, Box 3201.
  32. 32“The Joint Scientific Expedition to Quelpart Island”, 『응용동물학잡지』 1:1 (1958), 1-3.
  33. 33Kim Hon-Kyu, “Joint Scientific Expedition to Cheju Island” (August 31, 1957), ARF, Box 3201.
  34. 34Kim Hon-Kyu, “Letter to Dr. Thompson” (August 31, 1957), ARF, Box 3201; “Paper Requirements for the Above” (August 31, 1957), ARF, Box 3201.
  35. 35Hyun, “Science as a Family Affair”, 35-36.
  36. 36Thomas S. Colahan, “Letter of Agreement to Mr. Kim Hon Kyu” (December 23, 1957), ARF, Box 3201.
  37. 37Thomas S. Colahan, “Letter of Agreement to Professor Kim, Hon-kyu” (July 1, 1958), ARF, Box 3201.
  38. 38“The Second Scientific Expedition to Solak Mountain”, 『응용동물학잡지』 2:1 (1959), 1-2.
  39. 39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98-99.
  40. 40“The Second Scientific Expedition to Solak Mountain”, 『응용동물학잡지』 2:1 (1959), 1-2.
  41. 41Thomas S. Colahan, “Memorandum to The President: Report on the World Butterfly Exhibit” (August 8, 1958), ARF, Box 3201.
  42. 42Jack E. James, “Letter of Agreement to Professor Kim, Hon-kyu” (October 22, 1958), ARF, Box 3201.
  43. 43Thomas S. Colahan, “Memorandum to The Representative, Malaya/Singapore: Wallace Memorial Symposium” (October 10, 1958), ARF, Box 3201.
  44. 44Laurence G. Thompson, “Memorandum to TAF Representative in Korea: Kim Hon-kyu: Exchange of Scientific Materials, Korea-Taiwan” (August 4, 1958), ARF, Box 3201.
  45. 45Jack E. James, “Letter of Agreement to Professor Kim, Hon-kyu” (June 2, 1959), ARF, Box 3201.
  46. 46“Memorandum to The President: Third Expedition of 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 (July 24, 1959), ARF, Box 3201.
  47. 47“The Third Scientific Expedition to Jiri Mountain”, 『응용동물학잡지』 3:1 (1960), 1-2.
  48. 48과학전람회는 11월 11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되었는데, 학회지에는 30일까지로 명기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49. 49“The Third Scientific Expedition to Jiri Mountain”, 앞 논문, 2; Jack E. James, “Letter of Agreement to Professor Kim Hon-kyu” (September 2, 1960), ARF, Box 3201.
  50. 50“Memorandum to The President: Third Expedition of 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 (July 24, 1959), ARF, Box 3201.
  51. 51“List of Members”, 『응용동물학잡지』 2:1 (1959), 76.
  52. 52Wallace P. Murdoch, “A List of Tabanidae Collected in the Jiri Mountain Area”, 『응용동물학잡지』 3:1 (1960), 18-20.
  53. 53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91-96.
  54. 54元炳旿, “論文目錄” (申請大學: 北海道大學, 學位種類: 農學博士, 1960) (일본국회도서관 간사이관 소장본).
  55. 55Jack E. James, “Letter of Agreement to Dr. Kim Hon-kyu” (July 27, 1960), ARF, Box 3201; William L. Eilers, “Letter of Transmittal: The Korean Society of Applied Zoology” (January 16, 1962), ARF, Box 3201; Lee Eui-kwan, “Memorandum: KO-SX-52” (January 19, 1962), ARF, Box 3201.
  56. 56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산하단체소식”, 『과학과기술』 3:3 (1970), 73-74.
  57. 57Harold J. Coolidge, “Letter to Anthony Wayne Smith” (July 31, 1968), Harold Coolidge Papers, Box 27, Harvard University Special Collections.
  58. 58Hyun, “Reconfiguring Mountain Expeditions”, 99-107.
  59. 59“조수보호(鳥獸保護)의 긴급성(緊急性) (상)”, 『조선일보』, 1955. 5. 25, 2면; “조수보호(鳥獸保護)의 긴급성(緊急性) (중)”, 『조선일보』, 1955. 5. 26, 2면; “조수보호(鳥獸保護)의 긴급성(緊急性) (하)”, 『조선일보』, 1955. 5. 27, 2면.
  60. 60Hyun, “Science as a Family Affair”, 32-33.
  61. 61원병오, 『조수보호』 (중앙임업시험장, 1956), 3-4.
  62. 62같은 책, 3.
  63. 63같은 책, 36-37, 47.
  64. 64같은 책, 49, 59-66.
  65. 65“XII Conference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VIII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Tokyo: ICBP, 1962), 31, 55.
  66. 66“Formation of Asian Continental Section”, VIII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Tokyo: ICBP, 1962), 42; “Executive Committee Members”, VIII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Tokyo: ICBP, 1962), 44.
  67. 67“XII Conference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Minutes)”, VIII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Tokyo: ICBP, 1962), 32-33; Kim Hon-Kyu and Won Pyong-Oh, “Bird Protection in Korea”, VIII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Tokyo: ICBP, 1962), 55-58.
  68. 68김헌규, “철새백조ㆍ두루미”, 『조선일보』, 1962. 1. 31.
  69. 69김헌규ㆍ원병오, 『제12회 국제조류보호회의 참석 보고서』 (서울: 문교부 제출 보고서, 1960. 7. 18.), 9-10.
  70. 70같은 책, 18.
  71. 71같은 책, 19.
  72. 72Clarence E. Mickel, “Insect Pest Control in Korea”, 『응용동물학잡지』 3:1 (1960), 53-55.
  73. 73김헌규, “全州地方 松林害虫調査를 마치고”, 『응용동물학잡지』 3:1 (1960), 61-62.
  74. 74Kim Hon-Kyu and Won Pyong-Oh, “Bird Protection in Korea”, 『응용동물학잡지』 3:1 (1960), 60; 김헌규ㆍ원병오, 앞의 책, 19.
  75. 75성한아, “양조(洋鳥)와 야조(野鳥): 새 기르기 실천을 통해 본 인간-야생조류 관계 변천사, 1956-2001”, 『생태환경과역사』 13 (2024), 305-346.
  76. 76김헌규, “全州地方 松林害虫調査를 마치고”, 62.
  77. 77김지영, 앞 논문, 147-152.
  78. 78당시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회의 소속으로 공식적으로 출국한 인물은 경주국립공원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중업이었다.
  79. 79「委員名單(智異山地域開發調査委員會)」,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편,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 (1963).
  80. 80김헌규, “국립공원(國立公園)”, 지리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편,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 (1963), 567.
  81. 81같은 글, 567, 570.
  82. 82김헌규, 같은 글, 576. 역사학자 하재영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미국 원조 기관과 한국 정부는 관광 산업이 경제에 미치는 승수 효과에 주목하여 국립공원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휴양형 공원으로 구상했다. Ha, op. cit., 60-61.
  83. 83다만 1965년 건설부가 지리산의 환경이 낙농업 등에 부적합하다고 결론 내리면서 이에 대한 대안적 개발 모델로서 국립공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Ha, op. cit., 55.
  84. 84김헌규, 같은 글, 578, 580.
  85. 85“지상 세미나: 엇갈리는 開發과 保存”, 『금수강산』 창간호 (1972), 132-137.
  86. 86“개발에 앞서 자연보존을 국립공원의 이상적 보호를 위한 학술세미나”, 『동아일보』 1971. 11. 22.
  87. 87한국자연보존협회의 활동을 관 주도 운동으로 평가한 서술로는 다음을 참고. 조홍섭, “자연보존협회 총재 박근혜의 빚”, 『한겨레』 2016. 1. 18.